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한국에 오기까지 2주가 남았다.
-뭐 해?
-침대에 누워 있어.
-나도야. 방금 누웠어. 거기는 지금 몇 시야? 한국은 이제 새벽 한 시가 되어가니 8시간을 빼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물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오후 4시 반 정도야. 그는 친절히 대답한다. 오늘 너무 피곤했어. 세 시간 자고 운전해서 Groningen(네덜란드의 북쪽 지역)에 갔어. 공연 리허설을 하고, 또 운전해서 이제 막 집으로 온 거지.
-피곤하겠어. 꼭 아기 같아…
-응.
-뭐?
-응. 난 지금 아기 같아. 정말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어서 내게 말한다. 내 친구들이 나에게 화를 냈어.
-왜? 난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유일한 사람을 떠올리며 경계하듯 묻는다. 다행히도 그 사람 때문은 아니었다.
-그야 내가 널 보러 서울에 가니까. 알렉스, 엘크, 레이치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해.
-응. 나도야… 나도 정말 그들이 보고 싶네.
-그보다 난 너와 스미다에 다시 가고 싶은 걸.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우리가 함께 있었던 곳과 먹었던 음식들, 보았던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내고 있다. 아사쿠사, 카페, 시모키타자와, 세컨드 스트리트... 피곤한 기색으로 그의 끝없는 나열을 듣기 시작했으나 또 금방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어느새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어. 나 정말 울 것 같거든.
짓궂은 그는 얘기를 계속한다.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스미다로 가는 게 어때? 교토도 가고. 아이바카레집이 그리워. 레몬 맥주와 파미치키도.
-그래. 난 울기 시작했어. 몇 가지 단어를 쏟아냈다고 눈물을 흘린다니. 바보 같긴 하지만 그의 앞에서 아이 같아지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그런데 ‘난’ 갈 수 있어. 나는 ‘우리’ 대신 ‘나’를 강조해서 말한다.
-아냐, 넌 나와 함께 가야 해.
-정말이지, 난 갈 수 있어. 일본은 여기서 매우 가까우니까. 이번엔 내가 그를 놀릴 차례다. 나는 벌써 그를 닮은 짓궂은 말투를 장착했다.
-스미다가 정말이지 그리워.
-알아, 나도 그래. 그런데 넌 곧 서울에 오잖아. 말해봐. 이곳에 오면 뭘 하고 싶어?
-치맥. 그는 이번에 한국어로 단어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삼겹살, 닭갈비, 김밥, 광장시장, 한강, (사우나에서 먹는) 계란, 식혜, 카페, 바 … 그러더니 더 이상 한국어가 떠오르지 않는지 영어로 나열을 이어간다. 김치전과 맛있는 소스, 해물찜, 스시는 안돼. 그건 일본에서…
-응. 그런데 음식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아냐. 난 다이어트 중이라 이 정도만 말한 거라고.
평소에 내가 먹기 싫은 음식이 있으면 다이어트를 하고 있거든.이라고 버릇처럼 말한 걸 놀리듯이 말한다.
-아무튼… 편한 정적이 잠깐. 불현듯 이번엔 내가 먹고 싶은 게 떠오른다. 아무튼, 한국에 올 때 레이칩 좀 가져다줘.
레이칩(Lay's chips)은 감자칩 브랜드인데, 나는 오븐에 구워진 육각형 스트라이프 모양의 클래식맛을 좋아한다.
갑자기 그가 폭소하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뚫고 웃음소리가 나온다. 한참을 웃은 후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그래, 그게 먹고 싶었어?
-응. 무지 그리웠어. 빨간 레이칩 한 봉지를 사다 줘. 나의 정확하지만 무척이나 사소한 요구에 그는 재밌다는 듯이 다시 웃기 시작한다.
-내추럴 맛?
-응.
-토니 초콜릿은?
-괜찮아. 그건… 난 다이어트 중이거든.
이후 나는 몇 가지 더 요구한다.
맛있는 티도 가져다줘. 민트나 그린티가 아닌 걸로. 그리고 드롭(네덜란드의 감초맛 캔디)도. 마지막으로 너희 부모님도 모셔 오는 게 어때?
그와 통화를 하기 전,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다정한 메시지를 읽었던 것이 생각났다. 영어를 쓰지 못하는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대신 부탁했는지 메시지 끝에는 두 이름 모두가 적혀 있었다. 이부. 피에르. 나는 마치 오래전 시대의 편지를 받은 소녀처럼 기뻤다. 내가 메시지를 읽은 것도 그녀가 내게 보낸 지 3일이 지나서였으니 단순한 문자 메시지가 아니라 편지라고 해도 맞았다.
-이제 배고프기 시작했어. 그가 말한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뭘 좀 먹는 게 어때?
-그래야겠어. 난 레이칩을 먹을 거야… 그는 특유의 진지한 얼굴로 뻔뻔하게 장난을 친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다. 조금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 끝에 나는 졸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자러 갈래. 남은 하루 푹 쉬어.
다정한 끝인사. 사랑고백, 핸드폰 너머 입맞춤을 끝으로 통화가 종료된다. 그가 한국에 오기까지 2주가 남았다. 생각하며 스르르 졸음에 묻힌다. 완전히 잠에 들기 전, 방금 전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한국에 가면 담요를 좀 사야겠어. 넌 잘 때 내 이불을 매번 빼앗아가니까…
지난겨울 일본에서 우리가 함께 지낼 때가 꿈처럼 떠오른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는 아파트의 희고 두꺼운 호텔식 겨울 이불과도 같다.
-괜찮아. 서울에 올 땐 봄인데 뭐. 넌 담요를 사지 않아도 돼. 그리고 이번엔 내가 빼앗지 않을게...
-아냐, 그래도 사는 게 좋겠어.
단어의 나열. 우리만이 알 수 있는 대화. 웃음과 긴밀한 상호작용… 그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 오늘 하루가 나설 차례다. 그녀는 벌써 요약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내일의 하루 또한 미리 펼쳐 보이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너무 열심히 읽었어. 내일은 하루키의 책을 찾아봐야지. 아, 그에게도 한국에 올 때 책을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아냐. 나는 말을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결론을 짓는다. 어차피 그는 당연히 하루키의 책을 가져올 거니까.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고, 독서를 하고 나서 어제의 메모를 정리해야지. 그런 다음 출근 전까지 글을 좀 써야겠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분간이라고는 없는 행복한 회로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굴러가다가 잠에 들었을 때가 되면 생각의 볼륨은 완전히 줄어든다. 마치 지지직거리는 라디오를 엄마가 꺼줄 때처럼 느리고 다정한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