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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Apr 27. 2022

조선의 첫 과거 합격자, 이숙번

  90년대 초 였다. 안산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기 위해 물왕 저수지 뚝 아래 길을 거쳐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이차선 도로 옆에 서 있는 빛바랜 이숙번의 묘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관심도 없었다. 몇 년이 흐른 후 ‘용의 눈물’이란 드라마에서 배우 선동혁이 연기한 이숙번이란 인물을 알게 되었다. 요즘 방송되고 있는 ‘태종 이방원’에서는 ‘용의 눈물’에서 이방번을 연기했던 그 당시 십대의 배우 태우가 이숙번을 연기하고 있다.

이숙번의 재실이 있는 건물 앞마당을 쇠줄로 출입을 막아 놓은 탓에 주차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탐방을 위한 기반시설 없이 향토유적지 표지판만 세워 놓은 것이다. 할 수 없이 그곳을 지나쳐 물왕 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삼거리 근처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달궈진 아스팥트에서 열기가 후끈 올라왔다. 열기가 사그라질 만한 늦은 오후였지만 유월의 해는 여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길옆에 있는 신도비 옆으로 가파른 나무계단이 보였다. 천천히 올라갔다. 오른쪽으로 걸음을 돌리자 무덤과 문인석이 나타났다.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이숙번의 무덤 뒤로 늘어선 세 개의 무덤도 보였다. 향토유적지로 지정되면서 후손들이 이숙번의 조상 묘도 함께 정비했다.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의 본관은 안성(安城), 자는 백응(伯應), 호는 운정(芸亭),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숙번(李叔蕃)은 아버지 이경(李坰)과 어머니 영양 남씨-남휘주(南輝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남씨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윤공의 아내였다. 윤공이 죽은 후 윤자량과 윤자당을 데리고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과 동생 이중번(李仲蕃)을 낳았다. 그래서 성이 다른 형이 둘, 같은 성을 가진 동생이 하나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은 개가한 여자의 자식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경국대전에 ‘개가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는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한다’라고 명시했다. 이숙번의 아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고위관직에 오를 수 없는 제약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따르면, 윤자당이 일곱 살 때 어머니 남씨를 따라 무당한테 가서 점을 치니, 동생의 힘을 빌려 귀함을 얻을 거라고 했다고 한다. 홀로 된 과부의 아들이 어찌 동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무당은 남씨가 재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씨는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다. 이숙번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 홀로된 부녀자가 수절하여 열녀로 선정되면, 자식은 군역이 면제되고 세금감면의 혜택을 받았다.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고, 모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여자에게만 수절을 강요했다. 가문과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국가가 앞장서서 나선 것이다. 조선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 탓이다. 양반 가문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것이 변한 요즘도 재혼보다 홀로 자식 키우며 수절하는 여자를 더 높게 치는 것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잔재이다. 신의 부여한 인간의 본능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조선 시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생긴 풍습이 보쌈이라고 한다.

  이숙번의 안하무인은 이런 조선 사회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었을 지도 모른다. 실력은 있으나 재가한 어머니의 아들이란 콤플렉스가 평생 자신을 옭아매었을 것이다. 남들과 출생이 다르거나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숙번의 아내는 청주 정씨인데 자식과 자손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 그의 후손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개가한 부녀자가 낳은 자손의 관직 진출을 금지한 조선에서 재가녀의 손자인 이숙번의 아들은 관직으로 나가지 못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살았을 것이다.

  강순덕(姜順德)에게 시집간 이숙번의 딸은 심온(沈溫)의 사위이자 세종과 동서지간인 손위 시아주버니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인 강희맹을 양자로 입양한다. 이숙번이 사망하고, 안산 및 유배지 함양에 있던 그의 많은 재산이 양어머니를 거쳐 강희맹에게가 상속되었다. 이숙번 묘 근처에는 강희맹이 만든 관곡지와 함께 강희맹과 후손의 무덤이 지금까지도 화려하게 남아 있다.

  개가한 부녀자의 아들인 이숙번이 이방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단지 서생에 불과한 삶을 살고, 역사에도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인물이다. 조선이 개국하고 다음 해인 1393년(태조 2년)에 치러진 첫 번째 과거시험에서 이숙번은 스물한 살 나이로 합격한다.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 2학년 때 조선의 제1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셈이다.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의 주선으로 이방원을 만난 그는 자신을 도와달라는 이방원의 부탁에 ‘그런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안산군 지사를 지내던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경복궁으로 병력을 출동시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우부승지에 제수된다. 이후에도 이방원의 충실한 수족으로서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는데, 조사의의 난 때는 진압군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숙번은 권세를 누리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그의 집이 돈의문(서대문) 인근에 있었는데, 사람과 우마가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서대문을 막아버린 일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많은 권신이 있었으나 성의 대문을 막고 나선 건 이숙번이 유일무이했다. 이 때문에 한양의 백성들은 그의 집을 성문을 막아버린 집이란 뜻으로 ‘색문가’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했다. 백성의 원성에 조정에서는 새로 성문을 만들어 백성의 불편을 덜어주려고 했다. 새로운 문으로 가는 길도 이숙번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자 이숙번은 상왕 정종이 거처하는 인덕궁 앞에 길을 내고 문을 세우도록 조정을 움직였다. 물러난 정종이 비록 힘은 없다지만 상왕이자 왕의 형이 아닌가.

  이숙번이 좌찬성으로 있을 때 일이다. 사간들이 이숙번과 하륜이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고 이들에게 벌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이숙번은 임금의 잘못만을 직언하는 것이 사간의 올바른 임무임에도 신하인 자신을 탄핵한 것은 잘못이라고 오히려 사간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정승인 성석린과 남재가 이숙번의 상소에 동참을 거절하자, 그날 밤 성석린의 집과 남재의 집을 찾아가 상소장에 연명할 것을 강요하고 이를 받아 내기도 했다. 이러한 이숙번의 행패에 가까운 행동은 태종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그때마다 이숙번을 두둔했다. 이렇게 이숙번을 매번 감싼 건 그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1416년(태종 16) 왕이 가뭄을 걱정하고 여러 대신이 날마다 이를 의논하며 분주했으나, 이숙번은 병을 이유로 여러 달 입궐하지 않았다. 태종은 이숙번이 대궐에 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고, 이때 이숙번의 무례(無禮)와 불충(不忠)을 고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또한, 양사로부터 원래 성품이 망령되고,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했다고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숙번은 사직 상소를 올리고, 자신의 별장이 있는 황해도 연안에 가서 살게 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은 이숙번이 원하는 대로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벌이 가볍다는 반발에 부딪히자 결국 관직을 삭탈하고, 공신록권과 직첩을 모두 회수하여 1417년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대간들은 태종의 처남 민씨 형제와 이거이 부자의 전례에 따라 이숙번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이숙번은 천성이 거칠어 가끔 무례한 짓을 할 뿐 나쁜 놈은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그를 살리는 대신 죽을 때까지 찾지 않았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유배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하고 승하했다고 하는데, 왕위에 오른 세종도 이숙번을 유배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이숙번은 신하로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부터  남은 일생의 대부분을  함양 유배지에서 보냈다. 이숙번이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고, 하륜과 달리 나이가 창창한 40대로 왕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낌새를 태종이 알고, 미리 조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경험이 부족한 새 임금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인물로 이숙번을 꼽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만들 당시(세종 20년), 이숙번이 태종의 최측근이라 태종의 예전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세종은 자료 수집차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다. 왕자의 난의 기록이 부정확하고 세종이 아는 일도 빠졌기 때문이었다. 1차, 2차 왕자의 난의 핵심 인물인 이숙번보다 잘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는 매일 경연청에 출근하여 그 당시 일을 구술했다. 이숙번은 유배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능력이 뛰어났기에 세종이 자신을 다시 등용할 것으로 기대했으리라.

  세종은 용비어천가 자료 수집이 끝나자 이숙번의 함양 유배 조치를 풀어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했다. 세종은 끝내 그를 정계로 복귀시키지 않았다. 이숙번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그로부터 2년 후인 1440년(세종 22년) 병으로 68세에 사망했다. 사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충숙'이란 시호가 추서되었다.

  이숙번의 묘는 옛 안산군의 영역인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있다. 1776년 후손들의 노력으로 다시 묘소를 찾아 복원하고, 2006년 향토유적 18호로 지정되면서 발굴조사를 통해 원형을 회복하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묘역는 문인석 2쌍 4기, 장명등 1기, 장방형 석상, 사각형 묘로 구성되어 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에 만든 것으로 사모 지붕은 없어져 새로 보수한 것이다. 문인석은 태조가 묻힌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문인석 양식과 같다. 복두를 쓰고 얼굴에는 미소를 짓고 있으며, 홀을 잡은 두 손이 옷소매에 덮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와 향토 유적 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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