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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erun Jul 24. 2022

국민학생을 울린 애국가

티브이 시청 시간이 모두 끝나면 가장 마지막에 송출되던 프로그램이 뭔지 기억하나요? 요즘이야 24시간 방영되는 케이블 채널이나 유튜브로 시간 제약 없이 영상을 보지만 그 이전 세대만 해도 수동적으로 티브이를 시청했죠. 잠이 들지 않는 밤에 티브이 앞에 앉아 리모컨을 만지작대다 보면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싶을 때가 있었죠. 바로 애국가가 나올 때예요. 시간 내로 준비된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면 늘 등장하는 마지막 순서. 그리고 그 애국가마저 다 보고 정말 끝의 끝에 다다랐을 때, 가끔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나요. 애국가를 보다가 왜?


마라톤 선수가 죽을힘을 다해 뛰는 장면이 나오면  그렇게 눈물이 나고   없는 감정에 마음이 일렁였는지 몰라요. 심지어 감정이 벅차올라 티브이를 꺼버리기도 했죠.  당시만 해도 (대략 20~30 전쯤의 무렵이네요.  시간이 엄청나게 흘렀네요) 마라톤은 그렇게 주목받는 종목도 아니었고, 일반인이 조깅한다는 개념이 일반적이지 않던 때였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어린 마음에 스스로 마라톤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자신에게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어요. 어린애 취향이 너무 고루해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같아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죠. 혼자만 몰래 가슴속에 품고 살던 감동 포인트 중에 하나랄까요.


시간은 흘러 흘러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니 체력도 떨어지고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죠. 그리고 그중 하나가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달리기였어요. 한두 번 조금씩 거리도 늘리고 속도도 내가며 뛰다 보니까 달리기 만의 묘미가 있더군요. 아주 재미가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섣부르게 욕심을 부리다가 발목을 다친 후론 1년 가까이 뛰지 못하고 있어요. 뛰어 보려고 하면 그때의 그 작은 부상이 그야말로 발목을 잡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더군요. 아쉬운 마음에 유튜브에서 달리기 관련된 영상을 보며 대리 만족하고 있어요. 죽을상을 쓰며 코스를 마친 러너들의 얼굴빛이 참 맑고 밝더군요. 그러다가 문득 어렸던 나는 마라톤을 보며 왜 그리 마음이 움직였는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데드 포인트’ 나를 눈물짓게 하는 건 바로 데드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자신의 한계를 넘어보는 그 잔인한 도전. 그리고 그 도전을 스스로 극복해 내는 인간승리에서 무한한 감동을 했던 것 같아요. 그것도 본인이 겪어나갈 고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기꺼이 그 도전 속으로 뛰어들어 기어코 그 시간을 인내하고 마는 정신력이 얼마나 멋있는 것인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 감동이 본능적으로 마음에 와닿았던 거죠. 그러면 왜 굳이 힘들게 달리는 걸까요? 레이스에 올라선 후 되돌려 받는 가장 큰 대가는 출발점에 서 있던 자신을 한 단계 극복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자기 극복 후에 찾아오는 성취감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도 어디서 얻어올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 달려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자신의 두 발을 굴려 첫발을 내디뎌야 하더군요.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가 알잖아요. 달리다 보면 혹은 달리고 나면 찾아오는 그 감탄. ‘아 한 단계 성장했구나.’ 그리곤 ‘내가 제자리에 서 있지 않고 달리고 있구나. 용기를 냈구나.’ 하고 마음껏 자축해 주는 겁니다.


흔히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죠. 너무 자주 들어오다 보니 도리어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그 말이 요즘처럼 선명할 때가 없네요. 삶이라는 지리멸렬한 마라톤도 결국엔 언젠가 결승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수많은 크고 작은 데드 포인트가 있겠죠. 예고 없이 그냥 들이닥치곤 하는 낯선 상황들은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더군요. 적응할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해요. 마치 달리다가 데드 포인트에 다다랐을 때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듯이요. 하지만 멈추지 않고 내게 맞는 속도를 다시 찾아가며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가는 선수는 결국 결승점에 도착하고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마치죠. 신기록 달성하기는 엘리트 마라톤 선수들의 몫으로 두고요. 우리는 일단 결승점까지 무작정 가보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웬만하면 또 고비를 넘기고 계속 달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고도 감탄할 부분이에요. 그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보자는 마음으로 생사를 오가며 계속 달리는 거예요. 달리다 보면 분명 격려도 받을 것이고, 물 한잔 건네받는 고마운 상황도 또 생길 겁니다. 레이스 중 내리막길이 있다면 오르막길이 있듯이, 삶에도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니까요.


아. 맘껏 달리고 맘껏 축하해 주고 싶네요! 오늘도 용기 내고 잘 달리고 잘 성장하고 있다고요. 나 자신을 그리고 어디선가 데드 포인트를 넘어서고 있는 수많은 마라토너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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