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등빨 좋은 어느 심신미약자의 일기
내가 지금 도서관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집을 박차고 나가 말할 수 없이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파워워킹하는 로망은 순식간에 무너졌다가 다시 살아났다. 상상속의 나는 대차게 글을 쓰는 여성이었다가 말았다가 했다. 그렇다. 오늘 아침도 갈팡질팡. 같은 경로를 의미없이 왕복하는 진자처럼 흔들흔들흔들 거렸다.
우울증은 선진국형 병이라고 한다(통계를 보면 그렇다). 왜 그런가 하면, 잘 사는 나라 사람들에게는 ‘우울할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후진국의(특히 육체)노동자에게 삶은 실로 고된 것이라서 ‘이것은 과연 이런가, 저런가’ 할 틈조차 잘 주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해 뜨면 일터로 나가고 해가 지면 잠에 빠져드는 일상이란 오히려 고귀하지 않은가. 심신미약자인 나 같은 사람(출산 후 소위 ‘등빨’이 좋아진 탓에 시아버지께선 나를 무조건 ‘건강한 며느리’라 여기셨다. 그건 진심 나의 내장 컨디션 내지는 정신 상태와는 전혀 별개의 진단으로써, 명백한 오진이다. 몇 번 억울함을 호소해 보기도 했지만 육중한 바디로 아무리 병약함을 어필해 보아야 별 소용이 없었다)은 도무지 이뤄낼 수 없는 삶의 방식, 궁극의 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이란 나라에서 후진국처럼 사는 내가 갈팡질팡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집에서 차로 7분 거리인 도서관에 당도하기까지 ‘갈지자之’를 수없이 그렸다. 갈지자를 그린다는 것은 곧 비틀거린다는 뜻이다. 나는 왜 비틀거리는가. 심지가 굵지 못해서 인가, 신앙심이 약해서인가,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비틀거리는 존재인가.
이 와중에도 ‘갈팡질팡’의 발음이 귀여워 웃음이 난다. 심각해지다가도 웃는 갈팡질팡, 그게 문제다.
배 고픈데? (거울을 봐라, 굶는 게 좋겠어)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 되잖아? (시간이 애매해) 나 일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집안일이나 해)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고 싶어. 구인광고를 봐야겠어. 아마존 ‘냉동’창고 관리? (한랭두드러기 환자가 냉동창고에서 일하는 것 같은 코미디가 어딨냐?) 전공을 살려 유치원에 취직할까? (니 자식들한테 소리나 지르지 마) 나가야 되는데? (아… 세수하기 귀찮아) 공부를 해볼까? (공부 아직 단념 안했냐) 오늘 뭐하지? 글을 써야 돼. (글이 밥 안 먹여 주더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는 없어. 책을 더 읽어야지.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만 너무 하다가 피골이 상접해 질것 같아, 철학가 중에 근육질 봤냐) 그럼 나가서 운동을 할까? (바람 쏘이면 두드러기 나) 그럼 저번에 듣던 철학 수업을 마저 듣자.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건 위험하다니까!) 아냐, 아냐, 결국 생각하는 사람만이 승리하게 돼 있어. (웃기지마!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그럼 운동할까? (목이 뻐근해) 나가자. (머리는 감지 않을 거야) 머리가 떡졌는데? (아무도 날 보지 않는다) 정수리에는 기름이 생기는데 왜 머리털은 뻣뻣해져만 가는 걸까. (외모에 너무 신경 쓰고 살지 마) 아! 그럼 헤어트리트먼트 사러 갈까? (머릿결도 결국 뭘 먹고 사느냐에 좌우된댔어) 그래서 뭘 할 거냐 멍청아! 나가자. 어딜 갈까? 커피숍? (글 쓰기엔 좀 시끄럽고 아무래도 사람들이 의식돼) 이 병약한 인간아 아무래도 일을 시작하자. (구인광고를 다시 봐!) 미국 사람들과 일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 (영어실력이 영 쪼달린다) 영어공부를 하자! (생존영어면 충분해. 네이티브처럼 영어 하기? 이 생에는 글렀어) 사람은 도전하며 살아야 하지 않나? (그냥 조용히 집안을 돌보며 사는 것도 행복이야) 집에도 도전거리는 널렸지. (그치만 지겹잖아?) 맞아, 너무 지겨워. 어우 지겨워. 뭐 재미난 거 없나? 나가자.
그래, 맞다. 나는 정녕 할일을 못 찾아 갈팡질팡거리는 것이다. 일이 없나? 일거리는 집에도 쌓였고 밖에도 그렇다. (그러나 왜 일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부터 정립해야…)몰라, 몰라, 몰라! 일단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도서관으로 가자!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도서관.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 로스, <에브리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