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 생일이면 생각나는 엄마
자연 분만 후 죽을 고비 넘긴 사연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만큼 수시로 회자되는 여자들의 출산 이야기가 내게도 있다.
군 생활을 해 본 건 아니지만 군 생활과 출산이 맞먹는다 이런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비교 거리가 되지 않는 군대와 출산을 함께 엮는 분들이 아직 계시던데 아닌 건 아닌 거다.
(아무리 말빨이 딸려도 우리 그러지는 말아요.)
비교도 대조도 어울리지 않는 다른 영역일 뿐이다.
단지 평생을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을 기억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첫 아이를 10월에 낳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행복한 임산부 시절을 보냈다. 아홉 달 후 예정일 보다 이주 빨리 진통이 찾아왔고 출산 짐을 챙겨 새벽쯤에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사가 출산 시 걸리적거릴까 봐 내 머리를 묶어 주었고 아침 연속극이 할 때쯤 진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친정 엄마는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분만실을 나가셨다. 그리고 본격적인 진통 시작됐다.
내 입에서는 살려 달라는 말 또는 짐승에게서나 나올 법한 울부짖음만 새어 나왔다.
점심때쯤 첫 아이가 좁은 산도를 뚫고 세상 밖으로 첫울음을 뱉어냈다.
큰 울음이었다. 정말 행복했다.
두려웠지만 내가 엄마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차가운 침대 위에 누운 채 응급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마취 마스크를 태어나 처음으로 써 보게 되었다.
정신이 있던 그 순간까지 나는 물었다.
"아이는 괜찮죠?"
아이는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그렇지 못했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몸의 피가 절반 이상 소실 됐다. 출혈 원인을 찾아 급하게 응급수술이 들어갔고 마취 후부터 기억이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눈앞에서 엄마가 울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억에 없다. 엄마가 울면서 애타게 나를 흔들어 깨우던 그 모습만 유일하게 생각이 난다. 평소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하던 엄마가 큰 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분명 자연분만을 했는데 몸에 소변줄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무슨 일 인지 정신이 없던 그때 그래도 엄마가 있어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였다.
반면 엄마는 낮에 애를 낳고 저녁 7시가 넘어도 못 깨어나는 나를 보며 일분일초가 백 년 같았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지...
그 후 머리를 살짝만 들어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부족한 적혈구를 온몸으로 보내려고 심장이 열일을 하고 있었다.
조혈제 투여도 모자라 수혈을 두팩이나 받고 난 후 내 헤모글로빈 수치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죽일 놈 살릴 놈 하지만
나에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이름을 선물해 준 첫째로 인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극한의 행복도 경험했다.
하지만 첫아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함께 먹을 때면 늘 엄마가 생각이 난다.
"송주야 일어나라. 자지 말고 일어나라." 하며 울면서 나를 깨우던 엄마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