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내게 각별했다.
왜냐면 주인공 윌리엄처럼 나도 지난 5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는 입장과 흡사했기에.
그래서 주인공 윌리엄의 심경을 차곡차곡 함께
느끼며 공감할 수 있었다.
주인공 윌리엄은 시청의 공무원이다.
어렸을 때 부터 신사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성실하고 이성적인 영국신사 윌리엄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통근 열차를 타고
처리해야 할 서류더미가 쌓인 책상에서
냉철하게, 그러나 관료사회 특유의
타성에 젖은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의사로 부터 6개월 선고를 받는다.
죽음을 마주하면 삶이 보인다고 한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아내와 사별한 그에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함께 사는 아들 부부와는 대화 할 기회조차
잡기 어렵고, 식사자리에서 조차 격식을
차릴 뿐 어색함만 감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감을
느낌과 동시에 다른 삶을 꿈꾸어 본다.
그러나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생전 처음, 무단 결근을 하고 저금한 돈의
절반을 인출하여 해안가 관광지를 찾아간다.
그곳의 술집에서 유흥의 밤을 보내기도 하고,
런던으로 돌아와 부하직원이었던 젊은 마가렛을
만나 값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기도 하면서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기를 거듭 청한다.
마가렛이 오해를 할 정도로.
늙은이의 구차한 구애로 오해한 마가렛에게
자신의 시한부 삶을 고백한 후, 그는 마침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 지 결정한다.
자신의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 중에는
시청의 각 부서들이 서로 미루고 미루는
바람에 처리되지 못한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주민들의 민원서류가 있었다.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한다.
다른 부서들을 설득하고, 막무가내로
밀어 부친 덕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공사현장에 직접 나가 몸을 아끼지
않고 진두 지휘를 했다.
결국 놀이터는 완공되었지만
그는 곧 숨을 거두었다.
6개월동안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부하직원들과
민원인들은 감동을 느낀다.
영화 속에서 그는 같은 노래를 다르게
두 번 부른다.
어린 시절 부르던 스코틀랜드 민요인데
처음 해안가 유흥지의 술집에서 부르던
그의 노래는 돌아가지 못할 시절에 대한
회한과 허무가 서려있다.
두 번째 노래는 놀이터를 완성한 이후이다.
눈발이 날리는 추운 겨울밤
혼자 그네에 앉아 부르던 그 노래는
가슴 뿌듯한 충만감이 느껴지는 노래였다.
(순찰을 돌던 경관이 그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방해하지 않았다고
회상했을 정도로. )
같은 노래를 어쩜 그리도 다르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그의 마지막
6개월 동안의 열정적인 모습을 회고하며 눈물짓고,
놀이터를 비롯해 그가 거쳤던 장소에서 그를 보며
느꼈던 감동을 되새긴다.
그것이 그가 남긴 유산이며 향기로운 여운이다.
진정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발달한 의학의 덕을 입어 생명을 연장하게 된
나 또한 죽음에 직면했던 시간에 지난 삶을
되돌아 보았다. 삶은 찬란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전혀 즐기지 못했었다.
맛있게 먹은 음식이 위장까지 무사히
도달하여 잘 소화 되는 일,
계절이 변할 때 마다 펼쳐지는 자연의
다채로운 빛깔들에 감탄하는 일,
바람이 나를 쓰다듬으며 스칠 때, 상쾌하게
반응하는 나의 피부를 느끼는 일,
눈이 내리는 창밖을 무심하게 바라볼 때의
그 평온함.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뿌듯하게 차오르는
행복감. 이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최소한 나는 지금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느낌으로서 삶을 즐기고 있다.
나의 투병생활은 감사함으로 충만한 '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