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고 게으른 리더를 위하여 ... 모든 아이디어는 등가
똑똑하고 게으른 지도자.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자신의 저서인 <초격차>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주장한 리더십 스타일이다. 최악의 리더는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멍부형’이다. 멍청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도 부지런하기에 바로 실행에 옮겨 결정을 바로잡을 기회조차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똑똑한가-멍청한가, 부지런한가-게으른가 이 두 축으로 리더를 유형화하는 리더십론은 오래 전 신문사 시절에 처음 접했다. 권 회장은 중소기업 리더로 적합한 똑부형에 대해서는 본인은 성과를 내 보상을 받지만 조직의 발전엔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똑부형 리더는 모든 정사를 친히 챙기는 임금처럼 자칫 만기친람형이 되기 십상이다.
똑똑한 리더에 대해서는 사실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누가 멍청한 리더 밑에서 일하려 들겠는가? 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의 문제는 위임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기여로 조직이 굴러가니 사람을 키울 생각도 별로 하지 않는다. 신문사 시절 편집국장을 지낸 어느 선배가 펴는 데스크론에 공감했다. 신문사 부장은 자기가 맡은 지면을 잘 만들뿐더러 후배 부원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면만 잘 만든다면 일을 절반만 하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조직으로 만들려면 후배들을 잘 키워야 한다.
자기가 더 잘하는 일을 아랫사람에게 위임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안랩 이사회 의장일 때 인터뷰하면서 들은 이야기다.
‘구성원이 열 명일 땐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장이 모두 알아야 한다. 단돈 10원 지출하는 것도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에 관여해야 경영을 잘할 수 있다. 그런데 구성원이 30명쯤 되면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잘하는 일을 넘기려니 고통스러웠다. 50명이 되자 전략이 필요했다. 100명이 되자 임원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300명을 넘어서니 CEO가 조직의 디자이너가 되어 각종 시스템을 설계해야 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회사가 커지면서 일이 계속 바뀌었고 그 일이 익숙해질 만하면 새 일을 시작해야 했죠. 마치 어느 날부터 멀쩡한 오른손 두고 왼손을 써야 하는 오른손잡이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불편하고 괴로워도 이 기간을 잘 견뎌야 회사가 잘 됩니다. 못 견디면 회사가 망하는 거죠.”
신문사 시사지 법인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여러 해 후배 대표들 밑에서 일했다. 기자 출신 대표들 중엔 대표 일보다 익숙한 데스크 워크를 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포스트가 바뀌었는 데도 롤 시프트를 못하고 후배 편집장과 역할 갈등을 빚었다. 기자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몰라 헤맸다.
그런가 하면 대표로서 자신의 재임 중 무엇인가 바꾸고 싶어 했다. 나는 이들에게 바꾸기 전에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꿔선 안 될 것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보라고 권했다.
4개 시사지를 총괄하는 대표 자리에 있던 한 선배는 회의 때 편집장들에게 이런 기사를 써 봐라, 저런 기사를 써 봐라 주문을 했다. 직속 선배 대신 회의에 들어갔다가 입바른 소리를 했다.
“선배는 나이, 사회경제적 지위 등 어떤 기준에서도 평균적인 독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오더를 하지 마세요.”
후배들에게는 “모든 아이디어는 등가”라고 말했다. 경험 많은 편집간부가 낸 아이디어라고 해서 더 밸류가 높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똑똑한 리더가 부지런하기보다 게을러야 하는 건 그래야 구성원들을 제대로 돌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가리개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서는 주변을 돌아볼 수가 없다. 부장이 모니터 화면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때로는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 부원들 면면을 살펴야 무슨 걱정,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보인다.
나는 어릴 적부터 리더가 되고 싶어 했다. 어쩌다 리더가 되고 보니 그 자리가 달콤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처음 반장이 됐을 땐 담임이 지명을 했다. 수업 태도가 좋아 지명을 받은 듯했고 앞에 나가, 어이없게도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당선소감을 발표했다. 3학년 때 전학을 갔는데 그 해 말고는 초등학교 시절 줄곧 반장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반장 투표에서 차점자로 부반장이 됐다. 담임이 끼어들어 다른 친구를 부반장 시키자고 제안했다. 치맛바람의 영향인 듯했다. 반에서 반장-부반장-회장-부회장이 ‘권력’ 서열이던 시절이었다. 1학년 때 부반장을 해 2학년 땐 반장이 되고 싶었는데 웬걸 반 회장을 하게 된 것이다.
어린 마음에 내가 무명 인사로 전락하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 해 말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 나갔다. 미션스쿨이라 정식 직함은 기독학생회장이었다. 그해 겨울 강당에 모인 동기들 앞에서 나는 정견발표를 했다. 친구가 찬조 연설도 했다. 창밖엔 눈발이 날렸다. 경쟁 상대는 2년 연속 반장을 한 친구였지만 내가 당선했다.
고등학교 때도 반장 또는 부반장을 했다. 방송반장도 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엔 과 대표, 서클 회장을 했다. 심지어 군 입대 후엔 60명쯤 되는 공군본부 동기들 중 동기회장을 지냈다. 정작 회사 다닐 때 맡은 첫 보직인 편집장 자리는 100일을 채우지 못했다.
나는 편집장을 불명예스럽게 마친 후 정년퇴직 때까지 11년 간 기사를 썼다. 퇴직 당시 선후배들이 만들어준 패.
나를 편집장으로 발탁한 선배와는 오래 함께 일해 서로 잘 알았다. 나의 성향과 기질을 아는 그는 당시 편집국장으로 있던 다른 선배에게 나를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직속상관도 아닌 편집국장이 찾아 방으로 갔다. 고교 선배이기도 했던 그는 세 가지를 당부했다. 그 중 하나가 “윗사람과 잘 지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많이 미숙했다. 나는 편집장에서 해임됐고, 40대 중반에 무능의 상징과도 같은 대기발령을 받았다. 편집장 시절 팀장을 맡긴 후배가 말했다.
“선배는 일은 잘하는데 정무감각이 떨어져요.”
개혁을 하기 위해서도 자리는 지켜야 했다. 이상과 눈앞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이고 호시우행 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경영 논리로 ‘기사 거래’라는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는 상사와 충돌했다. 파열음이 나자 위에서 나를 쳤다. 정치력이 부족했던 내 탓으로 받아들인다. 이상을 실현하려면 긴 호흡으로 정치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5공화국의 마지막 경제부총리를 지낸 고 정인용은 전두환 정부에서 재무장관 등 여섯 자리에 중용됐다. 나는 중앙일보에 정 부총리의 회고록을 연재하고 그와 공저를 냈다. 전두환을 전혀 몰랐던 정 부총리는 훗날 어떻게 자신을 기용하게 됐느냐고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나 역시 당신을 어떻게 알았겠소? 일을 시켜 보니까 우직하게 잘하고 다른 자리를 또 맡겼더니 잘하고,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 게지.”
맡은 일을 제대로 감당할 때 더 중요한 일이 주어지는 법이다. 정인용은 1986년 봄 재무장관 시절 부실기업 정리를 했다. 부실기업 처리 대책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간 그는 다른 때처럼 만년필부터 꺼내드는 전두환에게 말했다.
“각하, 사인하지 마십시오. 보고는 다 드리겠지만, 제 책임 하에 처리하겠습니다.”
대통령이 부실기업 정리에 관여할 경우 정치 스캔들로 비화할 것을 우려한 끝에 한 건의였다. 그는 차관 등 결재 라인에 있던 재무부 간부들에게도 사인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전도유망한 후배들이 나중에 다치지 않도록 하려는 그의 배려였다.
이 서류엔 그래서 부총리 시절 그의 사인밖에 없다. 그의 회고록 제목이 “각하, 사인하지 마십시오”인 까닭이다.
정 전 부총리는 관운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정작 그는 “관운이란 윗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최대의 관운을 열어 준 사람은 전두환이었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재무부 임시서기부터 한 직업 공무원으로서 정부를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편집장을 잘린 뒤로 회사는 나에게 일절 보직을 맡기지 않았다. 55세에 부국장 전문기자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나는 경제전문기자, 편집위원, 경영전문기자로 있으면서 꾸준히 기사를 썼다. 어쩌면 그랬기에 퇴직 후 만 7년째 인터뷰 전문 프리랜서로 몇 곳에 기사를 쓰는지도 모른다.
훗날 이런 저런 계제에 나는 동창회 등 다른 조직에서 리더를 맡았다. 그때마다 불온했기에 불운했던 최단명 편집장 경험을 돌아봤다. 우선 전보다 충실히 공유하고 긴밀히 소통하려 애썼다. 정무감각은 여전히 떨어지지만 도덕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정치력을 발휘하려 노력했다. 그래도 타고난 기질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