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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잌 Nov 29. 2023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얼마 전 미국 출장을 갈 때 왕복 24시간이나 되는 지루한 비행을 때우려고 <미스터션샤인> 전편을 태블릿에 다운 받아서 갔었는데, 중간에 잠도 들고 딴짓도 하다 보니 비행기에서 다 보지는 못하고 이번 주말에서야 마지막 24회를 끝냈다. 물론 이번에 처음 본 것은 아니고, 이번이 네 번째 정주행이었는데, 사실 이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더 자주 보고 싶어도 매번 볼 때마다 감정의 소모가 너무 심해서 중간에 텀을 많이 두고 다시 봐야 하다 보니 이번이 겨우(?) 네 번째이다.


이번 글은 <미스터션샤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드라마는 나에게 참 여러모로 기억에 많이 남는 드라마이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방영되었고, 당시 내가 재직하던 회사에서 제작했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와 같은 "검은 머리 미국인"이 주인공이다. 심지어 주인공이 나와 성까지 같아서 한때 주위에서 나를 유진 초이에 빗대어 마익 초이라 불렀던 때가 있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마이크"라 발음하는 사람이 더 많았는데, 지금은 Mike의 "k"를 ㅋ으로 반영하길 원하는 나의 의사대로 "마잌"이라는 근본 없는 스펠링이 완성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마잌"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이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


일단 본격적으로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마지 하자면, 나는 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김은숙 작가는 진짜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도깨비>, <태양의 후예>, <시크릿가든> 등 초대박 히트작들만 나열해도 열손가락으로 모자라는 김은숙 작가님이지만, 작품성이나 완성도 측면에서 <미스터션샤인>이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최고작이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김은숙 작가 특유의 현실성 떨어지는 설정이나 오글거리고 유치한 대사 때문에 앞서 언급한 초대박 히트작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미스터션샤인>은 설정도 너무 독창적이고 기발하고, 너무나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후벼 파고 없던(?) 애국심까지 생기게 만든다. 아니 도대체 김은숙 작가는 어떻게 낡은 의병대 사진 한 장에서 조선 출신 미국인이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한다는 설정을 떠올렸을까?


드라마 기획 단계 초기에는 아예 벽안의 외국인을 -그것도 <프리즌 브레이크>의 웬트워스 밀러를- 캐스팅하려다 잘 안되어서 설정을 검은 머리 미국인으로 바꿨다는데, 나는 이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 순수 미국인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스토리도 억지스럽고, 원래 기획대로 제작되었더라면 대사의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되거나, 외국인들의 어색한 한국어 때문에 <서프라이즈> 느낌이 나서 몰입에 매우 방해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미스터션샤인>에도 다른 드라마들보단 덜 하지만 어색한 영어를 쓰는 <서프라이즈> 류 배우들이 조금 나오긴 한다).

까딱 했더라면 이런 느낌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그 어떤 누구도 이병헌 배우만큼 이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잘 연기하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모든 주요 배역들의 완벽에 가까운 캐스팅이라 생각하는데, 그중에서도 이병헌 배우와 김태리 배우는 다른 사람이 연기하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각각 유진 초이, 고애신 그 자체였다. 이 드라마가 나왔을 당시 이병헌 배우는 "로맨틱, 성공적" 사건으로 인해 매우 이미지가 안 좋았던 데다, 김태리 배우와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서 미스캐스팅이라는 소리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모든 우려와 비난을 압도적인 연기력 하나로 모두 잠재워버렸다. 연예인이 마약을 하든, 불륜을 하든 전혀 타격이 없는 헐리우드와 달리, 배우들의 도덕성도 매우 중요시하는 한국에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배우들이 복귀하면서 늘 "연기로 보답하겠다"는 말장난 같은 헛소리를 하는데, 단언컨대 이병헌은 그게 실제로 가능한 유일무이한 최고의 연기력을 지닌 배우라 생각한다.

최고의 연기로 보답해 "유진초이" 역으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한 이병헌 배우

또한 “애기씨” 배역을 맡은 김태리 배우 역시 그 누구보다도 그 역할을 잘 소화해 냈다. 특히 한복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동양적이고 단아한 마스크와 누가 들어도 양갓집 규수 같은 고상하면서도 강단 있는 "하오체" 말투가 너무너무 인상적이었는데, 이 드라마를 처음 보고 난 후 한동안 김태리 배우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부끄럽지만 난 김태리 배우가 처음 <아가씨>에서 과감한 노출 연기로 화제가 됐을 때, 그녀를 벗어서(?) 쉽게 뜨려는 배우라 오해했었는데, 그녀의 연기는 <아가씨>에서도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고, <미스터션샤인>에서 정점을 찍는다 (역시 박찬욱 감독님이 1500명이나 오디션을 보고 내린 선택이 틀릴 리 없었다).

전혀 내성적이지 않은 "고애신" 역할을 잘 소화한 김태리 배우

그리고 서브 주인공 중에서는 "김희성" 배역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원래 변요한 배우를 참 좋아한다. 오늘 글 제목의 “더할 나위“를 따온 드라마 <미생>에서도 장그래 역의 임시완 배우나 오 차장 역의 이성민 배우보다도 변요한 배우가 연기한 한석율 역할이 제일 눈에 들어왔었는데, 장국영 배우를 닮은 멋진 외모, (개인적으로 한국 배우들 중 최고의 발성과 목소리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이병헌 배우만큼은 아니지만) 매력 있는 보이스와 발성, 그리고 한예종 시절부터 수십 편의 독립영화 출연으로 다져진 탄탄한 연기력이 아주 매력적이다.

극중 조선 최고 부자 + 최고 미남 설정인 “김희성” 역할을 맡은 변요한 배우. 딱 봐도 부잣집 도련님 느낌이 물씬 난다.

이 드라마가 처음 방영 되었을 당시 "김희성" 캐릭터가 나와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겉으로는 가벼워 보이지만 속은 나름 진중한 부분이 좀 닮은 것 같다 (다만, 가장 중요한 외모와 재력을 닮지 못했다). 나는 뭔가 한량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 드라마를 볼 때 정작 나와 같은 검은 머리 미국인인 유진초이보다 한량인 김희성에게 훨씬 이입이 잘된다. 하튼 이 드라마에는 유진초이, 고애신, 김희성 외에도 수많은 캐릭터들 중 단 한 명도 허투루 쓰이는 캐릭터가 없고, 그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뛰어난 부분 중 하나인데, 나머지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다시 이어가겠다.


한 편의 영화와 같은 드라마


제목에 이미 적은 바와 같이 <미스터션샤인>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잘 만든 드라마이며, 장점들을 이루 다 열거하기가 어렵지만, 한 편의 24시간짜리 영화 같은 작품이라는 표현으로 함축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라마보단 영화에 가까운 촬영기법이 활용된 이 작품은 정말 아름다운 영상미와 색감을 자랑하며, 특히 내가 작품을 감상할 때 눈여겨보는 로케이션 선정이 너무나 훌륭한데, 그중에서도 유진초이와 애신의 만남 장소로 자주 활용되는 나루터와 호수의 풍경이 기가 막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박효신도 참여한 비장하고 애틋한 느낌의 OST도 매우 적절히 잘 사용된다.

꽁꽁 언 호수 앞에 서있는 애기씨의 겨울 한복 차림이 너무 예쁘다.

그리고 24회나 되는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전혀 늘어지지 않는 스토리 전개도 인상적이다. 다 보는데 24시간이 넘게 걸리는 드라마지만, 총 4시간도 안 되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같은 영화보다 훨씬 덜 늘어지고 덜 지루하다. 400억 넘게 들여 거의 100% 사전 제작한 드라마라 그런지 급하게 억지로 채워 넣거나 쪽대본으로 날림 촬영한 듯한 분량도 없고, 김은숙 작가가 쓴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반응 때문에 도중에 바뀐 부분도 없는 것 같아서 참 좋다. 그리고 이 정도 스케일의 드라마는 웬만해선 아역 시절의 내용으로 최소 몇 회는 때웠을 텐데, <미스터 션샤인>은 아역 시절을 1회로 모두 끝내버린다. 그런데 심지어 아역 시절 이야기도 매우 재미있고, 그 짧은 분량 안에 나중에 다 완벽하게 회수되는 중요한 복선들과 이후 스토리에 매우 중요한 유진초이와 김희성 집안의 악연 등을 깔끔하게 다 풀어낸다. "선샤인"이 아닌 "션샤인"인 제목의 철자 표기를 포함해 전반적인 고증 역시 뛰어난 편인데, 좀 찾아보니 약간의 고증 오류 및 이에 대한 비판은 있는 모양이다. 그중 작중 사용된 총기가 어쩌니 저쩌니하는 밀리터리 덕후들의 비판은 그냥 무시하고, 그래도 일리가 있는 역사적 시간대가 안 맞는 부분에 대한 비판은 작품성 및 스토리를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고 접어두자.


자, 이제 드디어 본격적으로 드라마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24부작이나 되는 긴 드라마인 <미스터션샤인>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 싸울 이유가 전혀 없는 5명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야기이다. 처음부터 순수한 애국심으로 일본과 맞서 싸운 애신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모두 처음에는 사랑 때문에 -남자들은 애신을, 히나는 유진을 돕기 위해-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게 된다. 노비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간신히 미국으로 도망쳤던 미 해병대 대위 "유진 초이", 조선 최고 명문가의 규수이자 모든 조선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고애신", 백정의 자식으로 평생 핍박받다 일본으로 넘어가 무신회 오야붕이 되어서 돌아온 "구동매", 조선에서 황제 다음으로 부자인 만석꾼 집안의 외아들인 "김희성", 매정한 친일파 아버지에 의해 일본인 남편에게 팔려갔던 빈관 사장 "쿠도 히나" 중 누구 한 명도 조선을 위해 일본과 싸울 이유나, 싸워서 얻을 이득이 없다.


일단 유진이나 구동매는 부모님을 잃게 한 조선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이 강할 수밖에 없고, 애신, 희성, 히나는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든 말든 조선에서의 부유하고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시 자신들에게 해준 것 하나 없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전혀 없는) 도공, 포수, 대장장이, 전당포 주인, 양복점 직원 등의 평범한 조선의 백성들로 구성된 의병대의 항일 운동을 돕는다. 사실 주인공들 중 실제로 "의병" 소속인 것은 애신뿐이지만, 나머지 4명도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조선을 위해 애쓴다. 유진초이와 구동매는 각각 총과 칼로, 김희성은 글로, 히나는 정보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유진초이에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노골적으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려 하는 조선인들의 태도이다. 이는 의병들 뿐만이 아니라 황제나 이정문 대감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인데, 유진초이는 (그들의 표현대로) 항상 선의로 조선을 향해 옳은 방향으로 걷지만, 그는 끝까지 이방인 취급을 받고, 그가 조선인들 중 가장 아버지 같이 생각하는 의병대 대장 황은산의 지시로, 그것도 그가 사랑하는 애신의 손으로 살해당할 뻔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애신을 위해 불명예 전역 및 3년 동안의 수감생활까지 감수하는데, 진짜 진짜 마지막에 가서야 드디어 의병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얼마 가지 않아서 애신과 조선의 미래인 아이들과 청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다만, 이는 일본이나 기타 해외 열강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당시 조선의 서글픈 현실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며, 만약 유진초이가 그렇게 늘 조선을 돕지 않았더라면 그는 "미스터션샤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유진초이의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데, 김은숙 작가가 이 수많은 캐릭터들을 유진초이와 너무 억지스럽지 않게 잘 연결시킨 게 참 대단하다 (공교롭게도 어린 유진을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왔던 사람들은 모두 나중에 의병이 되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진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선교사 요셉 스텐슨과 도공 황은산의 스토리를 가장 좋아하는데, 내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울컥했을 때가 바로 요셉의 사망 장면이었다. 특히 이병헌 배우가 특유의 멋진 목소리로 요셉의 마지막 편지를 읽을 때 지극히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너무나 애틋한 아들의 모습에 항상 눈가가 촉촉해지는데, 정작 나는 오글거린다는 핑계로 아빠에게 그리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네 머리칼을 다듬어주고 나는 겨우 약을 발라주면서 신께 기도를 했단다. 이 이방의 아이에게 갓 구운 빵과 맑은 물을 허락하시라고. 이 이방의 아이에게 추위를 거두시고 뜨거운 햇살을 허락하시라고. 겨우라는 말은 지워야겠다. 가난한 선교사에게 약은 꽤나 값비쌌거든.

보고 싶구나, 유진. 근래에 탁주 담그는 법을 배웠단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들고 갈 계획인데, 한성에 도착하기 전에 다 비우는 일은 없도록 애써보마.

고귀하고 위대한 자여, 나의 아들아, 네가 어디에 있든 널 위해 기도하마. 기도하지 않는 밤에도 늘 신이 너와 함께하길 바라며."

-극 중 요셉의 편지
이 장면에서 늘 울컥한다.

그리고 도공 황은산과 전직 추노꾼/현직 전당포 주인인 일식과 춘식 듀오도 참 좋아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진의 생명의 은인들이다. 일식과 춘식은 그들의 추노꾼으로서의 명성을 망쳐가면서까지 숨어있는 어린 유진을 모른 척하고 넘어가주었고, 황은산 역시 귀한 백자를 줘가면서까지 요셉에게 유진을 미국으로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특히 황은산은 비록 의병대의 대장으로서 어쩔 수 없이 유진을 죽일 것을 명령하기도 했었지만, 힘 있는 나라의 영사 대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유진을 보고 누구보다 뿌듯해하고, 이렇게 살아 돌아와서 조선을 도운 것만으로도 어렸을 때 구해준 은혜를 다 갚았다며 자고 가라면서 불을 때러 가는 게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늘 밍밍하다고 툴툴대면서도 유진이 가져다주는 맥주를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일식과 춘식은 각각 구수한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로 전반적으로 매우 진지한 분위기의 드라마에 적절히 웃음을 더 해주는데, 대부분의 주인공이 사망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는 역할도 한다. 특히 극 중에서 매우 큰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김희성의 시계도 이들이 물려받는데, 그간 밀린 월세를 시계로 대신하겠다고 적은 마지막 편지는 참 김희성스러운 작별인사였다. 희성의 시계는 1회에 희성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그의 조부에게서 선물 받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해서 극 중 내내 그의 조부와 부친의 악행 및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본인이 호의호식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상징하는 오브제의 역할을 하는데, 마지막엔 결국 그의 유품이 된다. 처음엔 철없고 실없는 도련님이던 희성은 일본의 악랄한 수탈행위들을 낱낱이 보도하고 조선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신문 편집장으로 성장하는데, 그가 일본 경찰과 친일파의 모진 고문에 사망하면서 시계가 천천히 멈추는 연출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 드라마에는 유독 희성과 관련된 뛰어난 연출이 많다).


그리고 <미스터션샤인>은 악역들도 모두 입체적이고 인상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본인 모리 타카시 역의 김남희 배우였다. 김남희 배우가 일본인 특유의 한국어 발음을 너무나 잘 재현한 나머지, 나는 그를 <스위트홈>에서 다시 보기 전까지 그가 일본인 배우인 줄 알았다. 모리 타카시는 극 중 유진초이의 최대 라이벌로 등장하는데, 비록 마지막에 유진의 손에 죽긴 하지만, 천황 다음으로 힘 있는 집안의 자식이라는 배경과 (일본의 입장에서) 의병의 위험성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파악할 정도의 날카로운 식견을 지녀 유진의 맞수로 손색이 없는 강적으로서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의병이었던 자들의 자식들은 을미사변 때 다시 의병이 되었는데, 을미사변 때 의병이었던 자들의 자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묻는 장면의 포스는 정말 엄청났다.


하지만 극 중반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한 모리 타카시보다도 더한 극 중 최대 빌런은 역시 김의성 배우가 연기한 이완익이다. 그는 본인의 손으로 애신의 부모님을 살해했으며, 유진의 아버지와 같은 요셉의 암살을 사주했고, 외부대신이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본인의 유일한 자식인 히나를 평생 엄마를 그리워하고 남자한테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죽는 기구한 팔자로 몰아넣은 뼛속까지 기회주의자인 사람이다. 정말 비호감스러운 이북 사투리 및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한 태도는 덤이고 (물론 김의성 배우가 그만큼 연기를 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가 막판에 애신의 손에 죽을 때 마치 <해바라기>에서 김래원 배우가 연기한 오태식이 복수에 성공했을 때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데, 이완익 같이 존재감 큰 빌런이 없었더라면 절대 <미스터션샤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유진의 모친을 탐하다가 결국 유진의 부모님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초래하고 이완익에 필적할 정도로 나라를 팔아먹지 못해 안달인 이세훈 대감, 조선인들을 죽이는데 한치의 거리낌이나 죄책감도 없는 악랄한 일본군 츠다 하사 등 인상적인 악역이 너무 많은데, 그중에서도 특별출연이라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 김희성의 조부 역의 김응수 배우가 아주 기억에 남는다. 그가 3대 독자 손주인 희성에게 귀한 시계를 선물하기 위해 가난한 소작농을 인정사정없이 내치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별 의미 없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그 시계와 소작농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그 장면이 매우 중요한 장면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의외로 현실에서는 매국노의 대명사로 가장 유명한 이완용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은데, 이는 이완익과 모리 타카시를 양대 빌런으로 설정하고 그들에게 존재감 및 임팩트를 몰빵하기 위한 김은숙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회에서 희성이 이완용을 비롯한 악질 친일파들의 사진을 찍을 때 셔터를 누를 때마다 한 명 한 명 클로즈업되면서 총성이 들리는 연출이 매우 멋졌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매국노 일당의 사진을 찍는 김희성

Such a romantic show.


먼저 위에 사용한 "show"라는 표현을 짚고 넘어가자면,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흔히 "드라마"라 부르는 프로그램들을 단순히 TV "show"라고 부른다. <프렌즈>, <오징어게임>, <브레이킹배드> 등 장르나 포맷과 상관없이 그냥 다 TV show다. 그리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미스터션샤인>은 의병과 독립운동에 대한 시대극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낭만에 살고 죽는 남자들로 가득 찬 로맨스 드라마이기도 하다. 왠지 이병헌 배우 출연작에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조롱하는 것으로 비칠 것 같은데, 진짜 그럴 의도는 전혀 없고, 신기하게도 24회나 되는 긴 드라마에 그 흔한 키스씬 하나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로맨틱하다. 격정적인 애정씬보다 아쉬움을 한껏 남기는 작별의 허그 장면 하나가 더욱더 애틋하고, 모든 배우들이 각자 자신의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준 덕분에 <미스터션샤인>은 감동적이지만 신파적이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주며, 뭉클하다.


물론 극 중 메인 주인공인 유진초이와 애신의 관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나는 오히려 서브 주인공인 구동매와 김희성의 로맨틱한 행동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먼저 구동매는 유진만큼 애신에게 마음을 품고 있지만, 자신의 과거와 출신, 그리고 낭인으로서 행한 수많은 살인과 악행 때문에 애신에게 진지하게 다가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며 항상 스스로 선을 지킨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한 달에 하루라도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굳이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돈을 매달 보름달에 직접 가져올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도 마지막으로 애신을 한 번 더 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있는 힘을 다해 버티는 모습이 너무나 처절하고 안쓰럽다. 그리고 희성은 나쁜 마음만 먹으면 정혼자인 애신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진을 좋아하는 애신을 위해 그녀를 보내주는데, 마지막까지 애신의 마음이 편할 수 있도록 일부러 당구 내기까지 해가면서 내기에서 이긴 본인의 "소원"으로 포장해서 보내주는 낭만이 있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애신을 숨겨주기 위해 일부러 다리를 저는 연기를 하고, 애신이 복장으로 인해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애신이 입은 양복을 한성에서 유행시켜 버리는 등 구동매 못지않게 지고지순하다.


유진 역시 만만치 않은 로맨틱 가이인데, 내가 개인적으로 <미스터션샤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바로 유진이 애신에게 "합시다, love. 나랑. 나랑 같이."라고 하는 장면이다. 일단 영상미가 너무나 아름답고, 뭔가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참신한 고백이자 연애 시작 장면인 것 같다. 러브의 뜻을 몰라 의미를 물어보는 애신도 너무 사랑스럽고, 바로 알려주지 않고 “총 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보다 더 위험하고, 그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라고 설명해 주는 유진도 너무 멋지다. 이게 과연 "길라임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작년부터?" 같이 유치한 대사를 쓰던 김은숙 작가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악수로 러브를 시작하는 유진과 애신

그리고 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애절해지는 후반부에 유진이 애신의 일본 입국을 돕기 위해 가짜로 혼인한 척을 하는 장면에서 또 하나의 엄청난 명연출이 나오는데, 바로 결혼반지를 이용해 "LOVE" 글자를 만들었던 게 반지를 치우면서 "LIVE"로 바뀌는 씬이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새드 엔딩"이라는 표현을 강조하며 결말이 슬플 것을 예고하는데, "조선"과 "독립운동 정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애신만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복선을 보여주는 것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작별하기 전에 애신이 유진에게 자기는 실제로 가보지도 못한 미국에서 유진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매일 상상했다는 말이 너무 애절하게 다가왔다. 그토록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애신은 결국 조국을 버릴 수 없었고, 유진은 또 그런 애신의 선택을 존중해 준다.

“조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애신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복선

브로맨스


그리고 약간 결이 다른 로맨스(?)이긴 하지만, 나는 극 중 남자 주인공 삼인방의 브로맨스도 참 좋았다. 비록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하는 연적들이지만, 늘 티격태격하면서도 함께 애신을 돕다가 결국엔 정도 들고 친해지며 김희성의 표현대로 “동무”가 되어가는 모습이 좋다. 그리고 애신을 돕다 보니 자연스럽게 함께 조선의 주권을 지키게 위해 싸우는 “동지“가 되어 가는 모습도 그렇고. 생각해 보면 양복, 도박, 빈관 숙박비 같은 곳엔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조선 최고 부자 김희성이 정작 셋이 술을 마실 때는 술값을 단 한 번도 내지 않는 것이 재미있는데, 마지막 회에 가서야 드디어 한번 계산할 때 늘 희성에게 총이나 칼을 들이대던 유진과 구동매가 평소와 달리 함께 술잔을 들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무로서 함께 건배하는 세 남자

세 남자들이 모두 같이 등장하는 장면들도 재미있지만, 의외로 항상 진지한 유진초이와 구동매 간의 케미가 매우 좋고 웃긴데, 그 둘은 초반에는 서로 못 죽여 안달이던 사이였다가 각각 극 중반과 후반에 서로에게 ”미워야 하는데 마음에 들어 큰일이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친해진다. 유진은 뭔가 자신과 성격이 상극인 희성은 귀찮아하거나 기 빨려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마지막 회에 희성이 자신을 만났을 때보다 구동매를 보고 더 반가워하자 은근 서운해하는 게 재미있다. 하지만 유진과 희성 둘만 나오는 장면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이 드라마 속 브로맨스의 주축은 역시 유진과 구동매이다.

함께 야경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뭔가 <라라랜드> 느낌이 나서 좋아하는 씬
<라라랜드> (2016)

영어가 많이 나오는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은 아무래도 미국인이 주인공인 드라마이다 보니 다른 한국 드라마들에 비해 영어가 많이 나오는데, 영어 대사들이 전반적으로 적절하게, 또 위트 있게 쓰여있다. 사실 유진초이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깨치기 어려웠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평생 영어만 쓰다 온 사람치고는 한국어를 너무 잘하긴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 유진초이와 학당에서 알파벳만 갓 뗀 수준의 애신이 영어를 쓸 때 왠지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가 한국어로 대화하는 느낌이 나서 좋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초이가 3년 형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애신과 재회했을 때, 애신이 위험한 조선으로 왜 돌아왔냐고 묻자 유진초이가 “달리 방법이 없었소. 안 돌아올 방법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정말 딱 한국어가 서툰 미국인이 (영어를 한국어로 직역해서) 할법한 표현이라 느껴져서 정말 대사를 잘 썼다고 감탄했다. 아마도 영어였다면 유진 초이는 (“choice”는 방법보다는 선택지에 가깝지만) ”There was no other choice. I had no choice but to come back.”이라고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는 뜬금없는 “소풍”이라는 단어가 꽤 자주 언급되는데, 유진의 상사인 카일도 ”picnic“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고, 유진도 애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에 “그대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내겐 소풍 같았소”라 하며, 이때 깨알같이 소풍은 영어로 “picnic”이라 가르쳐 준다. 아마도 그 편지를 썼을 즈음에는, 아니 그보다 이미 한참 전에 두 사람의 결말은 “새드 엔딩“일 것을 직감하고 있었을 텐데도,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소풍 같았다니, 낭만 그 자체가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 회에 영국인 종군 기자가 의병에 대한 취재를 하기 위해 유진을 찾았을 때, 유진이 자기를 어떻게 찾았냐고 물으니 "How is the picnic, Eugene?"이라는 한 마디로 카일의 소개로 온 것을 인증하는 암호명 같은 역할도 하고, 심지어 유진초이의 묘비에도 “Still on a picnic here in Chosen”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다만, 묘비에 적힌 글귀를 “소풍 같은 조선에 잠들다”로 번역한 부분이 조금 아쉬운데, 사실 유진이 폭풍 같이 위험하고 힘들었던 조선에서의 시간들이 (애신과의 “러브” 덕분에) 소풍 같았다고 한 것을 보면, “picnic”은 역시 독립운동을 은유하는 메타포로 봐야 하고, 저 글귀는 유진이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 부분은 번역이 조금 아쉽다.

참고로 영어로 "it's no picnic"이란 표현은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이방인으로서 폐쇄적이고 외국인들에게 지극히 배타적이었던 구한말 조선에서 독립운동 같이 힘든 일을 "picnic"이라고 표현한 것이 참 재미있고, 또 낭만적이다. 그런데 딱히 반대의 의미로 편하고 쉬운 일에 “it's a picnic"이라고는 잘하지 않는데, 영어로 "식은 죽 먹기"라는 표현은 "it's a walk in the park", 즉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처럼 쉽다는 표현이 있다 (더불어 “it’s a piece of cake”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미스터션샤인>은 영어가 많이 나오는 드라마인 만큼, 마지막까지 영어로 끝나는데, 나는 이 흔하디 흔한 "see you"라는 표현이 이렇게 애틋할 수 있는지 몰랐다. 일본에서 유진이 본국으로 송환되기 직전 애신과 작별하는 장면에서 애신이 유진에게 "굿바이 말고 씨유라고 합시다"라고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반드시 다시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너무나도 와닿았다. 그리고 이 "씨유"라는 표현은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뜨는 엔딩 문구에 다시 나오는데, 이 문구 역시 정말 이 드라마에 딱 맞는 감동적인 마무리였던 것 같다. <미스터션샤인>은 보면 볼수록 "낭만의 시대"를 제대로 표현한 역대급 명작이라 생각되는데, 진짜 가능하다면 “안 본 눈”을 사서 다시 보고 처음 봤을 때의 그 감동과 여운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굿바이 미스터 션샤인. 독립된 조국에서 씨유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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