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필재 Sep 18. 2020

19. 성찰하지만 실패하는 학벌주의자

학벌콤플렉스는 약도 없는 병 ... 학벌 유세, 학벌콤플렉스와 동전양면

 10년째 페이스북을 한다. 트위터를 하다 갈아탔다. SNS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욕구가 있다. 노출 욕구 내지는 과시욕과 관음증적 욕구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욕구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기보다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페이스북을 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우선 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직업적인 글쟁이로서 나는 페북 담벼락을 글쓰기 연습장으로 활용한다. 글이라고 해 봤자 대부분 몇 줄짜리 잡문이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엔 엄연히 나의 생각이 담긴다. 다음으로 내가 하는 직업적 일의 연장선상에서 비판정신을 벼리기 위해서다.

 어쨌거나 나는 페이스북 상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친구다. 페북 친구가 3400여 명이지만 내가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다 오프라인에서 페이스북 잘 보고 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좋아요’ 한번 누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눈팅만 하는, 말하자면 관음 욕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나는 페북에서 친구 요청을 받으면 대개 수락한다. 이때 흔히, 무심히 상대방의 학력과 출신 학교를 본다. 그렇다고 친구 수락을 할 때 학력 및 출신 학교를 따지는 건 아니다. 그냥 나도 모르게 학력과 학벌에 시선이 간다. 길을 걷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면 얼굴로 시선이 향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학력과 학벌로 사람을 평가해선 안 된다고 믿지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이런 관성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나는 별 수 없는 학벌주의자이다.

 사실 학벌은 과거와 달리 약발도 별로 없다. 단적으로 지금은 어느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이다. 더욱이 대학에서 전수 받은 지식의 유통기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대학 성적도 별 의미가 없다.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은 대학의 졸업 학점은 변별력이 없다고 말했다. 수도권 대학 출신의 93%가 졸업학점이 평균 B학점 이상이라고 귀띔했다. 조 회장은 청춘들이 취업을 하려 이른바 스펙을 쌓는 건 무모한 시도라고 못 박았다.

 코로나19로 교회와 더불어 대학이 위기를 맞았다. 이미 세계 유수의 대학의 좋은 강의를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는 시대이다. 스펙으로서의 학벌은 갈수록 빛이 바랠 것이다.  

 출신학교에 눈길이 가는 건 58년 개띠가 취업할 때만 해도 학벌이라는 스펙이 먹혔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 세대의 집단적 경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는 나와의 멘토링 인터뷰 때 젊은 세대를 향해 “50대 이상이 맞는다고 하는 건 절대 하지 말라”고 강변했다. 30년 후의 잣대로는 이 세대가 하는 이야기가 틀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단적으로 직업 선택과 관련한 조언, 집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같은 결정을 그 예로 들었다. 우리 세대가 자식들에게 학벌을 강조하는 건 여전히 학벌이 먹힌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학벌주의는 말하자면 가성비가 떨어지는 데도 여전히 찾는 단골 식당 같은 것이다.

 내가 학벌주의자인 건 오래된 나의 학벌 콤플렉스와 무관치 않다. 이 열등감은 거의 극복한 거 같다가도 어쩌다 불쑥 고개를 든다. 나에겐 어쩌면 약도 없는 지병 같은 것이다. 어쩌겠는가?

 나는 1974년 명문이었던 서울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진학했다. 이른바 뺑뺑이 1회다. 당시 서울고는 신문로에 있는 경희궁에 있었다. 중학교 때 무슨 경시대회에 참가하느라 이 학교를 찾았었다. 한겨울이었다. 고등학교 치고는 매우 넓고 겨울이라 황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캠퍼스에 나목들이 서 있었다. 이런 학교는 어떻게 다니나 했던 기억이 있다.

 고교 2학년 땐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교내 경희예술제의 사회를 봤다. 대부분 여학생인 관객들에게 “이 강당을 나서 뒤로 올라가면 장희빈이 마시던 샘이 있다”고 구라를 쳤다. 장희빈이 한때 경희궁에 살았으니 그랬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 학교는 동아리가 참 많았다. 연주 동아리도 여럿이었다. 예술제 리허설 때 밴드반의 관악기 파트가 일제히 소리를 내면 강당 천장의 낡은 페인트가 떨어졌다. 심지어 하모니카반도 있었다. 내가 속한 방송반은 방송제를 했다. 예술제 때면 방송제를 준비하느라 며칠 밤을 샜다. 리허설을 할 때면 졸업한 선배들이 찾아와 격려도 하고 ‘군기’도 잡았다. 1학년 때 나는 PD로서 뉴스를 담당했다. 무대에서 아나운서가 뉴스를 하는 동안 8밀리 필름으로 찍은 학교 행사 영상을 틀었다. 이 필름은 징크스가 있었다. 재학생 대상 공연과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본 공연 중 한번은 필름이 끊어졌다. 편집하느라 잘라서 연결한 부위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재학생 공연을 무사히 넘겼다. 다음 날 있을 본 공연이 걱정됐다. 나는 1년 선배였던 아나운서와 사인을 정했다. 내가 두 손으로 X 표시를 하면 필름이 끊어진 것이니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라는 사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름이 끊어졌다. 그때 부들부들 떨면서 흰 장갑을 낀 손으로 X 표시를 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징크스대로 8밀리 필름이 끊어졌고 나는 부들부들 떨며 두 손으로 X자를 만들었다.


 예술제 마치고 나면 관객들이 강당을 나서 교문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 학생들이 도열했다. 예술제 후 여학생들과 애프터도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들어온 선배들이 우리 동기들을 대놓고 무시한 적은 없다. 나는 입학 당시 성적이 괜찮았기에 공부 잘하는 선배들에게 기 죽지도 않았다. 교사들이 우리를 향해 공부 못한다고 타박한 적은 있다. TV 드라마 ‘비밀의 숲2’를 보면 배두나가 연기하는 행동파 여자 형사가 볼펜을 돌린다. 볼펜 돌리기는 나의 고교 시절 1년 선배들이 처음 시작했다. 대학 학번으로 치면 76학번들이다. 한참 유행할 땐 볼펜뿐 아니라 손에 잡히는 건 무엇이든 돌렸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봉걸레도 돌렸다. 어느 날 한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볼펜 떨어뜨리는 걸 봐도 너희들이 선배들보다 공부 안 하는 걸 알겠다.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절대 시간이 적으니 그렇게 자꾸 볼펜을 떨어뜨리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교사로서 수업 중 수시로 볼펜이 바닥에 떨어져 나는 소리가 거슬렸을 것이다.

 가끔 만나는 한 고교 동기는 요즘도 무시험 세대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학교 선배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시험 보고 들어갔다고 ‘유세’하는 선배들의 경우 대개 대학 학벌이 좋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무시험 세대라고 무시하는 선배에게 “선배님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고 물으면 보통 입을 다문다고 했다. 학벌 유세는 학벌 콤플렉스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직장인인 딸이 재수할 당시의 일이다. 재수학원 담임이 부모를 호출했다. 우리 부부를 앉혀 놓고 담임이 말했다.

“부모님이 명문대 출신이라 학교 선택에 아이가 부담을 느끼는 거 같습니다. 지금 서울의 웬만한 대학은 당시 두 분이 나오신 학교 갈 실력은 돼야 갈 수 있어요.”

 딸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대학 생활을 충실히 했다. 학교 공부도, 단과대 밴드도 참 열심히 했다. 요즘도 대학 동창들을 만나 밴드 연습을 한다. 보컬을 맡고 있다. 어느 날 딸이 동아리 친구들과 밴드 연습을 했다고 했을 때 나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채송화를 떠올렸다. 신경외과 부교수 채송화 역을 한 전미도는 뮤지컬 배우이다.  

 딸은 외국어고등학교 다닐 때 아카펠라 동아리를 했다. 내가 고교 시절 방송에 빠져 살았듯이, 아이도 공부보다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이에게 “너는 왜 하고 싶은 게 없니”, “왜 되고 싶은 게 없니” 하고 물었다. 적이 실망스러웠다. 아이의 고교 입학 전 예비 소집일에 나는 아내와 학교에 갔었다. 그날 알았는데, 아이가 합격한 영어과는 전원 유학반이었다. 나는 아이를 고교 졸업 후 해외에 유학 보낼 형편이 못됐고, 보낼 용의도 없었다. 그날로 전과를 했다. 스페인어과로 전과하기를 바랐지만 아이 뜻에 따라 불어과로 전과했다. “애비가 정보에 어두워 딸을 전과자로 만들었다”고 지금도 농담을 한다.    

 대학에서 일본 지역학을 전공한 아이는 재학 중 1년 휴학을 하고 IT 스타트업과 베트남 호치민의 한 호텔에서 인턴을 했다. 호텔 일이라고 해 봤자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안내하고 서빙도 하는 일이었다. 스타트업에서 일할 땐 일이 많아 직장 근처에서 친구와 자취를 했다. 아이가 호텔에서 일할 때 아내와 호치민으로 찾아갔다. 아이가 일하는 호텔에서 묵었고 아이가 야무지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이는 졸업 후 진로 문제로 고민하더니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제 힘으로 원하는 대기업 무역상사의 원하는 부문에 합격했다. 특히 면접 점수가 우수했다고 한다. 아이는 여태 영어권 국가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지만 영어도 잘한다.

 되고 싶은 게 없었어도 때가 되니 아이는 어엿한 직업인이 되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없었지만 지금은 직장 상사와 스펙 좋은 동기들에게서 인정받는 3년차 직장인이다.

 결국 내 생각이 보기 좋게 틀렸다. 기분 좋게 미끄러진 기분이다. 어쩌면 평생 학벌 콤플렉스를 벗지 못하는 학벌주의자 꼬리표를 떼지 못할지 모르지만 출신학교로,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새삼 다짐한다.  


작가의 이전글 18. 부양하고 부양 못 받는 낀 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