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할 일을 다했어..

by 수다쟁이


'카톡' 하고 알람이 울렸다.

친오빠 같은 외사촌 오빠의 카톡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나는 외사촌 오빠는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마음은 늘 친한 친구처럼 가까이 있어 언제라도 내 속내를 드러내어 말을 할 수 있고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은 아빠 같은 존재였다.


무슨 일일까? 하고 들여다본 카톡에는 딸의 청첩장이 올라와 있었다.

전화를 걸어

"오빠 축하해~~○○이가 벌써 시집을 가네.. 이뻐졌어.. 아주 야무지게 생겼구먼"


"그래! 아주 속이 후련하다.' 이제 할 일을 다한 거 같아~~"

자식을 키워 시집을 보내는 마음을 나는 아직 짐작할 수 없지만 자기 할 일을 다한 것 같은 오빠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내가 고3 수험생이던 어느 날 나는 방에서 ebs강의를 듣고 있었다.

밖에서 자그맣게 전화벨이 울렸고 엄마는 누군가의 전화를 심각하게 받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후 엄마는 나의 방으로 오더니

기석(사촌오빠)이가 암이란다.. 어쩌냐 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사춘기 시절부터 자식처럼 돌봐온 오빠는 나랑은 나이 차이는 있지만 오랫동안 같이 보낸 시간 속에 간직한 남다른 애정 때문인지 친오빠 같은 마음 때문에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그때 오빠의 나이는 30대 중반쯤.. 결혼하고 큰아이가 세 살 때쯤 됐을 때였다.


며칠 후 병문안을 다녀온 엄마는 오빠의 병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또 다른 걱정거리를 더했다.

새언니가 알고 보니 임신 초기였던 것이다.

오빠가 발병을 하고 얼마 있다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오빠 걱정에 이어 언니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니가 임신한 몸으로 오빠를 간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고,

잘은 모르겠지만 오빠와 언니를 걱정하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오빠의 병이 위중한 상태라 아이를 낳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병문안을 갔을 때 내가 본 언니의 표정은 단호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식을 끝까지 지키려는 엄마의 본능적인 의지가

얼굴에 그대로 읽혔고, 언니는 힘든 기색이었지만

씩씩해 보였다.


새언니는 배가 불러오는 와중에

오빠의 힘겨운 항암 투병과정을 옆에서 다 간호하고 지켜봤었다.

죽을뻔한 고비를 넘긴 오빠의 투병은 1년 넘게 이어졌고..

그사이에 언니는 출산과 양육을 같이 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축복받아야 할 시기에 남편의 힘든 투병과정을 지켜보며 자신과 남편과 아이를 지켜야 했던 언니의 몸과 마음은 어땠을까?

몸이 아픈 와중에 태어난 아이를 보며 오빠와 새언니가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 생각해보면

지금도 오빠의 소식을 들었던 그때처럼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기도 덕이었는지..

새언니의 극진한 병간호 덕이었는지..

오빠는 2년여에 걸친 긴 병마와 싸우고 아무렇지 않게 완쾌되었다.

그리고 오빠의 딸도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서

당찬 숙녀가 되어 있었다.




딸의 결혼식 날 오빠는 주례 자리에 서서 딸의 결혼을 축하했다. 서로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살라고.. 한 사람만 행복한 결혼은 행복이 아니라고

두 사람의 마음이 합쳐져 두 사람이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다.


보석 같은 딸을 예쁘게 키워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의 갈래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기쁨과 환희, 대견함과 뿌듯함,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오빠에게는 이제 나는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안도감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마음을 왠지 모르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보다도 일찍 돌아가셨던 아버지의 일기에서도

병중에 계셨던 엄마의 모습 속에서도

자식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가슴 깊이 사무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례를 마치고 단상을 걸어 내려오는 오빠의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발걸음에 맞추어 힘찬 박수를 쳐주었다.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