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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erun Apr 06. 2022

핸드폰 속 꽃놀이는 기록일까 추억일까

찰나의 여운

'또 찍어요?' 어린 조카와 볕 좋은 봄날 꽃구경을 간 날이었어요. 투덜 대는 한마디에 좀 뻘쭘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다시 핸드폰 카메라를 열었죠. 그렇게 그날의 꽃놀이는 수십 장의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가끔 사진을 열어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다며 그날을 떠올려 보곤 해요. 산책 경로는 어땠는지 점심으론 뭘 먹었는지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해요. 역시 사진이라도 있으니 기억도 나고 좋다 싶어 뿌듯해져요.


그런데 오랜만에 그날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귓가에 '또 찍어요?'란 소리만 생생히 들립니다. 화창했던 그 봄날의 꽃향기가 어땠는지, 온도는 따뜻했는지, 바람은 불었는지, 혹은 새소리는 들렸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오래 지난 일이라 당연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예전의 어느 날 공원 분수 광장에서 보낸 시간은 다르게 기억이 남아있어요. 분수 물줄기가 사방에서 날아드니 사진 찍기는 일찌감치 포기했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시원한 물세례에 어린 조카는 연신 두 발을 동동 구르며 파닥거렸어요. 우선 신이 나 꺅꺅하고 지르던 비명소리가 기억나네요. 몸이 식어 덜덜 떨며 햇볕을 찾아 뛰어갈 때, 손안에 꼭 맞게 들어오던 아이의 주먹 쥔 작은 손. 그 온기도 기억이 나고요. 물폭탄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는 와중에 '고모 시계는 괜찮겠어?'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해 주던 어른스러운 얼굴 표정도 생각나고요. 신났던 그날의 물놀이는 달랑 사진 한 장으로 남았지만, 경험했던 대부분의 감각들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네요.


물놀이가 꽃놀이보다 즐거워서 기억에 더 남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불꽃놀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사진으로 남기려고 열중했던-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보던- 불꽃놀이보다, 어느 날 길 지나가다 우연히 멈춰 서서 보게 된 불꽃놀이가 더 선명히 기억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는 거 같아요. 전자의 경험은 핸드폰을 든 손부터 기억이 나네요. 아마도 모든 순간을 하나도 놓치기 싫어 사진 찍는 것에 너무 열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진으로 남기면 종종 열어 다시 보는 재미가 있잖아요. 잊히지 않고 기록되니까요. 그런데 어떤 순간들은 그냥 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할 때 더 선명히 기억되는 거 같아요. 듣고 보고 냄새도 맞고, 몸으로 기억하는 거죠. 물놀이 날의 차가웠던 물방울, 불꽃놀이의 거대한 굉음, 꽃나무 사이로 들리던 새소리 같은 것들은 찰나의 것들입니다. 때로는 수백 장의 사진으로 추억하는 기록보다,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 순간의 경험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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