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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 Aug 15. 2023

연습실로 향하는 발걸음에 수놓아진 이야기

갖가지의 일상을 담고 연습실로 향하는 발걸음

건강하게 먹고자 할 때 꼭 과일을 찾게 된다. 뭔가 괜히 리프레시해지는 느낌이랄까.


오늘은 출근하지 않는 화요일이었다. 오전에는 건강검진을 받고, 잠깐 카페에 들러 아이패드를 켠다. 카페에서 가장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가장 구석 자리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용히 무언가 끄적일 수 있는 이 자리가 유난히 좋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에어팟에서 들려오는 클래식을 멍하니 듣고 있으면 피아노 학원에 가겠다는 마음이 점점 옅어진다. 그냥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달까. 직장인이 되고 나서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오랜만에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이 시간이 가장 사치스러운 하루라는 것이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보통의 연차날엔 피아노 학원으로 향한다. 취미를 오래 지속하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교육열이라는 명목 하에 조금 더 누렸다면 좋았을 것을. 일에 쫓기고, 나만의 시간이 점점 줄어드니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연차날 피아노 학원을 치러 가는 내 모습에 심취한 걸까? 아님 할 게 없어서 피아노를 치러 가는 건가? 뭐.. 어찌 되었건 좋지. 피아노를 치러 가니까. 결국 카페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피아노 학원을 갈 채비를 한다. 연습할 곡의 레코딩을 들으며 마치 피아니스트에 빙의한 듯 상상 속의 나는 이미 완벽한 연주가이다. 그런 잠깐의 상상으로 연습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내 가볍고 즐겁다.


마지막 나름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드비쉬 달빛의 끝자락


 3년 간, 피아노 학원을 다닌 끝에 망설이지 않고 나와 가장 잘 맞는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는 방이 어딘지 알게 되었다. 처음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을 때, 어떤 피아노가 나와 잘 맞는지조차 모른 채 그냥 앉아서 건반을 두드릴 뿐이었다. 아직 손가락 끝이 단단하지 않아 비교적 건반이 가볍고, 또랑한 소리를 내는 피아노를 선호한다. 건반이 묵직하고, 울림이 큰 피아노가 실력자들이 즐겨 찾는 피아노라, 숨은 피아노 계의 무림고수들은 건반이 낭창거리지 않는 연습실 찾기에 여념이 없다. 레슨실의 피아노가  비교적 건반이 무겁고, 소리가 묵직한 편인데 레슨을 받다 이내 투정을 부린다. “선생님, 분명 연습실에서는 정말 잘 쳐졌거든요? 레슨실만 오면 왜 이렇게 안 쳐질까요?” 나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듯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다들 그러세요. 연습을 더 하세요!“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레슨을 이어간다.

 좌우지간 아직 손 끝이 단단하지 못한 내가 기분 좋게 피아노 학원을 갔는데 나의 최애 연습실에서 누군가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는 남들도 좋아하는 피아노겠지,라고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도 기분이 다운되어 비어있는 연습실들을 한참 배회한다. 또 다른 차애 피아노 연습실이 생기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끝없이 탐험하지만 마음에 드는 피아노를 찾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피아니스트들도 리사이틀 전 곡에 맞는, 자신과 맞는 피아노를 고르는데 신중한 것과 같이 아마추어들에게도 그런 의식이 존재한다. 물론, 그중에서도 내가 조금 더 까다로운 편인 것 같긴 하다.


 

 취중 피아노를 즐겨 치진 않지만, 가끔 터무니없이 회사 일이 스트레스를 받고 허기가 지는 날엔 반주를 하고 연습실로 향하는 날이 있다. 몇 없는 일상이긴 하지만, 혼술을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짜릿함이 있다. 약간의 취기가 가져다주는 무모함, 조금 더 과감해지는 터치, 약간 상기된 감정까지. 하지만 술을 마신 상태에선 끝내 연습할수록 손 끝의 힘은 더 빠져서 결국 파멸이다. 후반부로 갔을 땐 긴장감이 하나도 없이 고무줄 다 늘어난 바지처럼 손가락을 흐물거리며 건반을 뚱당거리고 있다. 바람빠진 풍선마냥 흐물거려도, 마치 내 기분은 일류 피아니스트니까. 감정 폭발하니까! 그런대로 재밌는 연습실에서의 에피소드다.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갔는데 눈 앞에 있는 책을 읽으며 인상깊은 페이지를 하나 찍어보았다. 이 날도 아마 미용실에 갔다 잠깐 남는 시간에 연습실을 들렀던 기억이 있다. 이 페이지를 보며 내가 연습실에 남긴 기록은 무엇이 있나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그것은 여태까지 내가 쳤던 (혹은 치고자 했던) 악보 모음집이 아닐까? 내 악보 모음집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얽혀져 있는데 그냥 쳐보고 싶어서 뽑아놓은 곡, 선생님이 추천해주셔서 시작한 곡, 배우고자 마음 먹었는데 중도 포기한 곡 등 에피소드들이 상당하다. 그 악보만 쳐다봐도 내가 왜 이 악보를 선택했는지 마냥 기억이 난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모든 곡들을 내 손 끝에 새길 수 없어 통탄스럽지만, 그래도 그렇게 추억을 쌓아가는게. 나름의 재미가 있다.  조금 더 읽다 “사소하고 전시할만한 것들을 기록되었지만, 기록하지 않아도 몸 속 깊은 곳에 남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들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내 피아노 일상도 ‘전시할만한 것들’ 중 하나로 치부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본다. 하지만 피아노에 대한 내 열정과 연주 스킬 발전은 내 손가락 끝에 남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피아노 학원 연습실에 새겨진 내 기억, 2권의 악보모음집과 2권의 책에 새겨진 나의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이 계속 되서 나에게로부터 남겨지고 기록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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