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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리 Jul 07. 2021

그래서 소년은 왔을까, 아니, 가버렸을까?

한강, '소년이 온다'를 읽고

책을 읽던 내 얼굴을 보고 친구는 말했다. 

"왜 그렇게 진지하게 읽고 있어? 슬퍼?"

나는 대답을 주저했다. 슬프다는 말은 어딘가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을 읽은 내 느낌을 잘 표현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프다, 고통스럽다, 처참하다...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을 읽는 게 너무 힘들었고 아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에는 '그 사건'(또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구태여 관련 자료를 수업시간에 본다던지, 기념관으로 현장체험학습을 떠난다던지, 관련 주제의 글쓰기나 그림 그리는 대회에 참가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정치, 계급, 성별 등 가능 한 모든 분야에서 끝없는 갈등이 이어지는 것을 겪으면서 '그 사건'을 공통된 대화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광주'라거나, '5.18'이라거나, '전두환', '민주화 운동' 등으로 표현되는 일들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MZ세대는 '그 일'을 꼭 기억해야 하는가? 잊히지 않도록 일러주며, 얘들아 여기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단다, 정말 아팠단다, 하고 보여주고 설명해줘야 하는가? 해줘야 한다면 누가 그렇게 해줄 것인가?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 할 때, 어떤 방법으로 해야 그것을 욕되지 않고 적절히 올바르게, 그러나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과장되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일부러 축소시키지도 않는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소년이 온다'를 읽는 내내 이 책을 그 답으로 제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혀 과장되지 않은 문체로 그저 흘러가는 날 중 일부였던 그 열흘과, 작가의 말마따나 마치 '방사능에 피폭'된 것 같이 그날들이 현재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 지를 이 책은 덤덤히 써 내려간다. 그 글의 덤덤함이 무딘 쇳덩이처럼 독자를 아프게 짓누르지만 인간이라면 꼭 느껴야 하는 어떤 경험을 분명하게 느끼게 해 준다. 6개의 각기 다른 - 그러나 이어진 - 이야기 중 한 개만 읽어도 좋다. 한 개를 읽으면 나머지도 전부 읽고 싶어 져서 그러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내게 가장 와닿았던 글은 마지막 6번째, '꽃 핀 쪽으로'였다.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하는 부분에서 나는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은 뒤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왜 그랬는지 읽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마주하기 두려워 막상 읽지 못했던 책을 이제 읽게 되어 기쁘다. 묵직한 기쁨이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빌려줘야겠다. 그래서 그들이 나와 비슷한 기쁨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함께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135)


2021년 7월 7일 오후 5시 28분 퇴근 전 사무실 책상 위에서 씀.


추천 음악: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 백예린


우리 사이에 큰 상처로 자라도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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