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올드보이>의 패러디, 그리고 트위치나 유튜브 등 인터넷 방송의 각종 밈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첫번째 의문: <오징어 게임> 패러디, 언제까지 봐야 하는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흥하자 너도나도 이 흥행의 콩고물을 맛보려고 혈안이다. 각종 패러디가 잔뜩 튀어나왔다. 출판사 현암사에서는 자사의 책을 홍보하는 이벤트로 ‘서평단 게임’을 개최했다.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서는 “오징어보다 저렴한 <쭈꾸미 게임>”(오징어: 마리당 7500원 / 쭈꾸미: 마리당 3000원)을 제작했다. 게임 스트리머 우왁굳은 오징어 게임을 재현하고 재창조한 ‘마인크래프트’를 플레이하기도 했다(우승 상금은 도지코인 500개).
현암사에서 개최한 서평단 게임.
이런 패러디에 법적인 문제는 없을까? 혹시 지식재산권(저작권) 침해가 아닐까? 런닝맨에서는 “<오징어 게임>측의 사전 동의를 구한 후” 쭈꾸미 게임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외에 다른 무수한 패러디들에는 사전에 동의를 구했다는 고지가 없고, 실제로 사용 허락을 받지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게 불법은 아닐 터다. 저작권법 제35조의5(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에 따르면 “저작자의 정당한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다.” 즉, 적당한 패러디나 인용은 허용한다.
우왁굳이 플레이한 마인크래프트 오징어 게임.
문제가 된 사례도 있다. 최근 타오바오, 티몰 등 중국 온라인 유통업체에서 <오징어 게임> 관련 굿즈를 불법으로 판매하던 업체들이 퇴출됐다. 굿즈로는 프런트맨이나 진행요원 캐릭터 인형이 달린 키링, 참가자들의 의상과 유사한 추리닝 등이 있었다. 넷플릭스는 다수의 온라인 쇼핑 업체에 공식 항의 메일을 보내며,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는 제품이 무단으로 유통되면 해당 유통 업체에게 피해 규모에 상당한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주로 넷플릭스의 이름을 달아 공식 상품으로 홍보하거나 드라마 상표, 포스터, 캡처 이미지 등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중국에서 유통되었던 불법 굿즈. 현재 공식 굿즈는 Netflix.shop 또는 무신사에서 구입할 수 있다.
결론은 이렇다.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있게) 패러디하면 괜찮다! 하지만 원작을 비평 혹은 풍자하지 않고 그대로 모방하거나, 존중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원작의 경제적 가치를 침해·훼손한다면 문제가 된다.
개인적으로, 이제 패러디는 그만 보고 싶다. 나는 원작을 보기 전부터 숱한 패러디를 접하며 애시당초 이 콘텐츠 자체에 질린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오징어 게임>이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만큼 재밌진 않았다. 무분별한 패러디가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1절만 하지, 2절, 3절에 ‘뇌절’까지 쳐버리니 흥이 다 죽어버린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두번째 의문: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은 ‘알잘딱’인가, ‘뇌절’인가?
2021년 11월 5일, 국일미디어 출판사에서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이라는 희한한 책이 나왔다. 최신 유행에 발가락만이라도 담가서 한몫 챙기겠다는 심산이 빤히 보인다. 살짝 괘씸하기도 하거니와 인용이 너무 과하여 적당한 선을 넘은 듯하다. 우선 ‘보이스 게임’, ‘오징어 짬뽕’ 등등 다른 패러디들이 콘텐츠 이름을 독특하게 변용하는 가운데 이 책은 “오징어게임”이라는 이름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제목에 넣었다(띄어쓰기만 다르다). 또한 표지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인물의 그림은 드라마 주인공 성기훈의 사진을 똑같이 베꼈다. <오징어 게임>을 이렇게 이용해도 괜찮을까?
왼쪽이 책 표지의 그림, 오른쪽이 드라마 주인공의 사진이다.
좀더 쩨쩨하게 지적을 해보자면, 표지 아래의 띠지처럼 보이는 부분에 그려진 오징어 놀이 기호도 눈에 띈다. 예전에 우리나라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놀이 ‘개념’을 저작물로 인정하긴 어렵겠지만, 그 개념을 동그라미·세모·네모 조합으로 형상화한 ‘디자인’은 어느 정도 <오징어 게임>만의 고유성이 있지 않을까? 또한 2도 인쇄된 본문에는 흑백으로 딱지치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줄다리기, 설탕 뽑기 등등 기호가 그려져 있다. 제목부터 노골적이지만 이런 기호들 역시 원작 드라마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이런 정도라면 책이 나오기 전에 넷플릭스(저작권자), 싸이런픽쳐스(제작자) 혹은 황동혁 감독과의 교섭이 있었을 것으로(있어야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책 본문에 그려진 기호들. 이 외에도 카드 명함, 구슬치기, 징검다리 기호가 차례 혹은 도비라 페이지에 사용되었다.
엄밀히 말해 이걸 저작권법 위반이라고 볼 수는 없다. 책에 드라마 캡처 이미지나 포스터를 그대로 복제해 넣지도 않았고, 출판사가 넷플릭스 이름을 내걸어 상품을 공식 굿즈로 팔지도 않았으며, 이런저런 기호들이 원작에서 사용된 걸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분명 패러디로서 재창조하긴 했다). 다만 ‘부정경쟁방지법’에는 저촉될지도 모른다. 이 법률 제2조에 따르면 “타인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 등을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업을 위하여 무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타인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책 뒤표지에는 마키아벨리의 얼굴이 설탕 뽑기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건 법이나 윤리 이전에 ‘체면’의 문제다. 나는 적절히 모방하고 편집해서 원작의 아우라를 알잘딱 담은 패러디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딱히 <오징어 게임>과 큰 관련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한번 엮어서 이득을 보려다가 1절·2절·3절·뇌절하는 것들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마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무수히 붙는 해시태그 같다. #squidgame #오징어 #게임 #오징어게임 #오겜 #오겜무 #넷플릭스 #드라마 #딱지치기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영희 #철수와영희 #철이와미애 …….
과연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은 어느 쪽일까? 알잘딱일까, 뇌절일까? 한번 알아보자.
침묵하는 주인공이 정의 쪽에 섰다고 하더라도 말이 많은 인간에게 언젠가는 당하고 만다. <오징어게임> 속 떠버리 캐릭터는 바로 주인공 기훈 자신이었다. 그가 자신의 세력을 규합했을 때도 덕수의 악행을 공론화하여 그들을 경계대상으로 만들었을 때도 그의 무기는 말이었다. 그것이 현대 영웅의 진실한 모습이다. 바야흐로 싸우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말을 잘한다. 투쟁과 말은 동의어라고 해도 무방한 정도다. (113쪽)
<오징어게임>을 관전하는 VIP들이 언제나 미식을 즐기고 있던 것을 기억하는가. 미식은 승리자의 것이며 또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것은 강자에게만 허용되는 다시없는 쾌락인 동시에 온갖 싸움에 필요한 에너지를 축적하는 일이다. 빈곤한 식생활은 정신과 육체를 빈약하게 만든다. 빈곤은 패자의 용어이지 승자, 강자의 언어일 수 없다. 미식을 즐기자. (219쪽)
흐음… 그만 알아보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아저씨가 <오징어 게임>을 봤다면 어떤 감상이 나왔을까?
책을 읽기 전, 나는 조금이나마 기대를 품었었다. 좋게 생각하자! 제목과 디자인이 조금 싼티 나지만, 내용은 훌륭할 수도 있잖아? 자본주의 체계 속 강자 생존의 처세론을 제시하는 자기계발서이자, 마키아벨리즘을 접목한 드라마 및 사회 비평 인문서일지도 몰라. 내심 두근거리며 책을 샀다. 그러나 알라딘 당일배송 택배로 받아보고서 나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책 정가는 1만 3800원, 아… 나는 내 피 같은 돈을 땅에 내다버렸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돈지랄이 쓸데없는 짓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책이 브런치 글의 소재가 되었으니 좋게 생각하자.
나는 오징어의 몸통을 씹고 싶었는데 정작 책은 오징어 껍질만 둘렀다. 드라마의 내용을 겉핥기로 인용하며 억지로 마키아벨리즘을 끼워맞춘다. 책이 기대와 달리 부실할 수밖에 없는 게, 이 책은 1984년 국일문학사(국일미디어의 1982년 상호)에서 나온 『배짱이 없는 놈은 죽어라』의 개정판이기 때문이다. 2021년 드라마가 방영되기 무려 37년 전에, 2008년 감독이 시나리오를 처음 구상하기 24년 전에 한국에 나온 책이다. 옮긴이 김진욱이 쓴 프롤로그에 따르면 “이번 개정판에서는 “국가의 발전과 인민의 복리 증진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마키아벨리즘에 <오징어게임>의 이야기를 접목하였다.”
이 책에 적어도 ‘배짱’만큼은 있다.
이 책이 정확히 1984년에 나왔는지도 확실치 않다.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단행본 검색에서는 발행연도가 1984년, 1989년, 1991년, 1992년으로 다양하게 나오며,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검색에서는 발행일이 1997년 5월 30일로 나온다. 각 검색 결과마다 페이지 수도 조금씩 다르다. 어디서는 224쪽, 어디서는 327쪽, 2021년에 나온(내가 구입한) ‘오징어게임’ 버전은 228쪽이다. 1984년 9월에 발간된 잡지 『건강다이제스트』 소망호에 이 책이 언급되므로, 일단 1984년에 초판이 나오고 그 이후로 계속 개정판이 나왔던 게 아닐까 싶다.
『건강다이제스트』 1984년 9월 소망호. ‘인생전략 인간경영’ 키워드로 “배짱이 없는 놈은 죽어라(빅톨 비안코)”를 소개한다.
저자의 주장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시대착오적이고 극단적이다. “힘과 능력이 있는 자가 최고의 여자를 차지한다”, “도둑질 없이는 승리자가 될 수 없다”, “부모의 계산된 애정에 속지 말라” 등등. 역자는 이렇게 당부한다. 이를 악으로의 권유로 잘못 받아들이면 안 되며 “전반에 걸쳐 있는 반어적, 역설적 의미”를 헤아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모든 말을 거꾸로 이해하려고 해도 오히려 약이 오른다. 마치 상대에게 잔뜩 악담을 퍼붓고 나서 마지막에 “라고 할 뻔~”이라며 잘못을 얼버무리는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성 풍속은 최근 급속한 전개를 보여왔다. 그 핵심은 비정상적인 성(abnormal sex)의 범람이다. 동성애를 비롯해서 사디즘, 마조히즘, 그리고 미국에서 건너온 스와핑(swapping)이라고 하는 부부 교환의 성행위까지 등장하였다. … 성은 우선 종(鍾)을 보존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하여 인간은 그것을 쾌락이라는 유희의 면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그 대상은 언제나 이성(理性)이었으며, 동성에 대한 사랑은 고작 이성에 대한 물리적 부(不)자유를 보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52쪽)
다른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읽었을까? 11월 1일 국일미디어 인스타그램에서 이 책의 서평단 20명을 모집했길래 한번 찾아봤다. 도서를 제공받은 사람들은 서평단이니까 어쩔 수 없이 좋은 말만 했을 텐데, “장해물 따위는 모두 찍어누르는 강한 카리스마에 대한 책”이라는 평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호평 일색인 리뷰어들이 2021년 디플롯 출판사에서 나온 과학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해졌다.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나만 당할 수 없지).
세번째 의문: 빅토 비안코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이 책은 국내서가 아니라 번역서다. 여윽시 대단한 K-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열풍은 전 세계적!! 외국에서 이런 책도 나온단 말인가!!!! 위대한 국뽕이 차오르기도 잠시, 만약 이게 정말로 외서라면 내가 앞서 지적한 법적·도의적·미적 책임을 국내 출판사에 물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일미디어는 그저 외서를 번역하여 출간했을 뿐 저작권법이니 부정경쟁방지법과 관련된 사항은 이미 원서 출판사가 다 해결해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서는 무엇이며, 누가 썼으며,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것저것 조사하다 보니 치명적인 결점이 더욱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내용의 좋고 나쁨을 차치하고 이 책은 ‘출판 편집’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 앞서 나는 이게 1984년 책의 개정판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인터넷 검색으로 겨우 알아낸 정보다. 판권면에는 이렇게만 적혀 있다.
초판 1쇄 인쇄: 2021년 10월 28일
초판 1쇄 발행: 2021년 11월 5일
보통 개정판이라 하면 판권면에 다음과 같이 정보를 적는 게 원칙이다(『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개정증보판 참고).
초판 1쇄 펴냄: 2010년 2월 26일
초판 10쇄 펴냄: 2015년 8월 19일
개정증보판 1쇄 펴냄: 2016년 8월 10일
개정증보판 9쇄 펴냄: 2021년 7월 12일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은 꽤나 옛날에 출간됐는데, 그저 ‘2021년 발행’이라고만 표시하여 최근에 나온 책으로 둔갑했다. “오징어게임”이라고 제목을 달았으니 오늘날의 세태를 잘 반영한 듯도 보였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나는 출판사가 일부러 정보를 누락하여 이 책을 트렌디하게 보이도록 눈속임을 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킹리적 갓심)이 들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등록된 서지정보. 저자가 1938년생이라는 점, 원표제가 “Satanic bible”이라는 점을 유념하자.
이상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판권면에는 지은이·옮긴이·펴낸이 정보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지은이: 빅토 비안코
옮긴이: 김진욱
펴낸이: 이종문(李從聞)
펴낸곳: (주)국일미디어
왜 펴낸이의 이름에만 한자가 병기되어 있을까? 지은이와 옮긴이 이름 옆에는 따로 영자나 한자가 적혀 있지 않은데, 무슨 원칙으로 이렇게 표기했는지 의뭉스럽다. 모든 이름 옆에 병기해주든가, 아니면 아예 병기하지 말든가. 펴낸이 “이종문” 옆에만 “(李從聞)”이라고 추가 정보를 붙임으로써 이 사람이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저자인데 말이다. 『돈키호테』의 저자는 모르고 엮은이 김경식 씨만 아는 무한상사 길 인턴이 된 것 같은 심경이다.
국일미디어의 편집자라면 이런 비판이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세상에 어떤 독자가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씁니까? 말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그럼, 자네가 책을 개떡같이 만든 건 말이 되고?” 이름 병기의 불균형은 이 책에서 판권면 말고 어디서도 지은이나 옮긴이의 정보를 찾을 수 없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다른 책들에는 주로 앞날개(표2)에 있는 저·역자 소개글이 여기엔 없다. 뒷날개(표3)에도 없고 면지에도 없다. 도대체 누가 이 책을 지었고 누가 이 책을 옮겼는지 알 길이 없는 셈이다. 독자에게 제공되는 건 “빅토 비안코”와 “김진욱”이라는 한글 이름뿐이다.
인터넷 서점에 등록된 저·역자 소개글. 여기서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우선 옮긴이부터 살펴보자. 세상에 ‘김진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둘인가? 나는 이 책을 정확히 누가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원출판사에서 『왕초보도 쉬운 수입무역』(2021)을 지은 김진욱(관세법인네오 대표)인지, 문학사상사에서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2015)을 옮긴 김진욱(한국교재 개발공사 주간)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편집자는 옮긴이 ‘김진욱’의 대표적인 저·역서를 포함한 소개글을 책에 싣거나, 최소한 판권면에서 이름 옆에 한자라도 병기해주어야 했다. 쓸데없이 펴낸이를 강조하지 말고.
지은이와 관련해서는 훨씬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에는 영문(원문) 판권면이 없다! 번역서에는 한글 판권면 외에 영문 판권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편집자는 책에 영문 판권면을 만들어서 원서 제목, 지은이, 원서 출간연도, 원서 출판사와 중계 에이전시 정보를 써넣어야 한다. 바람직한 예시는 아래 그림과 같다(『포유류의 번식―암컷 관점』 참고).
바람직한 영문 판권면.
도대체 저자는 누구인가? 프롤로그에는 그의 이름이 “빅토 비안코(Victor Bianco)”라고 언급된다. 국일미디어에서는 “수백만 부가 팔린 미국의 베스트셀러!”라며 책을 홍보하는데, 그렇담 저자는 미국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표기가 이상하다.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Victor는 미국식으로 ‘빅터’, 프랑스식으로 ‘빅토르’, 독일식으로 ‘빅토어’라고 적어야 한다. 원칙에 맞지 않은 표기 ‘빅토’만 봐서는 저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한편 Bianco(비안코/비앙코)는 이탈리아의 성씨다. 흠, 유럽 계통으로 봐야 하나… 아리송하다.
게다가 수백만 부를 팔아치운 베스트셀러 작가답지 않게, 이름을 구글이나 아마존에 아무리 검색해도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미국의 역사 및 유전 족보 기록 네트워크 앤세스트리닷컴(Ancestry®.com)에서, 1940년 미국 인구조사에 등록된 인물의 정보가 검색된다. 그는 1938년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백인 남성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앞서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에서 살펴본 『배짱이 없는 놈은 죽어라』 저자 출생연도가 1938년 아니었나? 동일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앤세스트리닷컴 검색 결과.
한편 나는 도서관에서 1997년 개정판 『배짱 없는 놈은 죽어라』를 읽으면서, 비안코가 일본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문장을 보자.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학교에 들어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의 주선으로 지방 관청에 취직하였다”, “핑크 살롱의 호스테스, 또 요정 아가씨들의 수입이 여느 셀러리맨의 수입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는 건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일본식 표현이 구석구석 눈에 띈다.
‘에스컬레이터(エスカレーター)’는 입학시험 없이 진학할 수 있는 초중고 부속 학교를 갖춘 사립대학을 뜻한다. ‘핑크 살롱(ピンクサロン)’은 여성 직원이 주로 구강성교를 해주는 성매매 업소를 말하며, ‘요정(料亭)’은 주류와 음식을 판매하는 유흥업소다. 2021년 개정판에는 이런 단어가 아예 삭제되거나 그냥 ‘살롱’, ‘술집’ 따위로 순화(?)되어 있다. 허나 여전히 일본스러움을 버리지 못한 표현이 있으니, 바로 ‘청년기 임포텐츠(신혼 임포)’이다.
청년기 임포텐츠란, ‘신혼 임포’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데, 결혼하여 비로소 확증을 얻게 되는 성불능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다. 독신 때에도 증상은 있었지만 그것을 시험해 볼 용기도 배짱도 없어 그대로 방치된 상태에서 결혼에 들어가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의 형식이 대부분의 경우 중매였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었다. (65쪽)
impotence는 남성의 성기 불능, 발기부전을 뜻하며, 발음 그대로 적는다면 ‘임퍼턴스’라고 써야 한다. 한국식으로는 ‘임포텐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임포텐츠(インポテンツ)’는 일본식 표기다(다만 외래어표기법 용례에 따르면 독일어 impotenz를 ‘임포텐츠’라고 쓰기도 한다). 신혼 임포텐스(honeymoon impotence)는 영어권에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임포텐스를 ‘임포(impo)’라고 쓰진 않는다. 무작정 줄여 써버리면 그게 임포턴트(important)인지, 임포지션(imposition)인지, 임포스터(imposter)인지 헷갈릴 테니까. 다소 긴 영단어를 이렇게 어거지로 짧게 줄이는 건 ‘스타벅스(スターバックス, 스타―박쿠스)’를 ‘스타바(スタバ)’라고 쓰는 것과 같은 일본식 별다줄(별걸 다 줄이네) 표현이다.
빅토 비안코는 일본인, 혹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
네번째 의문: 저자는 사탄교도인가?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에 검색해보니 원서의 제목이 Satanic bible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사탄 성경(The Satanic Bible)』은 신이 아닌 악마를 숭배하는 종교인 사탄교를 창시한 앤턴 라베이(Anton LaVey)가 쓴 책으로 1969년에 나왔다. 마키아벨리즘과도, 오징어 게임과도 전혀 관련이 없다! 아, 그래도 미국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이긴 하다. 설마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을 『사탄 성경』으로 속여넘기는 교묘한 짜깁기일까?
유약했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에 성취하지 못한 어떤 여자 귀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남편의 지나친 바람기 때문에 속이 썩을대로 썩은 한 아내가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하여 그 복수를 성취시키기 위해 그녀는 간곡히 빌어 귀신이 된다. 마침내 복수하려는 순간, 즉 소원이 성취되려는 순간 그녀는 늙고 지쳐 볼품없어진 남편의 모습을 보고 가엾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자 아내 귀신은 다시 변하여 불쌍하게 늙어 버린 평범한 여자가 되어 버린다. 이 이야기는 여자의 착한 본성에 대한 예시로 쓰자면 높이 평가될지 모르지만 악마주의(satanism)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무래도 철저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21쪽)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면 『사탄 성경』 실물을 읽을 수 있다. 크기는 손바닥만 하고 페이지 수는 272쪽으로 살짝 두툼한데, 본문에는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어서 진짜 성경을 읽는 듯하다. 한때 무신론자였지만 현재는 사탄교도로서 라베이의 뒤를 이어 사탄의 교회(Church of Satan)의 두번째 교주가 된 피터 길모어(Peter H. Gilmore)는 2005년에 쓴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탄의 교회는 사탄을 자유와 개인주의의 상징으로 옹호하는 종교 철학을 공표한 최초의 조직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면 『사탄 성경』을 읽을 수 있다.
보통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라베이는 자기 삶의 경험, 동물에 대한 이해, 유물론·실용주의·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사탄교(Satanism)를 만들었다. 그가 이렇게 신성모독적인 이름을 붙인 것은 기존의 ‘영적인’ 신앙 체계에 반기를 들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사탄 성경』에 마치 십계명처럼 적힌 「사탄에 관한 아홉 가지 성명」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 사탄은 금욕이 아닌, 탐닉을 상징한다!
2. 사탄은 영적인 몽상이 아닌, 현현한 실존을 상징한다!
3. 사탄은 위선적인 자기기만이 아닌, 더럽혀지지 않은 지혜를 상징한다!
4. 사탄은 배은망덕한 사람에게 낭비되는 사랑이 아닌, 마땅한 이에게 주어지는 친절을 상징한다!
5. 사탄은 반대쪽 뺨을 대는 것이 아닌, 복수를 상징한다!
6. 사탄은 초자연적인 흡혈귀에 대한 우려가 아닌, 책임 있는 자의 책무를 상징한다!
7. 사탄에게 인간은 그저 또 하나의 동물이다. 인간은 이따금 선하나, 대체로 네발동물보다 악하다. 인간은 ‘신성하고 영적이며 지적인 발달’로 인해 그 누구보다 잔인한 동물이 되었다!
8. 사탄은 육체적·정신적·감정적 희열로 이어지는, 소위 죄악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9. 사탄은 교회의 누구보다 친한 친구이며, 오랫동안 그 교제를 이어왔다!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을 쓴 빅토 비안코는 사탄교 신자인가 보다. 저자는 천국에서 추방당한 루시퍼야말로 “각성한 존재”이며 “지금은 망설일 필요없이 신의 규율을 버려야 할 시대”라고 말한다. “여기서 당장 자기자신의 행동철학,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이블(bible)을 작성하자”고 제안한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사탄교의 교주가 되어 자신의 책을 이 시대의 새로운 『사탄 성경』으로 만들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나, 너무 무서워…. 그만해!!” 한 권의 책에 담긴 총체적 난국을 보자 문득 공포가 밀려왔다. 어떤 정보가 사실이고 어떤 정보가 거짓인가? 왜 이렇게 편집이 엉망인가? 국일미디어는 뭐 하는 데인가? 지은이 빅토 비안코는 누구인가? 옮긴이 김진욱은 누구인가? 편집자는 누구인가? <올드보이>에서 유지태는 최민식에게 이렇게 말한다. “뭐, 내가 중요하진 않아요. 왜가 중요하지. … 명심해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래, 중요한 건 ‘왜’다. 왜 이런 참상이 벌어졌는가?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하여 내린 나의 뇌피셜 결론은 이렇다.
이 책은 번역서로 위장한 국내서다. 지은이는 빅토 비안코도 아니고 김진욱도 아니다. 둘은 그저 가상의 인물에 불과하며(그래서 책에 자세한 정보를 실을 수 없었다), 진짜 저자는 바로 국일미디어 대표 이종문이다. 그는 사탄교 신자로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기 위해 대필 작가를 고용하여 책을 썼다. 하지만 본인 이름을 떡하니 걸자니 겸연쩍거니와 잘 팔리지도 않을 듯하여, “수백만 부가 팔린 미국의 베스트셀러!”라고 홍보하기 위해 이러한 계책을 썼다.
1984년 나왔을 당시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못하고 묻혀버렸는데, 그래도 이종문 대표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개정판을 (남몰래) 냈다. 실패를 거듭하던 중에 드디어 2021년, <오징어 게임> 드라마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불었다. ‘그래, 오징어 게임 코인을 타자!’라는 생각으로 그는 과감하게 또 한 번 개정판을 냈다. 배짱이 어쩌고 하는 옛 이름은 버리고,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이라는 화려한 제목으로!
안타깝게도 2021년 11월 20일 현재 이 책의 알라딘 판매지수는 320, YES24 판매지수는 534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또 망했어? 이젠 아예 전멸을 했다고?” 계속 판매가 지지부진하다면 몇 년이 지나 또 다른 형태로 개정판이 출간될 수도 있겠다. 그때는 무슨 이름을 달고 나올까? 이종문 대표는 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꿈을 언젠가 이룰 수 있을까? R=VD, 이지성 작가는 『꿈꾸는 다락방』에서 생생하게(Vivid) 꿈꾸면(Dream) 이루어진다(Realization)고 말하지 않았던가. 국일미디어의 미래를 주목해보자.
국일미디어는 초대형 베스트셀러 『꿈꾸는 다락방』을 펴낸 곳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국립중앙도서관 도서 검색, 『배짱이 없는 놈은 죽어라』
국일미디어 인스타그램, <서평단 모집>
<나우뉴스>, 「[여기는 중국] 오징어 게임 ‘中 불법 굿즈’ 순식간에 사라졌다…넷플릭스 소탕 작전」, 2021.10.26.
런닝맨 - 스브스 공식 채널 유튜브, 「주꾸미게임」
버지니아 헤이슨, 테리 오어, 『포유류의 번식―암컷 관점』, 김미선 옮김, 뿌리와이파리, 2021.
빅토 비안코, 『마키아벨리즘의 오징어게임』, 김진욱 옮김, 국일미디어, 2021.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도서정보 통합검색 『배짱 없는 놈은 죽어라』
우왁굳의 게임방송 유튜브, 「오징어게임을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할 줄이야 - 마인크래프트」
월간 건강다이제스트 목차·지난호, 「1984년 09월 건강다이제스트 소망호」
<웹뉴스>, 「인기 콘텐츠를 이용한 패러디, 저작권을 침해할까?」, 2021.10.12.
최훈,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개정증보판), 뿌리와이파리, 2016.
현암사 인스타그램, <서평단 게임>
앤세스트리닷컴, 「Victor Bianco」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배짱이 없는 놈은 죽어라』
Anton Szandor LaVey. The Satanic Bible, Avon Books(An Imprint of HaperCollinsPublishers), 2005(First published 1969).
Wikipedia, 「The Satanic Bible」
Wikipedia, 「Anton La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