모녀관계 연구서
토요일이다. 출근하지 않은 남편과 등원하지 않은 아이와 함께 맞는 아침은 휴일이라고 한가롭지 않다. 평일 아침을 떡 한 덩이로 때우던 남편에게 주말이라도 그럴싸한 아침밥을 차려주려 손발이 분주한데 아이는 자꾸 주방으로 들어와 내 주위를 맴돈다.
“엄마, 나 좀 봐. 이것 좀 봐. 잘 했지? 엄마도 해 줄까? 해줄게. 제발, 응응?”
얼기설기하게나마 제 머리카락 묶는 데 성공한 아이는 내 머리도 묶어주겠다며 야단이다. 등을 떠밀어 아빠에게 보내보지만 이내 돌아온다. 싱크대 앞에서 종종거리는 내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네 사정은 아랑곳없다는 듯 관심과 반응을 갈구한다.
용케 머리채를 붙들리지 않고 샐러드와 토스트를 차려 식탁 앞에 앉고 보니 벌써 시침이 9를 넘어가고 있었다. 11시에 시작하는 발레수업에 보내려면 10시엔 채비를 시작해야 하는데 아이는 이번엔 거실 바닥에 색종이를 널브러뜨리고 있다. 커피 한 모금에 한 번씩, 아이 이름을 식탁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채근으로 변해갈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응, 왜?”
“집에 있나?”
“응, 왜?”
“지금 롯데 홈쇼핑에 가방을 파는데 교회 갈 때 들면 좋을 것 같아서. 홈쇼핑 한 번 켜서 괜찮을지 한 번 봐봐라.”
아, 홈쇼핑이라. 엄마 입장에서 과한 부탁은 아니었다. 새벽 다섯 시면 눈이 자동으로 떨어지는 일흔의 엄마는 아침상을 물리고 믹스 커피를 한 잔 타서 느긋하게 거실에 앉아 TV 리모컨을 들었을 것이다. 토요일 아침, 적당히 시시하고 적당히 가벼운 프로그램들 사이 홈쇼핑 채널 하나가 엄마 눈을 붙들었을 테고 무슨 가죽에, 무슨 특가에, 무슨 할부로 이어지는 쇼호스트의 설득이 솔깃하게 들릴 무렵, ARS에 전화를 거는 대신 딸에게 전화를 건 것일 테다.
모바일 결제를 못하는 엄마를 위해 구매대행을 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으므로 평소 같으면 엄마와 같은 화면을 보며 구매결정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몇 마디 건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생활의 리듬에 불쑥 끼어들어 관심과 반응을 요구하는 사람은 일곱 살배기 하나로 족했다. 인터넷 쇼핑이 불가피한 물건들의 목록을 받아 내 일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시간에 결제를 하는 일은 자식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홈쇼핑을 보다가 궁금한 게 생겼다고 불쑥 전화할 수 있는 상대는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 우리 집 TV엔 홈쇼핑이 안 나와. 화면을 보려면 인터넷으로 들어가야 하는 데 지금 나 애 밥 먹여서 발레 데려가야 하거든. 그리고 홈쇼핑은 엄마가 직접 살 수 있어.”
딸과 같은 화면을 보면서 색상도 고르고 사이즈도 의논하며 원격으로나마 쇼핑을 하고 싶었을 엄마는 “세상에 홈쇼핑이 안 나오는 TV도 있구나.”라며 전화를 끊었다. 언짢은 심기가 목소리에 그대로 실려 있었다.
‘엄마는 홈쇼핑으로 뭘 사면 절반은 반품이잖아. 그 뒤치다꺼리까지 하지 않으려면 혼자서 결정하도록 두는 게 낫지. 이참에 선 긋길 잘 한 거야.’
애써 긍정해보려 해도 한동안은 마음이 묵직했다. 정말 잘 한 걸까? 나이 든 엄마와 같이 쇼핑을 다녀주진 못할망정 홈쇼핑 찾아보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그걸 매몰차게 거절하고 마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엄마와 딸은 친구가 되어간다는데, 나는 왜 나이가 들수록 엄마를 밀어내고 싶은 걸까?
한땐 나도 ‘친구 같은 딸’이었다. 40년 시집살이로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엄마가 불쌍해 좋은 곳에 다녀오면 엄마를 데리고 다시 갔고, 좋은 물건이 생기면 엄마부터 챙겼다. 엄마가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 엄마가 바라는 대로 살려 애썼다. 엄마는 한평생 내게 신앙을 요구했고 그건 원한다고 애쓴다고 생기는 게 아닌데도 생긴 척, 있는 척 위장을 해 엄마를 안심시켰다.
그러니 홈쇼핑 봐 달라는 사소한 부탁에도 냉기를 풀풀 풍기는 지금의 내 모습에 누구보다 황망할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효녀 모드를 유지할 여력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기능 삭제를 선택한 나 또한 매정한 딸이 되었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엄마는 아직 내 변화를 심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짜증 정도로 해석하는 듯하다. 그래서 잠시 서운했다가 또 예전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삶에 개입하고 자신에게도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어쩌면 엄마의 해석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 딸이 좀 커서 나를 독차지하려 들지 않을 때쯤이면 그래서 내 삶에서 여력과 여유라는 것이 발견될 때쯤이면 내 효녀모드에 다시 초록불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길 원해? 엄마가 아니라 너, 너도 그걸 원해?
마흔 줄에 들어섰고 풍문으로만 듣던 ‘중년의 지진’이 내게도 찾아왔다. 사람마다 진앙이 다르다던데 내 지진계의 바늘은 엄마 쪽을 가리키고 있다. 아직은 심사가 가끔 어수선해질 정도로 가벼운 진동으로 끝나지만 그대로 뒀다간 내 인생의 자전축을 뒤흔들어버릴 파동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앙을 파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가 제일 잘 하는 두 가지, 읽기와 쓰기를 삽과 괭이 삼아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맺어 온 그 절대적 관계의 근본을 꾸준하고 깊게 파 들어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