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은 고독이요. 못하는 것은 외로움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나는 외롭고 동시에 잘 버티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잘 탄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막상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외로움은 슬픈 감정으로 드러난다. 우울. 불안. 공허. 무기력. 그중 우울은 내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감정이다. 감정은 순간이지만 우울만큼은 영원할 듯 깊다. 우울이 시작되면 마음에 달린 수많은 창들이 차곡차곡 닫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주 굳게 닫힌 날에는 명상을 한다. 인도의 차크라(chakra, 사람의 몸에 에너지가 모이는 부위) 명상을 할 때도 있다. 이론에 따라 다르지만 차크라는 보통 일곱 개로 구분되고, 그중 네 번째 차크라인 '아나하타 차크라'는 심장 언저리에 위치하며 사랑을 상징한다. 명상 중 손은 주로 무릎 위에 얹어 두지만, 그런 날에는 심장 위에 포개어 놓는다.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체온만큼 따듯한 초록빛을 떠올린다. 우주의 초월적인 사랑이 느껴지진 않지만, 심장박동은 나에게 최소한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사랑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명상 후에도 (고독이 아닌) 외로움이 쉬이 사라지지 않을 땐, 뻔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시작한다. 사람은 원래 외로운 존재인 것일까. 그래서 사회적인 동물인 건가. 아니면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외로운 것일까. 나와 사람에 대한 얕은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뒤적이다가 이 물건 속에는 답이 없을 게 분명하여 내려놓는다.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 손을 뻗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면서도 내심 무언가를 바라서 사랑을 물질화하기 시작한다. 풍요는 내 안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럴 때만큼은 속물적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애착 인형이나 연인의 꽃다발처럼 품에 안기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적절한 타이밍에 손에 쥐어지길.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미친 듯이 외로우면 사람은 그냥 미쳐 버리는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진득한 감정에 사로잡혀 버둥거리다가, 문득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 사랑을 갈구하는 게 조금 부끄러워지면 바로 어떤 일이든 시작한다. 쓰레기통 비우기. 종이에 낙서하기. 빨래하기 등 생산적이고 비생산적이 랄 것 없이 무엇이든 바로 실행한다. 우울로 굳어진 몸과 흘러버린 시간에 보상을 바라듯 움직인다. 약간의 탄력이 생기면 장을 보고, 산책을 한다. 이 정도 했다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러면 더 생산적인 일을 시작한다. (내 기준의 생산적인 일은 당장의 이익은 없지만 내 관심사와 직결되는 활동을 말한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고, 영상을 편집하고,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받아 적고,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스트레칭을 한다. 마침내 용기가 생기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해본다. 나도 몰랐던 새 커진 그리움을 담아 메시지를 보낸다. 별 거 아닌 답장에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온전히 사랑받기를
수익률 제로의 취미와 짧은 카톡 메시지에 불과하지만, 위의 단계는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시절에는 '살고자'하는 것이었고, 지금의 나에게는 '잘 살고자'하는 나름의 예방수칙(?)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가늘고 길게 외로웠던 것 같다. 청소년기에는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더 많이 사랑받을 줄 알았다. 그 시절 나에게 더 나은 사람이란, 남들보다 성적이 좋고 예쁘장하게 생긴 성공한 사람을 의미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되면 슬픈 감정들을 덜 느끼며 살 거라 믿었다. 어른들이나 또래에게 오해와 미움을 살 때면 '꼭 서울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야지', '예뻐지면 더 사랑받을 수 있겠지' 등의 오기로 버텼다. 불평등한 일을 당할 때마다 내가 부족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 믿었고, 매번 노력하고 지치기를 반복했다. 어린 나에게 사랑은 지독한 조건부였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어찌 보면 일종의 동기였던 셈이다. 어떻게 그 시간들을 버텼는지 대견하면서도 참 많이 속상하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마음이 고장 났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고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외로움과 그에 따른 우울은 나의 잘못이 아니며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지난날의 나에게 미안해서 수년간 울고 반성했다. 브레이크를 밟아도 관성은 존재한다. 여전히 종종 내 탓을 하고, 조건 없는 사랑들을 의심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사랑을 오롯하게 느끼고 싶다. 지금의 나에게 더 나은 사람이란,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울감에 굴하지 않을 용기와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이 되면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움이 고독에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렇게 다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