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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Nov 20. 2024

나의 삶은 이렇게 흘러가는 중

평화로운 주말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난 둘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이의 뻘건 눈을 보는 순간, 무언가 나의 일상에 금이 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나는 한달 넘게 낫지 않는 감기로 고생 중이었고 아이들도 나만큼 힘들어하진 않았지만 계속 자잘한 감기를 달고 지냈었는데, 이번엔 뭔가 좀더 큰 게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자 둘째는 다른 한쪽 눈마저 뻘겋게 변했다. 밤새 아이는 코가 막히는지 목이 아픈지 잠도 설쳤다. 컨디션이 괜찮았던 첫째를 등교시키고서 유치원에 가기 전 둘째를 병원에 데려갔다.

의사선생님은 감기로 인해 눈병처럼 보이는 것 같다고 하셨고(아이들은 감기가 눈으로도 오는지 어릴 때도 그랬다) 심한 감기는 아니라서 등원해도 괜찮다고 하셨다. 하지만 둘째는 오늘 하루만 쉬고 싶다고 말하며 내게 귀여운 웃음을 보낸다.


사실 병원에 가는 순간부터 오늘 유치원은 못 가겠구나 싶어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다. 엄마와 데이트를 해주겠다는 아이는 아파서 좋다고 말하며 신이 났다. 함께 백화점엘 갔다. 월요일 오전의 한산한 백화점에서 무료 기차도 타고 빨간 낙엽도 구경하고 게임장에서 게임도 하고 장난감 코너도 구경하고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록 내가 구경하고 싶은 건 거의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둘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아이도 나도 배가 많이 고팠다. 배고픈 아이는 오물오물 내가 떠먹이는 밥을 잘도 받아 먹었다. 나는 바쁘게 떠먹이느라 거의 먹지 못하고 마지막에 아이가 남긴 밥을 후루룩 다 처리했는데, 뭔가 배가 부르면서도 안 먹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약간 힘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 첫째 하교시간까지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는 키즈카페도 들어가고 싶다는 둥 떼를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는 유치원에 보냈어야 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백화점을 나서며 아이는 오늘 엄마와 데이트를 해서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며 "엄마도 행복했지?" 라는 질문을 여러 번 했다. 나는 행복했다고 계속 대답을 하다가, "오늘 따라 왜이렇게 많이 물어봐?" 했더니 둘째가 말한다.


"엄마 얼굴이 안 행복해 보여서.."


둘째는 눈치가 빠르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났고 화요일이 되었는데, 일어난 첫째의 눈도 빨개졌다.

아.....

그날은 일단 둘째를 먼저 유치원에 보내고 첫째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의사선생님께서 감기로 인해 눈이 충혈된 게 아니라 결막염같다고 하신다. 다른 아이들에게 전염될 수 있으니 나을 때까지 집에 있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한 주의 가정보육.. 수요일, 목요일까진 그럭저럭 즐겁게 보냈다. 하지만 금요일이 되자 나의, 아니 사람의(누구라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악한 모습이 나왔다. 나는 아이들의 작은 저지레에도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지르며, "엄마가 곧 폭발할 것 같아" 라는 말을 달고 있었다.






9월 말까지 일을 하고 10월부터 휴직에 들어가면서 내가 가장 기뻤던 것은, 이제 아이가 아파도 걱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출근을 하면서는 아이가 아파도 기관에 보내야 했다. 밤에는 괜찮던 아이가 아침에 갑자기 열이 났는데, 당장 돌봐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에 열나는 아이를 기관에 보냈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출근을 하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날부터 아픈 기운이 있으면 이모님께 급하게 부탁드리기도 했는데, 다른 일을 하고 계신 이모님께서 그 일을 취소하고 와주시는 거라 이모님께도 너무 죄송했다. 그러니 이러나저러나 출근하는 동안은 아이가 아플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이제 휴직을 했으니, 아이가 언제든 아파도 걱정없이 내가 돌봐줄 수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한 일주일 아니 5일만에 이런 감사함은 희석되고 짜증과 화만 남은 나를 보며 한심하고 우스웠다. 하지만 또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서울 학회에 간다고 남편이 하루종일 아이들을 본 날, 아침에 남편은 몹시 밝은 목소리로 "오늘 엄마 없이 아빠가 재밌게 해줄게" 했는데, 저녁에 돌아오니 남편은 아이들에게 군대식 말투를 쓰고 있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어쨌든, 감사한 일이다. 아이가 아플 때 곁에 있어 줄 수 있어서..

등원하기 바로 전에 응가 화장실이 가고싶다고 말해도 화내지 않고 여유있게 기다려 줄 수 있게 되어서.. 




운전을 할 때 끼어들기를 하는 차량이 있으면 "아이가 많이 아픈가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양보해주라는 글을 어디서 봤다. 그동안 나는 그걸 잘 실천하면서 나 스스로 나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워킹맘을 하면서 일이분의 시간을 다투며 출근을 하게 되자 끼어들기를 하는 차량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간 내가 고상한 척 할 수 있었던 것이 그저 환경이 편해서였단 걸 깨달았다.


7개월 정도의 짧은 복직이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워킹맘의 스케줄을 견디지 못하고 응급실에도 실려갔었고, 너무 변해버린 시스템 적응하지 못해 컴퓨터 앞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리기도 했다. 일이분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고, 저녁이 되면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경험도 해봤다.


하지만 오랜만에 내 이름이 불리는 게 가슴이 두근거렸고, 내게 누구 어머니가 아닌 다른 호칭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출근을 한 날은 남편에게 무언가 재잘재잘 밝게 말하는 나를 보면서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오랜 시간 겪었던 불면증이 단번에 사라졌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체된 우울감이 해소된 느낌도 들었다. 많은 옷들 중에 출근할 때 입을만한 옷은 없다는 이유로 당당하게(?) 쇼핑도 많이 했다. 무엇보다 십년만에 내 이름으로 월급이 들어온 것도 정말 감격스러웠다. 그 돈을 모아 남편에게 대출빚 갚는 데 보태라며 보내주는 내 모습이 스스로 뿌듯했다.  


그런데 다시 휴직을 하게 된 것은, 아직은 아이들에게 손이 많이 가는 시기인 것 같았다. 출근을 하면서 외식을 자주 했더니 첫째가 갑자기 똥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왜인지 내 책임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실제 내 책임이 아닐 수 있는데, 엄마 마음이 뭐든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받아쓰기를 40점 받아온 것도, 구구단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도 모두다 책임 같았다.  


휴직을 하고선 거의 매일 내 손으로 저녁을 만들어주고 있다. 먹성이 좋고 애교가 많은 아들둘은 "엄마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어" "오늘도 정말 잘 먹었네"라고 말해준다. 나를 조련하는 건지 나는 아이들의 그 말에 더욱 열심히 요리를 하게 된다. 첫째는 이제 구구단 시험에도 통과를 했고 받아쓰기는 연속 백점을 받아왔다. 기운이 남아도니 저녁에 둘째에게 책도 읽어줄 수 있게 된다.



요즘 시대 남녀가 똑같이 교육받고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당연히 여자도 사회생활을 해야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돈벌이로서도 중요하지만 나는 일 자체를 꼭 계속 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도 같다. 어쨌든 나는 지금 만족하니까... 다시 씩씩하게 일을 하러 나가게 될 때까지 엄마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복직으로 정신없이 흘러왔던 2024년이 어느새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 정신은 없었지만 계속 열심히는 살고 있었으니까.. 잘하고 있는 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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