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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새날다 Jul 11. 2020

김소연, 걸리버

걸리버
김소연
 
 창문 모서리에
 은빛 모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
 
 +
 
 커피를 따는 케냐 아가씨의 검은 손과
 모닝커피를 내리는 나의 검은 그림자
 사이를
 
 다다를 수 없는 너무 먼 대륙을 건넜던
 아랍 상인의 검은 슬리퍼를
 사랑한다
 
 세계지도를 맨 처음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히는
 마음으로
 
 +
 
 출구 없는 삶에
 문을 그려 넣는 마음이었을
 도처의 소리 소문 없는 죽음들을
 
 사랑한다
 
 계절을 잃어버린 계절에 피는
 느닷없는 꽃망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내가 오롯이 나인 것 같아서 덕질을 좋아한다.
내가 오롯이 행간을 더듬으며 마음대로 오독할 수 있어서 시집을 좋아한다.
 
가끔 한두 줄로 스쳐지나가듯 만나는 시들의 원문을 찾아 읽는다. 하지만 그뿐, 그 시집을 사는 건 그리 많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오늘이 그러했다.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집을 사서, 핸드폰이 꺼져 액정을 볼 수 없는 대신 지하철에서 읽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이 시를 찾아 읽어볼 마음을 품게 한 것은, 아득하고 어딘가 쓸쓸한 첫 연 때문이었는데, 이 밤에 나는 오래도록 세 번째 연을 곱씹는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히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고 주먹을 꼭 쥔 의지와, 의미 없음의 바다에서 떠도는 무기력과 우울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가끔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없어서 연민하고 짜증내하고 답답해하니까. 그럼에도 어느 쪽에도 확고하게 기울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니까.

그런데, 시인은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 말하네. 은빛 모서리로 차가운 아침과, 목련마저 녹아 흐르는 따스한 오후 이렇게 멀고 아득한 차이도, 일교차라는 다소곳하고 명료한 이름으로 묶어낼 수 있듯이, 그렇게 조석으로 변하는, 한결같음도 굳셈도 없어서 스스로 밉고 또 슬퍼지는 너, 라는 사람도 결국은 너, 라는 단정한 한 글자로 묶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런 너, 를 너 스스로도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시인은 내게 묻는다.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망설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불확실함이라는 단어장의 뒷면에, "그래도 희망" 이라는 작은 글씨를 적어넣는 만학도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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