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새의 선물』 와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았다』를 중심으로-
I.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 나타난 이드, 자아, 초자아의 관계
12살에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주인공 진희. 일찍 어른스러워진 그녀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쟁 후 실성한 어머니의 자살로 인해, 동네 어른들의 관찰거리가 되었던 그녀는 스스로 일찍 숨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한 집에 장군이네와 최선생이 세들어 살고, 가게 집에 세든 여러 세대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위트있게 펼쳐진다. 여기서는 진희와 이모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이드, 자아, 초자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인공 진희의 자아의 흐름
진희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 실성한 어머니는 죽음을 선택하고, 할머니 손에서 성장한다. 어린이를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한 철없는 주변 어른들에 의해 상처 입은 진희는 강한 자아가 이른 나이에 형성된다. 작품 속에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나’, ‘보여지는 나’로 표현한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
‘바라보는 나’가 진짜 자아이다. 그 진짜 자아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행하도록 자기 자신에 명령하고, 그렇게 어린 진희는 남들에게 절제된 모습만을 보여줌으로 스스로를 보호한다. 주인공 진희는 의식의 세계가 너무 강한 아이였다. 자신을 철저히 감추는 것이 삶이 되어버린 그녀는 어른이 되어서 역시,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어린 마음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많은 남성편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으면서, 많은 연애의 경험을 가진 여인 진희.
그녀의 이드는 무엇이었을까.
“아무 잘못도 없이 나에게 극복해야 할 상처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어른들에게 적의가 생긴다. 나는 지금 엄마와 아버지 생각으로 마치 돌덩이가 얹힌 듯이 가슴속이 묵직한 것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공백이 있었다. 할머니를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였지만, 사랑을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 불안, 외로움이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통달해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무의식 속에 있는 상처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자기위안이었다.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은 타인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게 만들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외로움은 오히려 더 많은 남자들을 만나게 했다.
어느 노을이 지는 저녁, 어린 진희는 동네 마부에게 모욕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염소 옆에서 노을을 뒤로 한 채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멋진 남성을 본다. 그녀는 그를 허석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러나 작품 마지막에, 그 실루엣은 허석이 아니었고 더러운 낯빛의 구부정한 아저씨였다.
“그제야 나는 삶의 경고를 깨달았다. 경악한 나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남자 쪽으로 마구 달려가 보았다...그날 하모니카를 불던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허석이 아니었다.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은 허석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 내 사랑이 이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마땅히 허석이 아닌 이 더러운 낯빛의 구부정한 아저씨를 사랑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우는 나를 보면서 나는 아직 내게 사랑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었음을 알았으며 내 몸속에 물기로 남아 있는 그 환상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배설시켜버리기 위해서 울 수 있는 한 실컷 울었다.”
그의 멋진 실루엣은 그녀의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환상을 만들어 주었고, 그녀는 그를 동경했다. 그는 꼭 허석이 아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인지도 몰랐다. 이것은 실재하지 않는,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너무나 실재하는 소설속의 초자아인지도 모른다.
2. 이모의 자아의 흐름
반면, 이모의 성숙의 과정은 전혀 달랐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모는 이드에 아주 충실한 여자였다. 철부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20대지만 진희가 보기에는 어린아이였다. 엄마 몰래 남자친구를 사귀었지만, 남자친구는 친구 경자와 바람이 났다. 용서할 수 없던 친구 경자가 화재사고로 죽고 나서 그녀는 말한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너는 몰라. 내가 나쁜 년이야. 그날 죽을 짓을 한 건 나야, 나라구.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할 년은 난데...이제 난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면...” 이모의 죄의식이 근거가 없진 않다 하더라도 분명 지나친 감이 있었다.“
이드에 충실하던 이모에게 어른으로서의 자아를 가져다 준 것은 오히려 초자아였다. 그것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친구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이모는 자아가 강하게 성립되기 시작한다. 철없고 수다스럽던 그녀가 자신을 절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모는 허석과의 관계를 이형렬 시절처럼 내게 다 드러내지 않았다. 그 가을 이후 이모는 많이 성숙했다. 그리고 내가 이모를 그렇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이모 역시 나를 보고 많이 성숙했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II.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았다』
형섭은 십대시절 여자 친구인 유진의 자살로 인해, 충격을 받고 정신병원에 간다. 그는 정상을 되찾았지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과거를 잊은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정체를 감추고 찾아온 E는 과거에 그 사건으로 함께 충격을 받았던 친구 희배였다. 형섭은 E로부터의 조종으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더듬 찾아가게 된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도시의 병든 영혼들이다. 희배, 아내 승미, 선주, 장인 신상무, 유진, 희배(E)...그들은 사회에서는 성공한 직장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진 상태이고 스스로 왜 그토록 암울하고 절망적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억압하여 자신을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 가두어 두었다. 치유되지 못하고 억압된 슬픔과 상처는 현재의 자아의 정체성에 단절을 가져왔고, 그들은 원인모를 절망과 고통에 빠져 고립되어있다.
형섭의 자아의 흐름
”그날 나는 어떤 기억의 잔재와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레코드점 안에 있는 어떤 사물이라든가, 공간의 배치,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던 이미지와 일치해 내 무의식을 그렇듯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형섭의 고통은 과거에 대한 망각을 가져왔고, 현재에서 만나는 과거의 흔적들로 인해 그의 무의식은 깨어나기 시작했다. 형섭은 유진을 잃어버린 아픔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기억은 그녀를 잊었지만, 그의 무의식은 상실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이드는 이런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그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고 싶은 욕망. 유진은 나이답지 않게 어둡고 우울한 소녀였다. 현재의 형섭은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이끌린다. 그의 아내 승미를 만날 때도 그러했다. 그녀는 시니컬하지만 외롭고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형섭은 유진을 도와주지 못했던 자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승미와 결혼했지만, 그녀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진과도 달랐다.
사실, 형섭은 초자아가 텅 비어 보인다. 그는 고통을 잊어버리고자 했고, 억압된 이드로 인해 현재의 자아는 또 다시 고통을 받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초자아가 원하는 자기 확신이나 암시 같은 것을 엿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에게 잘못된 초자아라도 있었다면, 어떠한 욕망으로 인해 목표나 희망과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형섭이 고통을 피해 숨어버린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내자, 오히려 초자아가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모든 것에 평등하다. 거기에 국경이란 없다. 만물만상, 우주에 관해서도 시간은 평등하다. 나는 오늘 이 절대적 평등을 믿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련다. 살아가며 느끼게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 용서되지 않는 시간, 이 추운 겨울의 막막함, 혼자라는 두려움 혹은 서툰 사랑 하나하나까지도 뜨겁게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야지. 살아야겠다.“
모든 과거를 회복한 후, 형섭의 고백이다. 억압된 본능, 이드는 자아와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평안이 찾아왔다. 그러자 그에게 없어 보이던 초자아의 요구, 즉 모든 것이 평등하며, 고통과 온전하지 못한 사랑조차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강한 의지를 보인다. 소설 전반에 걸쳐 희망적인 의지를 보여준 유일한 대목이다.
III. 느낀 점
두 작품 속에서 이드, 자아, 초자아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우울하고 절제된 주인공들의 특징으로 인해 이드(본능)와 자아의 싸움을 드러낼 만한 확연한 사건들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아픔과 고통을 중심으로 주인공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묘사가 더 드러나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이드, 자아, 초자아의 관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인물의 심리를 들여다보니, 그냥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모든 인물들이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듯이 느껴졌다. 그들이 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생각할까라고 유심히 관찰하고 반복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모두가 실존적 인물인 것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각 인물이 왜 그랬는지 그들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개연성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 어떠한 관점에서 글을 읽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의미로 독자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아주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을 쓸 때에도, 이러한 관점에서 인물을 창조하면 훨씬 더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감히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