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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 Sep 12. 2020

피아노 치는 법을 잊지 못하는 이유

기억의 위대함, 그리고 오래된 피아노 조율

 코로나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고 있지만 내 직무의 특성상 외근이 필수 불가결하다. 준비한 상품들이 10월에 사고 없이 출시되기 위해서는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마지막 최종 상태를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최대한 마스크를 벗지 않고, 손을 열심히 씻으며 최종 생산품을 컨펌하고 나는 사무실에서처럼 노트북을 켜고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자료를 만들기 위해 엑셀 창을 켜고 수식을 걸려고 하던 찰나에, 갑자기 함수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저번 주에도 썼던 함수 같은데, 외웠던 것이 분명한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결국 구글창을 켜고 검색을 해서 함수 이름을 알아내는 데 10초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으나,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어찌 함수를 사용하여 일을 하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자주 쓰는 함수도 이렇게 깜빡하는데 왜 피아노를 치는 방법은 잊혀지지 않았을까? 피아노를 치지 않았던 시간이 못해도 15년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을 때 바이엘부터 쳐야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했지만, 피아노에 손을 올리는 순간 손가락이 바로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 치지 않아서 손가락이 굳고 악보를 보는 속도가 느려졌을 뿐 치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학교 때 공부했던 교직과정에서도 기억 강화 규칙과 관련하여 교육과 학습효과에 대해 배웠던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았아서 검색을 해보았다.


 잊혀지지 않았던 이유는 장기기억 때문이었는데, 미 카네기멜론대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존 앤더슨(John Anderson) 박사에 의해 정립된 개념이다. 앤더슨 박사는 장기 기억은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하였고 그것은 바로 '선언적 기억 (declarative memory)’과 ‘절차적 기억(procedural memory)’이다. 선언적 기억은 정적 형태의 기억으로서 ‘무엇을 아는지(knowing what)’에 대한 기억인 반면, 절차적 기억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Knowing how'에 대한 기억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 자전거를 타는 것 등 일종의 동적인 기억들이 절차적 기억으로 분류된다. 이는 내가 예상했던 바와 전혀 달랐다. 피아노를 치는 행위가 동적 기억이었다니! 쇼킹했다. 나는 내가 악보의 음표들을 인지하고 정확히 건반을 누르는 것이 앎의 행위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연습과 반복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유년시절 울며 겨자 먹기로 피아노를 반복적으로 쳤던 연습들이 절차기억화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잘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다시 피아노'의 맨 앞 장에서 나오듯, 피아노 연습을 강요한 엄마의 의도는 저자의 어머니와는 다르나 덕분에 오랜 공백 기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준 엄마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마도 1998년도에 구매한 약 20년이 넘은 우리집 피아노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피아노 학원과 필라테스 센터는 잠시 문을 닫았다. 나의 절차기억을 되살려 한창 피아노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데..! 이렇게 코로나 앞에서 내 열정이 무너질 수 없지. 집에 있던 옛날 피아노 뚜껑을 다시 열었다. 오랜 시간 쓰지 않아서 그런지 소리가 좋지 않았고, 건반도 잘 눌리지 않았다. 몇 번 치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조율을 맡겼다. 약 2시간 30분 동안의 대장정 끝에 피아노 조율이 끝났다. 처음으로 조율사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왜 집에 있는 피아노는 학원에 있는 피아노와 같은 소리가 나지 않는지 물어봤는데 가장 큰 차이는 피아노 높이의 문제였다. 피아노 안의 현이 길수록 크고 풍성한 소리를 낼 수 있다. 통상적인 업라이트 피아노 높이가 130cm 정도라면, 우리 집에 있는 피아노 높이는 약 110cm 정도밖에 되지 않아 소리가 크지 않았다. 또, 그랜드 피아노의 향판은 현의 하단에 있고 하단으로부터 소리가 울려 소리가 직접 들리는 반면 업라이트 피아노는 뒷면에 향판이 붙여져 있어 소리가 간접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집에 있던 피아노는 입문자를 위한 가정용 피아노였다. 조율사분이 "연주자가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 이 피아노로는 힘들다."라는 결론을 내려주시고 우리 집을 떠났다.


악보쇼핑 1. 쇼팽 에튀드 OP.10, 12개 모음집 2. 슈베르트 방랑자 판타지 外


 조율사분이 떠나고, 나를 연주자라고 칭해주신 것에 감동 아닌 감동을 받았다. (작은 것에 의미 부여하고 감동받는 편이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모두 연주자이긴 하나, 타인에게서 연주자라는 말을 들으니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고, 예술적 감성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조율 하고 나서 피아노 소리가 한층 나아져 나름 연습할 만은 하다만.. 하다만..? 그냥 치고 있다: 피아노 학원에 악보를 다 두고와 집에 있는 악보가 폴로네이즈 53번 밖에 없길래, 원래 치고 있던 악보들을 직접 사 연습하고 있다. 비록 층간 소음 때문에 30분~50분 사이밖에 연습을 못하지만 그 마저도 행복한 피아노 초보자이다. 이제는 작곡자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악보 공부를 해볼 예정이다. 내 피아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조금만 더 오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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