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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May 04. 2024

옛사랑을 만나다 들켜버린


집에 가는 애들, 제가 붙잡았어요. 

묻는 이는 없는데, 엉겁결에 변명을 늘어놓았다. 


폭풍 같은 1학기 첫 지필고사가 끝났다.

시험 기간은 공부를 해도 힘들고, 안 해도 부담되는 고통의 터널 같은 시간.

끝나지 않을 듯한 터널을 겨우 빠져나왔어도 뒤따라올 결과 때문에 또 괴로운 것이 시험이다.

결과는 차지하고 그저 푸념할 곳이 필요했을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작년 담임했던 반 아이 셋이 조심스럽게 내가 있는 본 교무실 문을 열었다.

교감 선생님을 포함한 교사만 드글드글한 교무실이란 지은 죄가 없어서 그저 부담스러운 공간인가 보다. 

모범생 그 자체인 아이들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빼꼼히 얼굴만 들이밀고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각각 2학년 1반, 2반, 3반으로 흩어진 삼총사. 

반가움에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아이들과 볕이 드는 중정으로 나갔다. 


힘들었지? 

라고 물꼬를 터주니 봇물이 터졌다. 

2학년이 되니 시험 과목이 늘어나서 힘들다, 공부만 하니 집중을 유지하기 힘들다, 실수해서 틀린 문제가 아쉽다 등등 하소연이 늘어졌다. 

일부는 맞장구 쳐주고, 또 일부는 해답을 내어주기도 하면서 오후 볕 아래서 두런두런 얘기했다. 

올해는 담임반이 없다. 

행정부서 교사로 자리를 옮겨서 아이들과 지내기 보다 업무를 하는 시간이 길었다. 

아침 저녁 수십명 아이들 챙기는 담임 교사가 되면 정신없이 부산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 안에 마음이 오가서 좋다.

반면 쏟아지는 업무를 해결하고 있는 요즘은 내가 수업하는 교사인지 행정직원인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실컷 이야기 하는 시간이 좋았다. 

주제는 시간을 넘나들어 작년이었다가 현재로 오고, 공부 얘기하다가 문뜩 급식 이야기를 하며 순식간에 1시간이 흘렀다. 

호호깔깔 화기애애하던 그때.

아이들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쏠리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현재 1반 담임 선생님이 퇴근하시다 우리를 발견하신 것. 

나와 같은 과목 교사인 그녀. 

아이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지금 학급 상당수의 작년 담임이었던 내게 이런저런 질문도 많이 하신다. 

특히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아이 중 하나가 말수가 적고 친해지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했던 것이 며칠 전이다. 

그런데 하필 평소에는 무표정이던 아이가 나와 마주 앉아 깔깔깔 웃고 있을 때 우리를 보신 것이다.

모든 고민을 꼭 담임 교사를 찾아가야 한다는 법은 응당없다. 

시험이 끝나고 느끼는 해방감과, 결과에 대한 걱정, 아직 한참 남은 입시 스트레스를 풀고자 편한 사람을 찾아온 아이들. 

하지만 버젓이 담임이 있는데 작년 담임을 찾아간 것이 혹시나 유쾌하지 못할까바 걱정이 되었다. 

부적절한 사이도 아닌데 잘못을 틀킨 양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현재 애인이 있는 옛사랑을 몰래 만나다 들켜버린 기분이랄까.


애들이 집에 가는 걸 제가 붙잡아서 떠들고 있었어요. (머쓱)

물음이 없었던 대답을 뱉어놓고 잠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이겨냈다. 

우리에게 다가와 몇 마디를 던지다가 급한 일을 떠올리시며 갑자기 자리를 뜨셨다.  

우리 넷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휴, 짧은 숨을 뱉었다. 

다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후 2반 담임과 연거푸 3반 담임 선생님의 퇴근길을 배웅하며 생각했다. 

위치가 문제구나. 


얘들아, 우리 앞으로는 중정 말고 건물 뒤 화단에서 만나자. 

그렇게 공식적으로 다음 우리들의 몰래 데이트 장소를 찜해놓고 나서야 헤어졌다. 

다음에는 들키지 말아야지.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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