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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imoriho May 05. 2023

과거로 던진 고리

#5 너는 과거에 살고 미래에 살고 있어서.











너는 과거에 살고 미래에 살고 있어서, 지드가 말한다. 그렇지만 모든 충동이 그곳에서 발원하는걸요. 나는 B에게 빌린 하얀 캡모자 아래에 숨은 채 대답한다. 피크닉 매트 끄트머리에서 아이처럼 누워있는 B. 그녀의 옆에는 경사진 돌길에 간신히 앉아 작은 등을 내보이고 있는 M이 있다. 우리 셋은 늘 함께 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있어요. 본 것 그대로, 그에게 전한다.


​​​


어릴 적, 싸구려 게임기의 아래쪽 버튼 두 개를 눌러 형형색색의 작은 고리들을 물 밑바닥에 고정된 고깔 모양에 차곡히 쌓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특이하게도 영혼을 가진 듯이 물속을 헤엄치는 고리를 보며 마음의 반 이상을 걸린다의 반대쪽에 걸었다. 남들은 자신의 고리를 몇 번이고 쉽게 고깔 모형에 걸고서 싫증에 도달하기까지 했으나 나에게는 고리를 거는 것이 여간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게임 자체보다도 차곡차곡 쌓는 것이. 분명, 태도가 문제였다. 운 좋게도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낼 수야 있었지만.


​​

- 자, 여기 있어.


- 이렇게 빨리? 나의 고리를 대신 쌓아준 친구에게 게임기를 건네받은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네모나고 작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네. 고마워. 말과는 다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조심스럽게 손의 힘을 조절하며 버튼을 눌러본다. 더 이상 쌓일 공간도 없는걸 보았음에도 바닥에 있는 마지막 고리를 억지로 올리려고. 푸슉- 버튼을 누르자 힘없는 소리와 함께 고깔에 걸려있던 그 많은 고리들이 사방으로 빠져나간다. 심술이 난 나는 버튼을 마구 누른다. 고리들이 전부 빠져나가자 한순간이네. 마음 아픈 확인사살을 마치고 손길 하나만으로 어지럽혀진 나의 직사각형 모양 작은 바다를 바라본다. 파동 하나 일지 않고 느릿느릿 가라앉는 고리들을 보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허무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고집스레 내뱉었다. 별거 아니잖아. 명백한 실패를 허세의 말로 끝맺음하는 아이. 그러고는 집으로 달려가 되찾을 수 없는 곳 어딘가에 그 작은 바다를 던져 놓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고리도, 나의 과거도.


​​


이제는 상황이 다른 걸 너도 알지. 그리고 그건 단순한 게임이었어.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한다. 과거는 과거야,라고. 정말로 그럴까.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일에 불과할까. 오후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태양빛 아래 나는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자꾸만 길을 잃었다. 붉게 타버린 피부 위로 하얀 껍질이 일어나 몸이 따끔거렸다. 무엇보다도 시공간을 넘나들며 내게 속삭이는 그의 영혼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했는데도 이제는 발밑에 놓인 바다가 쓰일 일없는 베드 스카프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닿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스스로를 타일렀다. 괜찮아. 나는 여전히 여기 해변의 모래사장 위에 누워 작은 성의 보호 아래에 있어.


​​​



숨을 고르고, 평온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의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다. 머리로 배운 것을 잊어버리라던 그의 말이 그어놓은 푸른 밑줄 위에서 까맣게 빛난다.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똑같은 푸른 밑줄이 계속된다. 수없이 그은 밑줄이 도대체 몇 개야? 그의 말을 의심한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퍼뜩 정신이 든다. 그러자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 시작한다. 앞으로 굴러가지 않던 생각들도 미끄러지듯 결론에 도달할 것만 같이. 바다도, 태양도 그 어느 것도 나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고. 붙들고 있던 그의 문장도 목소리도.

​​



또 다른 강력한 영혼에 이끌린 것처럼 책을 덮으며 그의 단어들을 부순다. 과거는 잊을 수 없어요. 까맣게 빛나던 글자들이 책 속에서 으스러진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우리의 대화가 이제 종료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떠보니,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 바다와 태양, 까작거리는 돌들을 밟고서 지나치는 사람들, 바닷물에 젖은 아이들의 스타카토가. 그리고 M이 이 모든 일을 다 아는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나를 돌아보았다.


​​


- 물에 들어가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소리와 단어를 포착할 준비를 마친다. 지난 시간들을 되찾을 것. 셔츠를 벗고 맨발로 모난 돌을 밟는다. 여전히 발바닥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첫날과 같이 다시 기쁜 마음으로 바다로 뛰어드는 그때, 과거를 겨냥한 고리는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은-

나는 모든 과거를 추적하기로 나선다. 그리고 저 먼 기억 속을 향해 힘껏 고리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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