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아래 동서의 여동생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다.
신랑 신부는 요즘은 보기 드물다는 20대였다. 그래서인지 아름답다는 말이상의 풋풋함과 싱그러움이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사이로 흘러넘치는 듯했다. 결혼 적령기가 뒤로 밀려 20대에 결혼하는 부부를 보기 힘든 현실이다.
신부 하객 석에 앉아 넋 나간 듯 신부를 보고 박수를 쳤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웨딩드레스가 오래전 과거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28살에 결혼을 했다.
나도 그때 20대 젊은 신부였다. 나를 보는 결혼식 하객들도 넋이 나간 듯 나를 쳐다봤을지 문득 궁금했다.
기억이 다시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복학생이던 정우를 만났다.
날씨가 꽤 쌀쌀하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 긴 의자에 둘이 앉았다. 정우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나는 그날 전형적인 상남자 스타일의 정우에게 반해 운명을 바꿀 한마디를 어렵게 던지고 말았다.
"오빠 저랑 사귀실래요? 이 말 안 하면 후회할걸 같아서 용기 냈어요."
나는 직진녀였고 철이 없었다.
못해서 후회될 말이 없도록 하는 것
해서 후회될 말은 안 하는 것이 삶의 모토였다.
그 뒤 내가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있다.
못 해서 후회될 말은 안 하면 더 좋다는 것과
해서 후회될 것 같은 말 역시 그냥 안 해야 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부터 1일이 되었다.
나는 쫄면을 좋아하지만 정우와 함께 분식집에 가면 한여름에도 입이 데일 듯한 우동을 먹었다. 쫄면의 빨간 양념이 입가에 묻어 휴지로 닦아내는 모습을 이 남자 앞에서 만은 보이기 싫어서였다.
닦아도 빨간 양념의 흔적이 입가에 남을 것인데 그 조차 퍽 걱정이 되었다.
나는 손끝이 닳아 없어질 만큼 대단하고 일방적인 엄마의 희생을 보고 자랐다. 그럼에도 그때 나는 전통적 한국 여성처럼 그리고 우리 엄마처럼 여자의 희생을 관습처럼 무의식 속에 저장하고 살았던 여자였다.
나는 지고지순한 헌신녀였다.
곰국이 있으면 보온병에 담아 정우가 운동을 마치고 나오면 보양수로 주었다.
정우가 외국으로 연수를 떠나던 날 정우의 무사 도착 연락이 늦어짐을 걱정해 도서관에서 눈물 콧물을 질질 짜던 그런 여자였다.
정우가 귀국하던 날은 인천 공항까지 정우를 마중하러 갔다. 우리 집에서 인천 공항 까지는 버스로 5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때 한 남자를 위해 생애 처음 국내선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정우는 쓰레기 양아치 같은 남자는 아니었지만 연애의 주도권을 본인이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남자였다. 자기중심적이었고 친절한 언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남자였다. 하지만 눈에 뭐가 씐 그때는 그것을 권위적 리더십이라 생각했다. 나는 권위적이라는 단어를 남자다운 이라고 내 마음대로 오역했고 결국 정우는 내 눈에 남자다운 리더십을 갖춘 멋진 사람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이렇게 사단이 난다.
시야를 좁게 만들어 숲 말고 나무만 보게 된다.
죽일 놈의 사랑이 문제였다.
긴 연애였다.
나는 정우를 알아가며 이 연애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에 갈등을 거듭했다. 그 사이 시간은 말없이 흘러갔고 이미 정이 사랑을 이기는 단계까지 가 있었다. 나는 정우에게 이미 길들여져 있었고 내 삶의 일정 부분이 이 남자와 함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길들여진다는 건 변화하기 두려운 상태를 넘어 시도 조차 하기 싫은 일종의 무기력 같은 것이었다. 내 선택지에는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는 선지는 없었다.
또 원점으로 돌아가 솔로가 될 자신도 없었다.
사랑이 정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었다.
나도 정우도 지겹고 지루한 연애가 물리기 시작했다.
사랑을 넘어선 정(情)도 권태를 이기지 못했다.
우리는 사랑하다 정이 무서워 지루하게 만났고 결국 헤어졌다.
그래서 28살에 어떻게 누구와 결혼했냐고?
그 후 나는 드라마 보다 더 지독한 작위적 현실 한가운데 놓였다.
가끔은 이게 실화냐고 묻고 싶은 일들이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