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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 Jun 16. 2022

어느 장면

  진시와 종이인형은 공원 산책길을 따라 오래 걷는다. 한 명이 멈추면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신호였고, 한쪽이 발견한 것을 찍으면 다른 한쪽은 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렌즈에 담았다.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복장으로 러닝을 하는 남자가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뒤에서 훅 불어들 때 진시는 종이인형의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헬륨 풍선이 그들의 발치를 지나 산책로를 따라 굴러간다. 바닥을 구르며 닳고 닳아 흐물흐물해진 분홍이 경치를 뒤집어쓰며 달린다. 악다구니라기엔 가벼웠다. 체념이라기엔 어딘가 경쾌한 면이 있었다.

 풍선 앞에 두 갈래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으로 빠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은 유선형을 그리며 원래의 길로 다시 이어졌다. 길 한복판에는 오 미터 남짓의 자그마한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육교의 기능을 상실한 육교를 가만히 응시하던 몇몇은 저마다의 심정으로 오른다. 내려온 뒤에는 잠시 멈추어 바닥을 보거나 눈을 감는 식으로 묵념을 한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등이 바닥에 닿고 바람이 잠시 잦아들었을 때 풍선은 누워서 구름을 본다. 누구는 과하다고 느낄지도 모를 조명이 하늘을 비추고 있었고, 어둠이 걷힌 한밤의 구름은 그리 꺼림칙하지 않다.


 풍선의 옆으로 또각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직장동료로 보이는 그들은 꽤 묵중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이어간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지속적으로 침묵이 태어난다. 진중한 대화와 달리 대답은 짧거나, 내용이 없는 짧은 음성이었는데 그들은 그러한 대답에 만족한 듯 보였다. 의아함 속에서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 앞에서 어렴풋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군데군데에서 조명이 켜졌다. 사람들이 크고 작은 감탄을 자아냈다. 바닥에 설치되어 위를 비추는 조명들은 이따금 여러 가지의 색으로 바뀌었다. 차가운 초록,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보라, 희망찬 붉은 빛. 불빛이 비친 거미줄에 한 마리 거미가 가만히 머물고 있다. 아래의 연못에는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연꽃이 그득그득 자리를 잡고 있다. 강 저편에는 높다란 아파트가 솟아 있었다. 경치가 썩 조화로웠다. 어째서? 사람들은 꿈꾸고 있다. 꿈을 꾸고 있다. 풍선도 꿈이 있다. 풍선은 헬륨으로 채워져 있다. 풍선은 몇 바퀴를 질끈 구르고 다시 위를 본다. 이름 모를 나무가 고개를 푹 숙이고 풍선을 응시하고 있다. 초록이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계속 쏟아지고 있다.


 나무 옆에는 버려져 방치된 조그맣고 검은 자개장이 놓여 있다. 그것은 십이 년 전, 이제 세상에 없는 남자에게 당시 친구였던 목수 주가 만들어 준 선물이다. 군데군데 껍질이 선명하게 파여 있다. 불연속적이지만 제각각의 질감이 묘하게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무 본래의 질감을 살리고 싶은데 영 모양이 나지 않아 다듬어보았다고 주는 그에게 말했었다. 있는 그대로여서 해로울 때가 있어. 지금은 없는 남자는 그런 말을 하는 주의 말에서 종종 비슷한 말을 하던 사람들 특유의 비릿한 단호함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었다. 그는 짧은 말을 마친 뒤 더 설명을 덧대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던 주의 눈을 이따금 떠올리곤 했다. 그냥 어느 사실을 알았고,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 이의 묵묵한 응시를. 몇 년 전 인연이 끝난 뒤에는 서로의 소식을 알 길 없었다. 알려 하지 않았다. 상상 속에서 그와 주는 꾸준히 다쳤다. 주는 아직 그가 죽은 것을 모른다.


 순간적으로 세찬 바람이 불어와 풍선을 떠민다. 분홍은 다시 구르기 시작한다. 완전히 비워지기 전까지 시간이 아직 필요할 것이다. 풍선은 별수 없이 구른다. 별수 없다는 사실은 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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