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구슬이 빨갛게 변했어. 계획이 틀어진 거야. 설마 그 미련한 것이 혼자서 죽기를 택할 줄이야.
일단 달아나야 해. 믿을 수가 없군. 공주가 이렇게까지 맹목적이고 충동적일 줄 알았다면, 좀 더 조심스럽게 계획을 짰어야 했는데.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야.
빌어먹을, 거의 다 왔었는데. 공주를 철저하게 타락시킨 뒤 꼭두각시로 만들어 바다 왕국을 차지하려 했던 나의 완벽한 복수 계획이 물거품이 돼버렸어.
바다 왕이 꼭지가 돌았을 테니, 일단은 피해고 봐야 해. 왕이 그간 함부로 나서지 않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막내딸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야. 이대로 붙잡혔다가는 딸들한테 했던 짓의 수백, 수천 배로 앙갚음을 당할 거야. 아무리 방비를 해놨어도 여기서 군대를 상대하긴 역부족이야. 병력을 움직이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서둘러 달아나자.
여태껏 쌓아놓은 것들을 버리고 가자니 속이 쓰리지만, 우선은 내가 살아야 그다음도 있지.
독한 년. 예쁜 여자만 보면 발정 난 물개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왕자 놈이 뭐가 그리 좋다고 목숨까지 바쳐? 이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것들의 사랑놀음에 함부로 배팅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으악!"
황급히 정문으로 향하던 나는 문을 박살 내며 날아 들어온 삼지창에 몸통이 꿰뚫린 채로 등 뒤 벽까지 날아가 박혀버렸다.
제길. 왕이 몸소 움직일 줄이야. 다 끝났군.
main story. 왕자
이곳은 어디지? 내가 살아있기는 한 건가? 분명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배에 뭔가가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바다에 빠진 것까진 기억하겠는데. 그때처럼 배가 박살 나면서 나만 또 혼자서 살아남은 것인가?
역시 나는 명이 길군. 그나저나 얼마 즐기지도 못했는데, 공주까지 죽어버린 거면 몹시 유감인데. 길에서 주운 벙어리년도 말없이 사라져 버렸고. 고것이 춤도 잘 추고 제법 삼삼하긴 했었는데. 하긴 나 정도면 여자들쯤이야 얼마든지 다시 구하면 되니까.
그런데 왜 이리 어둡고 습하지? 몸도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정신이 들었으면 묻는 말에 답해라."
뭐지? 나 지금 어디에 잡혀있는 건가? 몸값이라도 노리는 해적단인가? 일단 기싸움에서 밀릴 수야 없지.
"무엄하다! 나는 일국의 왕자이거늘. 예의를 갖추어라."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리한 날붙이가 내 목덜미에 와닿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목만 바닷속에 던져지기 싫다면 묻는 말에 대답해라."
경우고 뭐고 없는 무지막지한 놈이다. 이런 놈은 일단 구슬리으고 달래야 한다. 문제없다. 나는 세 치 혀로 누구든 꼬드길 수 있는 화술의 달인이다.
"알았으니 우선 내 목의 비수부터 치우고 물으시오. 긴장돼서 제대로 얘기나 하겠소?"
"너는 왜 공주의 사랑을 기만한 것이냐?"
"무슨 말이오? 여기 이 결혼반지가 안 보이시오?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첫날밤도 치렀는데."
"너는 어찌 왕비로 삼을 마음도 없었으면서 공주를 곁에 두었느냔 말이다!"
"뭔가 크게 착각한 것 아니오? 내가 왕이 되면 공주는 당연히 왕비가 될 것인데, 뭐가 문제란 말이오?"
"착각은 네가 하고 있다. 내가 말한 공주는 네가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아서 ‘길에서 찾은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불리던 시녀이다."
뭐지? 뭔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은? 그 벙어리년이 고귀한 신분이었단 말인가? 어느 나라 공주지? 외모가 출중하다 소문난 공주들은 내가 얼굴을 다 아는데. 방계 쪽인가? 우선은 이 위기를 수습하고 보자.
"그녀가 내 곁을 떠난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내 뜻은 아니었소. 나는 그녀가 끝까지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단 말이오. 내 돌아가면 반드시 그녀를 다시 찾을 것이니, 일단 나를 여기서 풀어주시오."
돌아가기만 해 봐라. 나의 군사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감미롭지만 지켜지는 것이 하나 없고, 상대가 너만을 바라보게 만들지만 정작 너는 더 나은 상대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갈아탈 생각이지 않느냐?"
"아니오! 나는 그녀를 위해 국법마저도 바꾸려 계획했단 말이오.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은 거짓이 없소."
조명이 없으니 내 혼신의 눈물 연기가 빛을 발하지 못하겠구나.
"그렇다면, 너에게로 가기 위해 공주가 받아들인 고통을 너 또한 감내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오!"
뭐 어쩌겠어? 보아하니 벙어리년 쪽 사람 같은데, 고것이 날 좋아하는 이상 어떻게 못 하겠지.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후일을 도모하면 되니까.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발끝이 타들어갈 듯 고통스러웠다. 뭔가에 베인듯한 통증에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호들갑 떨지 마라. 공주는 언제나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고통을 감수해가면서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네 앞에서 웃는 얼굴로 춤을 추었다. 너에게는 단순히 예쁜 몸짓에 불과했겠지만, 그녀는 너의 사랑을 얻기 위해 지옥의 언저리를 맴돌아야만 했다."
ㅆㅂ! 미친ㅅㄲ가 말도 없이 다짜고짜 찌르고 ㅈㄹ이야!
"내가 그녀에게 무슨 고통을 주었단 말이오? 나는 그녀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소!"
"네 주변에 널린 것들을 적선하듯 던져준 게 무슨 호의냐? 너를 사랑한 공주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거짓 희망을 주기 위해 있지도 않은 소녀까지 지어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왕실의 법도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것이지, 그녀를 기만할 생각은 없었소.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시오."
ㄱㅅㄲ, 두고 보자. 내 이 빚은 반드시 갚으리라.
"이미 늦었다. 어리석은 나의 막내딸은 너 따위를 대신해 바다의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제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됐단 말이다!"
절규를 마친 남자에게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와 주위의 어둠을 몰아냈다. 나는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됐다. 나는 온몸을 겨우 감싸고 있는 공기 방울에 의지해 깊은 바닷속 심해 동굴에 갇혀있는 상태였다. 남자는 건장한 체구였지만 몸 끝에 물고기의 꼬리가 달려있었다.
뱃사람들의 미신인 줄만 알았는데. 진짜로 인어는 존재했구나. 우람한 풍채, 화려한 왕관, 성스러운 삼지창. 이자는 누가 봐도 바다의 왕이다. 그럼 벙어리년은 인어공주였겠구나. 제기랄. 상황이 좋지 않다.
"바다의 왕이여.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녀가 나 때문에 희생된 것 같아 나의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집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대로 날 죽인다면 공주의 영혼이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맘껏 누리던 삶이 아까워서라도 살기 위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거라더니. 마녀의 말이 맞았구나. 그래 좋다. 너에게도 공주처럼 두 가지 선택지를 주마."
그는 예리한 칼과 투명한 약이 든 병을 주면서 말했다.
"이제 얼마 못 가 공기 방울이 터질 것이다. 그러면 인간인 너의 몸은 이곳의 환경을 견디지 못한다. 그전에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단검으로 가슴을 찔러서 공주에 대한 너의 사랑을 증명하던지, 병 속의 약을 먹고 이 동굴을 떠나던지 네가 직접 결정해라."
"이 약은 무엇입니까?"
"공기 방울이 없어도 심해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줄 약이다."
"왕이 된 자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여 주시겠습니까?"
"너는 합당한 죗값을 치렀다. 이제 네가 어떻게 되던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다 왕은 대답과 함께 나에게서 멀어지며 사라졌다.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사이 공기 방울이 점점 찌그러져 갔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일단 약을 먹고 속히 뭍으로 달아나자. 그리고선 다시는 바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 거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쓰디쓴 약을 꿀꺽 삼켰다.
"으악!"
예리한 칼이 나의 온몸을 난자하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었다. 양다리가 녹을 듯이 뜨거웠다. 누군가 칼로 양다리를 갈라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죽을듯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 바다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딸의 아름다운 지느러미를 앗아간 마녀가 만든 마법 약이다. 그 아픔을 절대 잊지 말아라. 그 아이가 너에게로 가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인 고통이다. 너는 다리가 여덟 개인 인어가 되어 평생을 음침한 바다 밑을 기어 다니며 살아야 할 것이다."
epilogue. 마법사
육지를 동경해 자신을 찾아온 인어공주를 앞에 두고 문어 마법사는 바다 왕에게 복수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습관처럼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