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이 참 좋다. 그리고 때론 참 싫기도 했다.
시골에 태어나 산다는 것은 ‘걷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골 마을에서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니고(사실 ‘국민’ 학교로 입학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쳤다.
집에서 유치원, 초등학교까지는 걸어서 20여분을 가야 했다. 아직 도로가 포장되기 이전, 그야말로 흙밭이었다.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트럭이 옆을 지나칠 때마다 흩날리는 흙먼지가 눈앞에 가득했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그랬던 그 길은 어느 날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할머니는 그렇게 불렀다) 포장이 됐다. 육중한 롤러가 뜨거운 여름 바닥을 밀어냈고, 이글거리는 바닥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뭔가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예전에는 걸으며 할 것들이 참 많았다. 길가 옆으로 무성하게 난 풀 사이에는 봄이면 계란꽃이 피었고, 반대쪽엔 가시 돋친 이름 모를 식물이 가득했다. 게 중엔 뱀딸기도 있었고, 비가 온 다음날이면 개구리며, 지렁이까지 온갖 자연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아스팔트가 집 앞부터 학교까지 쭈욱 깔린 뒤로는 도로 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느 날 말라비틀어진 지렁이와 내장까지 터져버린 실뱀을 보는 것이 유일한 목격담이었을까.
걷는 것을 좋아했어서일까. 시골 마을을 벗어나 서울에서 살았던 10여 년 넘게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수유리 골목길을 좋아해, 수유시장을 지나 원룸촌, 주택촌 이곳저곳을 누볐다. 에스엔에스가 이제 막 발달하기 시작했던 시점이라, 주택을 개조해 문을 연 카페를 찾는 즐거움은 또 다른 나의 취미가 되기도 했다.
기자로 일할 땐 일하기 위해 걸었다. 지하철을 오르내리고 강남 바닥을 이리저리 걸었다. 한두 정거장은 고개를 스마트폰에 처박고 연신 쏟아지는 메시지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었다. 사실 이때의 걷기는 생산활동을 위한 걷기였기에, 어릴 적 지나는 풀을 손가락 사이로 훑어내렸던 그때의 낭만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지방소도시에 살다 보니 걷기와는 오히려 멀어져 버렸다. 당연하게 지하철을 찾고, 버스를 찾던 발걸음은 내 자동차로 대신하게 됐다. 지하철 노선과 102번, 151번 버스가 언제 오는지 찾던 내 스마트폰은 이제 T맵으로 대체되었다. 그저 한 달에 한번 서울나들이를 할 때면 모를까.
그래서일까. 걷기가 참 그립다. 다리가 아프다며, 학교까지 그 짧은 거리를 차로 태워달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따스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면 걸었던 그 하굣길만이 남았다.
액셀을 힘껏 밟고,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부러웠던 나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걷기를 부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