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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Dec 30. 2021

나, 그리고 나의 가족

첫째는 정말 괜찮은 아이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엄마인 나에게는 정말 고맙고 또 고마운 존재이다. 아기 때부터 순해서 수월하게 키운 편이고, 지금도 겨우 여섯살 아이인데 내둘째를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밥 먹으려 앉으면 쪼르르 달려와 나에게 치근덕대는 둘째를 떼어가서 함께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첫째에게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내가 임신을 못 한다고 양가에서 많은 걱정을 들을 때 그 시름에서 벗어나게 해준 첫째는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감사다.  


둘째는 애교덩어리이다. 하루에도 열 번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자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카봇도 흔쾌히 내게 다시 선물로 줄만큼 모든 걸 내게 내어준다. 그동안 부모님께도, 사귀었던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는데,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나를 이토록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은 이 아이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넘치게 사랑을 표현해준다. 발음이 새게 말하는 것도 너무 귀엽고, 걸어다니는 엉덩이도 귀엽고, 뭘 먹는 입도 귀엽고, 아직은 냄새도 너무 귀엽다.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남편도 좋은 사람이다. 모든 게 완벽한 걸 꿈꾸자면 부족한 면도 있지만, 넘치게 성실하고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좋은 남편이려고 늘 노력하고, 좋은 아빠임이 분명한 사람이다. 나비교해서도 남편은 여러모로 훌륭한 사람이다. 내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내 삶에 안정감을 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아이 둘이 주는 행복이 정말 크고, 안정된 삶 속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이 주는 사랑이 내 안에 차고 넘치는 것이 아니라, 내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서 나의 무언가가 철철 새어나가는 느낌이 든다. 그 이야기를 지인 언니에게 했더니, 그게 '내가 없어지고 있어서' 라고 말했다.


내 삶에 내 가족만 남아있고, ''가 없어지고 있어서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멍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런걸까?





모든 면에서 무던한 첫째가 거의 유일하게 싫어하는 일이 얼굴에 로션을 바르는 이다. 여름엔 괜찮은데 겨울에 로션을 바르지 않으면 볼이 튼다. 그래서 밤중에 몰래 로션을 발라주는데, 로션을 듬뿍 발라주는 다음날은 볼이 뽀송한데, 내가 밤중에 일어나는 일이 힘들어 빼먹으면 다음날 아이의 볼은 하얗게 각질이 일어나려고 한다.


둘째는 첫째에 비해 그 아이에 대한 몰입의 시간이 무척 적었다. 시험관으로 힘들게 얻은 첫째는 2 이상 정말 최선을 다해 몰입해서 키웠는데, 둘째는 그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첫째 아기시절 얼굴은 기억나지만, 둘째 아기시절은 뭔가 기억에서 뚝 잘려나간 듯한 느낌이다. 그걸 둘째도 아는지, 그 아이는 나에 대한 집착이 첫째에 비해 엄청 강하다. 놀다가도 갑자기 내게 달려와 내 등에 업히고 내 머리에 얼굴을 묻고 나의 냄새를 맡고 간다. 나는 무슨 일을 하다가도 그 아이에게 내 몸을 내주어야 한다. 때론 그것이 귀찮게 느껴지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저 아이가 다 받아내려고 그러는가보다' 하는 것이다. 둘째는 엄마에게 사랑을 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걸 다 받아내겠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공것이 없는데, 아이를 키우는 일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밤중에 첫째에게 로션을 발라주는만큼 아이의 볼은 뽀송해지고, 아기일 때 다 못받은 사랑을 지금이라도 받아내겠다고 내게 자주 치근덕대고 많은 요구를 하는 둘째를 보며, 내가 준만큼 아이는 풍성하게 잘 자랄 것만 같다. 그걸 알기에 나는 아이들 곁을 떠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점점 사라져가는 듯한 나를 느끼며,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 듯한 그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엄마와 나,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이, 초보엄마인 내게는 너무 어렵다.


마침 읽고 있는 오소희 작가님의 글에서도 그런 문구를 봤다.


그렇다고 내 일, 사회적 자아을 찾아가자니 아이들이 너무 눈에 걸린다. 해맑은 그 웃음들이, 마치 내가 나를 찾으러 가는 순간, 희미해질 것 같은 불안감과 함께 미리 죄책감까지 느껴진다.


더불어 자신감도 떨어졌다. 8년 쯤 일을 쉬게되니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 역시 큰 것이다.


한때는 남편이 출근하는 모습만 봐도 부러웠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내 새끼들을 맡겨놓고, 아이들로 부산스러운 그 집을 나서는 순간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오랫동안 출근하는 남편에 대해 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남편이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역시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가 살고 있는 그 세계도 그리 호락호락한 세계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아이나' 키우며 집안에 있는 내가 참 안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며.. '내가 자신이 어졌구나'싶기도 했다.



엄마가 되면 여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회적인 나와 엄마인 나 사이에서의 선택. 양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사회적인 나를 유지하기가 조금더 수월할지 모르겠으나, 나처럼 양가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여자들은 '엄마'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남자들은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 부러워하는 시기는 지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자들은 보다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도 큰 감흥이  않는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는 되겠지. 지금처럼 계속 엄마로 살면서 마음이 허전하든지, 워킹맘으로 살면서 불안감과 죄책감을 느끼든지.


엄마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아직까지는 그 두 가지 외의 다른 상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일단은 내 아이의 볼에 로션을 발라주는 일과 내 아이가 필요할 때 언제라도 내 몸을 내어주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내 마음이 덜 불편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남들이 이 글을 보면서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싶다. 생계를 위해서 나를 찾거나 할 여유도 없이 경제활동과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하는 많은 엄마들이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나는 허한 마음을 다스리자고 여유롭게 글을 쓰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비춰질 것 같기도 하다.


오소희작가의 문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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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는, 내 인생은, 지금 이래서 좀 힘들기도 하다고 적어두고 싶다. 먼 훗날, 좀더 넓어지고 깊어진 내가 보기에 이 고민이 하찮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지금 나는 이래서 좀 힘들었다고,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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