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침에 눈을 뜨니 옆에 지한이가 없다. 동시에 바깥에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지한이 목소리와 티비 소리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일어나 볼까 하는데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일어났어? 조금 더 누워있어.
지한이 밖에서 아빠랑 놀고 있어.
아침도 잘 먹었고.'
본가에 오면 나는 늦잠을 잘 수 있다.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는 우리 집.
가끔은 바로 옆 단지에 사는 조카와 언니도 와서 다 같이 종종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복작복작하고 항상 어느 정도의 적당한 소음이 존재하는 집. 아이를 낳고 나서 내가 꿈꾸던 가정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까마득하게 조용한 아파트에서 형광등 불빛에 의지한 채 지한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지한이와 있을 때면 끊임없이 이런 소음이 사무치게 고팠다. 시끄러움이 그리웠다. 나는 모든 시간의 범위에 걸쳐 지한이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더 신나는 목소리를 장착한 채 지한이와 놀아주는 나를 자주 발견하곤 했다. 그런 내 자신을 느낄 때마다 지금 처한 상황을 깨닫고 매일매일 나는 조금씩 더 점진적으로 슬퍼졌다.
'엄마, 오늘 뭐 할까?'
'여기 옆에 엄청 큰 베이커리 카페 생겼어.
언니도 오라 그래서 같이 나들이 가자'
'그래 좋아.
그럼 아침에 엄마 성당 갔다 오고 나가면 되겠다.'
부모님과 언니와 나, 그리고 조카와 지한이까지 여섯 명이 모여 베이커리 카페로 향했다. 추웠던 날씨도 제법 풀렸고 얇은 겨울 코트 하나로 버틸만한 날씨다.
이렇게 또 시간이 지나 봄이 오려나보다. 벚꽃까지 흐드러지게 피고 지면, 찜통 같은 길고 긴 여름이 올 거다. 정해진 규칙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먹고 우리 지한이는 매일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고 지한이가 자란 그 찬란한 시간만큼 나는 매일 나이가 드는 시스템.
'언니 나 늙기 싫다.'
'뭐래.. 언니 앞에서 할 소리냐.'
조카와 지한이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우리 둘은 앞을 보며 깔깔 웃는다.
나는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이 없다. 좋은 사람을 만나 열애하고 싶지만 당장에 결혼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며 연애만 할 사람을 찾는 것도 아니다. 나중에 결혼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아껴주는 좋은 사람과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 지한이에게 동생이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이번생엔 내가 해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조카와 지한이가 형제 이상으로 돈독하기를 바란다. 둘의 우애가 튼튼하기를 바란다.
'그 준영씨라는 사람. 만나보니 어때?'
아이들을 바라보며 언니가 묻는다.
'좋아 언니. 정말 너무 좋아.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나 싶어.'
'나는 조금 걱정돼. 너무 많이 마음 주지 마.'
'왜~ 언니 동생도 좀 마음껏 사랑하자.
그동안 나 이게 뭐야. 무슨 돌부처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이혼한다고 시간만 버리고 이게 뭔데..?
예쁘고 좋은 시절 다 가서 진짜 속상해.'
'나중에 만약 헤어진다면 많이 좋아했던 것만큼 힘들 거야.
너 당장 재혼할 생각도 없잖아.
언니는 그냥 너 생각해서 속도조절하라는 얘기지.'
잘 알고 있다.
준영씨를 향한 내 마음의 크기가 많이 크다는 걸.
그럼에도 당장 나는 결혼생각이 없고 지한이를 준영씨에게 바로 보여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깨져버린 차창으로 가까스로 손을 내밀어 준영씨를 잡았으나 더 움직이려면 팔 전체가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다시 피어오른 애틋한 이 사랑이 나를 안아주고, 더 강해진 내가 지한이를 잘 케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