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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 Nov 21. 2020

어디서나 나는 낯선 사람이다

슈베르트 방랑자에 대하여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 아니다. 처음으로 누굴 만나도 대화를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점점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그냥 그 사람과의 시간을 때우는 데에만 급급할 뿐, 진심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대화는 하고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나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대한 갖지 않는다. 만나더라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내 개인적인 정보는 최대한 흘러나가지 않게, 대화의 중심에서 벗어난 화제에 대해서만 빙빙 돌려 말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낯설게 느껴진다. 상대와 어색해지는 순간을 견디기 싫어 어떻게서든 대화를 이어나가지만, 그 와중에 나를 드러내기를 끔직하게 싫어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그저 낯설지만 애잔하기도 하다.


그렇게 내 모습을 드러내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을 때,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을 듣게 되었다. 내가 슈베르트 방랑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웅장한 스케일의 화려한 기교들 속에서 외로운 감정이 느껴지는 그 전체적인 곡의 흐름이 마치 지금의 나 같았다. 가곡의 가사에서도 느껴지듯, 타인들이 하는 말은 공허하게 울리고 나는 어디에 있건 이방인이라는 구절이 너무나 공감이 된다. 슈미트의 시는 슈베르트의 가곡과 방랑자 환상곡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시의 구절이 고스란히 음악에 담겨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이 환상곡을 들으며 알게 되었다.


Die Sonne dünkt mich hier so kalt,

Die Blüte welk, das Leben alt,

Und was sie reden, leerer Schall;

Ich bin ein Fremdling überall.


이곳의 태양은 내게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꽃은 시들고. 삶은 오래되고,

그들이 하는 말은 공허하게 울린다.

나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다.


슈베르트 ‘방랑자(Der Wanderer)’ D.489 (Schmidt)

by Georg Philipp Schmidt von Lübeck (1766-1849)의 일부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자를 연주했던 성진 초의 리사이틀, 슈베르트와 성진의 싸인과 함께


슈베르트는 가곡 방랑자 2악장 주제 선율을 모티브로 삼아 1악장을 비롯한 나머지 악장들에서 순환하여 사용하고 있다. 방랑자는 4악장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휴식없이 연이어 연주하게 되어있다. 나는 방랑자 1악장을 치고 있고, 그 중 나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은 1악장 100마디-104마디 부분이다. 동일한 패시지가 연속적으로 나타나지만, 나타날 때마다 화성이 두 박마다 바뀌면서 진행되어 도약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이제야 1악장 악보를 전부 숙지한 나는, 피아노를 칠 때 연주자의 스타일과 성격이 느껴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새로 바뀐 피아노 선생님은 피아노 치는 것만 봐도 내 성격이 어떤지 유추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정확하게 천천히 한 마디씩 치는 것보단, 조금 어설프더라도 모든 악보를 빨리 숙지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는 편이다. 아직 실력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악의 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제 처음부터 한 음 한 음 꼼꼼하게 치고 있다.


방랑자를 들으며 가끔 집에 있는 레드 와인에 생라면을 뿌셔 먹곤 하는데, 그렇게 이질적인 조합들이 너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그 순간이 나는 너무 좋다. 낯선 조합이 주는 안정감이 바로 순간의 방랑이 주는 묘미가 아닐까. 머릿 속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그리고 조성진의 리사이틀 현장을 기억하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낯섬을 느끼며.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잠시, 환상곡 연주가 끝나면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또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순간의 행복이라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낯설다는 감정을 슈베르트 방랑지 환상곡에 꾹꾹 담아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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