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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Jul 23. 2020

물건이 아닌 경험을 선물합니다

미니멀 라이프 지향 부부의 선물 이야기


 

 미니멀 라이프라고 하면 텅 빈 방이 먼저 떠올라서인지 재미없고 단조로운 삶이란 편견이 조금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물건이 비워진 만큼 경험으로 채우면 지루할 틈이 없다. 경험은 쌓여도 물건처럼 자리 차지하는 일이 없어 비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작과 끝 모두 가볍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물건 대신 경험을 선물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내 "슬"의 이야기


 우리는 매년 '경험 연말 정산'을 한다. 하려고 했던 것, 해본 것, 못했던 것들을 나열하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 3가지를 뽑는다.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았던 것과 못해서 아쉬웠던 것은 다음 해에 하거나 첫 도전을 위해 경험 리스트에 다시 올린다.

 

 이것은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하고 생긴 둘 만의 행사다. 물건 말고 재미있는 경험에 투자하기로 한 뒤에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정말 열심히 찾아다녔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부부의 취미 생활> 이란 책을 내보자는 얘기를 할 만큼. 그래서 경험 연말 정산을 하다 보면 한 해를 두 해처럼 살았다 싶을 때도 있다.


 누군가에겐 이런 우리의 선물 방식이 유난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함께 해보는 데에 의의를 두기에 우리가 말하는 경험은 거창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단지 정적인 여자와 동적인 남자가 만나 폭이 넓을 뿐.


 여름이면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해가 뜨거워도 텐트를 펴놓고 배드민턴을 친다. 조금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땐 카약을 타고, 뜬금없이 승부욕이 생기면 단거리 마라톤에 참여해본다. 저질 체력의 문제로 정적인 활동이 그리울 땐 빌린 책을 돌려보고 감명 깊었던 부분에 대해 얘기를 하거나 꽃 시장을 둘러보기도 한다. 어제는 못 본 고양이를 오늘 함께 만나는 것, 늘 마시던 에이드 대신 쓴 커피를 마시는 것과 같이 말하기 쑥스러울 만큼 소소한 것들도 경험에 포함된다. 아무렴 어때, 새로운걸 제안한다면 그건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 된다.


 올 해는 코로나로 계절을 타는 경험, 다수가 함께하는 체험들이 대부분 무산되었다. 그래서 생일 선물로 받은 쿠킹 클래스가 더더욱 소중한 경험이 됐다. 둘이서 좋아하는 감바스와 꾸덕한 크림 파스타를 생일상 차리듯 만들고 나눠 먹었는데, 2시간 동안 선물을 만들고 1시간 동안이나 선물을 감상한 것 같아서 귀한 추억이 됐다. 


 넉 달이 지난 지금도 올리브유를 바라보며 간혹 그때의 감바스를 이야기한다. 비록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어 기억에 예쁜 양념이 추가되고 있지만.. 물건으로 된 선물을 받았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회상하지 못했을 텐데, 기쁨이 찰나로 끝나지 않아 만족스럽다.


 앞으로도 우리의 선물은 그랬으면 좋겠다. '연말 정산을 또 해야 돼?' 한탄할 만큼 많은 경험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집 앞의 산책로를 바꿔 보는 것, 매번 사던 대파를 집에서 키워보는 것, 자라난 대파로 파 기름을 만들고 자신감을 얻어 방울토마토도 키워보는 것 같이, 거창하지 않고 소소한 것들로 선물을 하면 좋겠다. 물건 대신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가면 좋겠다.



남편 "기"의 이야기


   

 아내는 경험과 그에 대한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결혼하기 전부터 그랬는데 그 기억은 아내가 여자 친구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연애하면서 생일 선물로 직접 만든 노트 한 권을 받은 적이 있. 그 노트는 데이트를 하면서 소소하게 먹고 즐긴 것들, 함께 했던 여행의 기억들을 기록한 두툼한 스크랩 북이었다. 매번 무얼 그리 사진 찍고 모으는 건지 궁금했는데 결과물로 의문을 풀어줬다.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은 정말 놀라웠고 고스란히 느껴지는 정성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 이후 나도 함께 할 무언가를 찾고 기록는 것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결혼할 쯤엔 원래 노트 두께보다 몇 배는 두꺼워진 스크랩북이 하나 더 생겼고, 결혼 후 물건보다 들일 경험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결혼하고 선물 받은 경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과 따기이다. 신혼 초 부부의 푸닥거리 끝에 아내가 제안한 체험이었다. 속마음을 담아 제안한 체험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사과(apple) 따기'가 민망함에 돌려한 '사과(sorry)'처럼 들려서 웃음이 났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도 사과하고 화해할 수 있겠구나 싶어 인상적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내게는 세상을 바꾼 3대 사과*에 아내의 사과 하나가 더해졌다.


*세상을 바꾼 3대 사과란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사과.


 사과의 의미가 빛을 발하게 그 날 가을 하늘은 참 맑았다. 그때 같은 하늘을 보는 날엔 사과를 따던 촉감과 수확한 사과를 깎을 때 맡았던 달콤한 향기가 또렷이 기억난다. 그럴 때면 나도 아내에게 이런 경험을 하나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고개만 올리면 보이는 하늘로도 특별히 기억될 경험 하나를 선물해주고 싶다.

 

 올 해는 시국이 이러한지라 많은 경험을 주고받진 못했지만 그래서 함께한 쿠킹 클래스가 상반기 결산 최고의 선물이 됐다. 레스토랑에서 먹었다면 사진 몇 장으로 남았을 파스타인데, 직접 만든 덕분에 많은 이야기가 생겼다. 어설픈 요리 실력으로 아내에게 혹평받았던 기억을 즐거움과 맞바꾸기도 했다.

 

 물건 대신 주고받은 경험이라는 선물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우리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든다. 덕분에 경험 연말 정산은 늘 환급 기준을 충족하고 넘쳐 돌아온다. 그래서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경험은 맥시멀을 추구하려 한다. 경험의 씨앗을 뿌리고 또 뿌려서 삶이란 밭을 풍성하게 만드는 프로 경험러가 되겠다.


 그러니까 여보, 밤 따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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