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것을 탐닉하는 23년이 되기를
22년 12월 31일. 가만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 차분한 연말이었다. 남편은 해가 조용히 산 뒤로 넘어가자 휙 돌아 나를 보며 한 해 고생 많았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해가 지고 뜨는 것에, 해가 바뀌는 것에 별 감흥 없는 내가, 곁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핸드폰을 열심히 보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딴짓하다 들킨 게 머쓱해서 부러 더 역정 내었고 마지못해 손은 내밀었으나 닭살 돋는 멘트는 그만 날리라고 면박을 주었다.
장장 한 시간 반에 걸친 1)경험 연말 정산으로도 무언가 아쉬웠는지, 나는 그날 밤 다시 한번 한 해 동안 무엇이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는지를 남편에게 물었다. 그리곤 우리가 말하는 경험 선물이란 지극히 소비 중심적인 것 아닌가, 하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경험이란 건 돈을 써야만 얻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어제와는 다른 길로 산책을 하거나 못 보던 고양이를 만나는 것과 같이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도 의미한다고 책에 썼다. 분명 올해도 그러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로그에 올리거나 우리가 말하는 경험이란 값을 지불해야만 만날 수 있는 색다른 체험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물건이 아니면 되는 것인지,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며 하게 된 경험들이 물건을 살 때와 '돈으로 교환한다'라는 측면에서 무엇이 다르지 않은지,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는 소비 조장은 아닌지, 그런 류의 생각들이 스쳤다.
남편은 이야기를 듣다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실행하는 건 내가 가만히 있을 때 공허함이나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휴식이나 여유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고.
"우리가 해왔던 2)경험 선물들, 참 재밌었지. 평소 못 먹어보던 걸 먹기도 했고 새로운 곳에서 신박한 체험들을 했으니까. 그런데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해가 바뀌는 날의 낙조를 보는 오늘과 같이, 나는 이런 순간에서도 같은 감동을 받거나 어떤 의미를 찾기도 해. 그런건 '마침내 오늘'이어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것이기도 하고."
남편은 자신의 생각을 이어 말하고 내게 물었다. " 당신이 말하는 비물질적인 경험은 그런 것 아닐까? 너는 어땠어?"
말문이 턱 막혔다. 하는 말마다 남편 말이 다 맞았다. 나는 어느 순간 부터 일정이 없어서 가만히 누워있는 주말을 못 견뎌했는데, 그럴 땐 정보를 얻는다는 핑계로 핸드폰이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툴툴 댔던 그 순간, 일몰을 보며 남편은 감탄해 마지않던 그 순간에도 나는 지루함을 느꼈고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보내는 것 같아 불안했다.
22년의 마지막 해를 보며 그런 감정을 느꼈다니. 어쩌다 이렇게 무감각하고 메마른 사람이 되었나, 나는 많이 서글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맞네, 인정하는 순간 목소리가 요동쳤다. 한편,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하는 남편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남편이 말한 비물질적인 경험들, 내가 느낀 22년의 그러한 경험들은 무엇이 있었을까 떠올려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책을 읽고 3)니은 서점을 찾아가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이 생각났다. 책의 내용은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만 남았지만 모든 과정에서 느낀 설렘이나 묘한 흥분, 동질감에서 비롯한 안도감과 자그마한 낙관, 대책 없이 커지는 희망과 알 수 없는 보람, 복잡했던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기억났다.
"저자를 찾아간 건 살면서 처음 해보는 일이었어. 정말 그날의 목표는 그것뿐이었잖아. 돌아오는 길에서도 내내 그 이야기만 했었고."
23년의 경험들은 되도록 그런 것들로 채우자고 덧붙였다. 올해도 똑같이 나는 시간의 공백을 잘 못 견뎌하겠지만 지금보다는 사소한 것들에도 생동감을 느껴보자고. 올해는 조금 더 자본주의적인 경험들에서 벗어나 보자고. 계절과 날씨를 기록하고 온기와 말을 나누며, 신용카드보다는 내 두 발과 손을 믿어보는 한 해를 만들자고.
무형의 경험들은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가져다줄까. 되게 낯 부끄러운 결심이었다고 할 수도, 돌이켜보니 크게 변한 아무것도 없다고 낙담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마음 자체도 내겐 큰 도전이고 새로운 경험이다. 그런 과정들을 더 많이 남기고 싶다.
23년에도 슬기 찾기 ing.
3) 니은서점 찾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