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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리 Dec 15. 2021

Isn't it good Norwegian Wood?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책을 고를 때 그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책의 이름이라던지 표지 디자인, 작가, 이미 책을 읽은 사람들의 리뷰나 평판, 주변 사람들의 추천 등.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그 모든 요소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뒤 진작 내 '읽어야 할 책 리스트'에 올라있었다. 도무지 안 읽을 이유가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 영어로는 'Norwegian Wood'. 얼마나 멋스러운 제목인가. 소설에서 레이코가 종종 연주하는 비틀즈의 'Norwegian Wood'가 귓가에 들리기도 하고, 한 때 유행했던 북유럽 인테리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두 고먐미 주인님을 모시는 집사인 나로서는 노르웨이 숲 고양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이 소설이 번역되어 팔렸을 때는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의역되었는데, 이는 더더욱 독자를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상실의 시대라니... 다소 중2병스러운 제목이긴 하지만, 모든 세대는 자신의 시대가 상실의 시대일 터이니, 책을 구입하기 전부터 이미 감정 이입이 시작되었으리라.   


무라카미 하루키는 또 어떤가? 그를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다. 그의 글 중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 없고, 덜 유명한 작품은 팬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각광받기도 한다. 그의 책에 반영된 깊은 음악적 취향 때문에 뮤지션들도 그를 종종 언급하곤 한다. 또, 책에 위스키 마시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 실제로 찾아가 소설 속의 위스키를 마시는 여행 패키지가 있을 정도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워낙 유명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과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편인데, 이 소설을 아직 안 읽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네가 이걸 안 읽을 수 있냐고, 자기 책을 빌려주겠다고 말하던 외국인 친구도 있었다.


이런 많은 이유들로 노르웨이의 숲은 몇 년 전 내 e-book에 다운로드된 바 있다. 영문판만 무료로 받을 수 있어서 영문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어떤 여자가 책 표지에 그려져 있는 버전이었다.

키치하면서 어딘가 무서운 노르웨이의 숲 표지

처음엔 이 여자가 나오코인가 싶었지만,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니 미도리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당돌한 눈빛과 선글라스(라고 믿고 싶은 두 보라색 동그라미), 앞머리를 내린 머리스타일이 와타나베가 묘사한 미도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왜 미도리인가? 책 전반에 걸쳐 와타나베를 관통하는 인물은 미도리가 아니라 나오코인데 말이다. 나오코나 와타나베가 아닌 미도리를 표지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는 것은(물론 내 추측이지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첫 표지를 넘기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어제서야 겨우 이 책을 다 읽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와는 맞지 않는, 별로인 소설이었다. (웅성웅성 불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책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나서야 다 읽었을 만큼 한 번에 쭉 내려가기 힘든 소설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책을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다 읽는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늦게 읽어도 한 달을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중 끝까지 읽는 데 가장 오래 걸린 소설이다. 그만큼 소설의 내용은 불편했고, 공감을 이끌지 못했으며, 흥미롭지 않았다. 이제부터 말할 내 독후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평이니, 혹시 화가 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란다.


어쩌면 나는 애초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 맞을지도 모른다. 그가 쓴 많은 책들 중 내가 읽은 건 겨우 '1Q84'정도에 불과하다. 1Q84 역시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래도 그 소설은 내용이 꽤 방대해서 노르웨이의 숲에 비하면 금방 읽은 셈이다. '해변의 카프카'도 읽으려고 빌린 적 있었으나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대로 하루키와 친해지려고 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는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이질감과 답답함이 있다. 내가 일본에서 살고 있지 않아서 소설 속 주인공들의 분위기와 말투에 공감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1Q84의 기괴한 분위기와 답답한 전개가 불편했고, 불필요한 성적 묘사와 설정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예를 들어, 신비한 17세 소녀 후카에리의 가슴에 대한 묘사, 그녀와 남자 주인공인 덴고가 ‘어쩔 수 없이' 갖는 성관계는 이야기 전개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었는지 의문이 들었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에게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여자 주인공 아오마메의 페티시는 그런 게 현실적으로 존재하기는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차치하더라도 소설의 흐름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부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1Q84가 아니라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므로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하겠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들 역시 성적인 부분들이다.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그토록 애틋하게 사랑하는 나오코를 두고 다른 여자와 원나잇을 다니지만 자신은 사실 그걸 즐기지 않는다며, 친구 나가사와와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마성의 남자(심지어 소설 막바지에야 겨우 스무 살이 되었다)이다. 다들 그와 함께 침대에 눕지 못해 안달이 났다. 먼저 말할 성관계 상대는 나오코다.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젖지 않아서 와타나베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큰 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나오코는 그에게 온 마음을 다해 정성껏 펠라치오를 해주는데, 그 과정에서 자살한 그들의 친구 기즈키와의 추억을 얘기한다. 나오코는 기즈키에게도 이렇게 자주 해줬다면서 와타나베에게 그때 그 순간을 얘기해준다. 아무리 셋이 친구였다지만 나로써는 당황스러운 부분이었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딱 한번 삽입 섹스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나오코의 첫 경험이었으며, 그때의 느낌을 나오코가 레이코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 소설 후반에 나온다. 첫 경험임에도 나오코는 오르가즘을 느끼는 걸로 표현되는데, 아직 성관계를 해보지 않은 친구들이 이 장면을 보고 헛된 기대를 품지 않길 바랐다. (첫 경험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나오코가 앞으로는 절대 섹스를 하지 않을 거라고 레이코에게 말하면서 'I don't want to be violated by any man again'라고 하는데, (한국 번역판에서는 뭐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violated를 '범해진다'정도로 표현했으려나?) 자신이 원해서 갖는 성관계를 violated로 표현하는 나오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와타나베의 또 다른 상대는 미도리이다.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함께 침대에 누웠는데, 미도리가 손을 뻗어 와타나베의 성기를 만지자 그가 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와타나베는 자신의 마음에 아직 나오코가 있고, 그녀와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도리와 섹스할 수 없다고 그녀를 거절한다. 그런 그에게 미도리는 펠라치오를 제안하고, 삽입은 안되지만 오럴은 괜찮다는 이상한 논리로 와타나베는 펠라치오를 승낙하고 사정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나오코를 향한 순정 때문에 삽입 섹스는 안되지만 오럴섹스는 괜찮나 보다. (클린턴이 따로 없다.) 이 와중에 미도리는 와타나베의 성기가 크고 예쁘다며 칭찬해주기까지 한다. 어쩌면 하루키가 상상한 가장 이상적인 남성 캐릭터가 와타나베일 수도 있다. 가만히 있어도 온갖 여자들이 달려들고, 그러면서 자신은 감성이 풍부하고 늘 진실되며, 마음 한편에 첫사랑을 못 잊는 순정을 가지고 있고,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있으며, 예쁘고 큰 페니스를 가졌고, 첫 경험을 하는 여자를 단숨에 절정으로 보내며, 다른 여자를 못 잊는다고 해도 자신을 떠나지 않는 또 다른 여자가 있는(심지어 두 여자 모두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진 것으로 표현된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마성의 소년이 바로 와타나베다. 와우.


독자들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느껴졌을 부분은 아무래도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섹스일 것이다. 나오코의 보호자이자 친구이면서도 와타나베와도 친분이 있는, 와타나베보다 15살이 더 많은 레이코는 나오코의 죽음 후 그와 도쿄에서 만난다. 레이코가 도쿄를 떠나기 전 날 밤 그 둘은 어쩐지 섹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하룻밤에 무려 4번이나 관계를 가진다. (하루키가 여기서 지나치게 이상적인 면모를 다시 한번 와타나베에게 집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4번이라니?) 또, 임신은 하기 싫으니 조심해달라고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며 질내 사정을 하고야 만다. 그러나 레이코는 이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Don't be silly!"라고 하면서 와타나베에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고는, 4번의 관계 모두 질내 사정을 허락한다(고 보인다). 참으로 답답한 장면이다. 이 소설을 읽는 많은 남자들이 혹여나 질내 사정을 거부하는 여자들도 사실 그것을 원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와 별개로, 와타나베와 레이코의 섹스 장면은 불편하긴 하지만 소설의 전개상 오히려 필요한 부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즈키-나오코-와타나베의 관계가 나오코-레이코-와타나베의 관계로 전이된 것처럼 느껴졌고, 와타나베에게 비로소 나오코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게 하는, 그가 성장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성관계 말고도 아쉬운 부분은 더 있는데, 주인공들의 성격이 매력적이지 않아 그들에게 정이 안 간다는 점이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굉장히 어른스럽다고 생각하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그를 어른스럽고 순수한, 보기 드문 청년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 그 누구보다 미숙하다. 나오코를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도리를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고, 나중에 미도리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마음을 혼자서 정하지 못한다. 나오코가 죽었을 때에는 레이코에게 답장하지 않고 회피하며, 미도리와의 연락도 미루면서 무작정 떠돌아다닌다. 그저 도망칠 뿐이다. 그러다가 자신이 필요할 때에야 비로소 미도리에게 전화해 만나자고 보채는 꼴이다. 나는 성장소설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데, 지금까지 읽었던 성장소설(또는 그런 형태의 소설) 중에서 가장 정이 안 가는 주인공이 바로 와타나베였다.


나오코는 청순가련하고 답답한 면모를 가진 여성이다. 그녀 역시 와타나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며, 와타나베에게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 못한다. 그녀는 와타나베를 사랑하긴 했을까? 끝내 알 수 없다. 와타나베는 그녀의 상태가 어떻든 그녀를 보고 싶어 했고 함께 있고 싶어 했지만 나오코는 자신의 상태가 다 나아야 와타나베를 만날 거라면서 자기 자신을 더욱 고립시켰고, 결국 상황은 악화되었다. 기즈키의 죽음 이후 와타나베를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중 어느 편이 그녀에게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도리는 막무가내이면서 당돌하고 톡톡 튀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자기가 만나고 싶을 때 와타나베를 만나고, 만나기 싫을 때는 보고 싶지 않다며 만나지 않는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퍼할 때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슬퍼한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바로 술을 마시러 간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남자 친구가 있는데도 와타나베와 아슬아슬하게 친하게 지내며 와타나베를 유혹한다. 어쩌면 미도리가 이 소설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스스로 대처할 줄 알고, 자신의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본 후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와타나베에게 고백할 만큼 미도리는 성숙한 인물이다. 와타나베에겐 과분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중 그나마 정이 가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잠깐씩 등장하는 나가사와와 하쓰미는 말할 것도 없다. 전형적인 엘리트 플레이보이 나가사와와 그를 너무 사랑해서 고통받는 지고지순한 하쓰미. 하쓰미가 결국 자살하는 것도, 하쓰미가 죽은 이후에야 뒤늦게 후회 비슷한 것을 하는 나가사와도 흔하고 뻔한 인물들이다.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독후감은 대충 여기서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쓰다 보니 책의 서평을 쓰거나 영화 평론을 쓰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글로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궁금한 점이 생겼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의 제목을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지은 이유는 뭘까? 소설 속에서 레이코가 기타로 비틀즈의 곡을 자주 연주하곤 했는데, 하루키가 비틀즈를 좋아해서 붙인 제목일까? 비틀즈의 노래 Norwegian Wood는 별로 로맨틱한 곡이 아니며, 자아성찰적인 노래도 아닌데 말이다.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려고 그 여자 집에 갔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홀로 아침에 일어나서 화가 나 그 집의 가구를 불태운다는 내용의 곡이 이 소설의 내용과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여기에 노르웨이의 숲을 신랄하게 비판해 놓았지만, 최악의 소설은 아니다. 또, 이렇게나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면 내가 놓친 작품성이 있을 것이다. 책을 읽은 다른 많은 사람들은 내 감상평에 반박할 수 있다. 그리고 물어보겠지. "Isn't it good, Norwegian Wood?"


"Death exists, not as the opposite but as a part of life."
By living our lives, we nurture death. True as this might be, it was only one of the truths we had to learn. What I learned from Naoko's death was this: no truth can cure the sadness we feel from losing a loved one. No truth, no sincerity, no strength, no kindness, can cure that sorrow. All we can do is see that sadness through to the end and learn something from it, but what we learn will be no help in facing the next sadness that comes to us without warning.



2021년 12월 15일 오후 5시 23분 회사 사무실 책상에서 씀.


추천 음악: Norwegian Wood, The Beatles

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She asked me to stay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So I looked around
And I noticed there wasn't a chair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Drinking her wine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It's time for bed"

She told me she worked
In the morning and started to laugh
I told her I didn't
And crawled off to sleep in the bath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gian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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