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잉크
사춘기 두 아들을 데리고 오사카로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음~~ 이미 패를 다 까버린 것 같네요.)
하필 가는 날이 장날도 아닌데 365일이나 되는 많고 많은 날 중에 왜 그날이었는지...
삶 속에서 우연이라는 명사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참 대단하다.
다들 알다시피 직장인에게 여행이란
일주일 전부터 설렘 못지않게 업무 증가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묘한 제로섬 게임 같은 행복이다.
괜스레 부산스러웠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내가 있는 것처럼 뭐든 준비해 놔야 할 것 같은 것이 여행 전이다. 들뜬 마음을 일로 가라앉히며 좀 무리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 사건은 무관하다.
비행기 탑승 역시 이 사건과 무관하다.
(많이들 물어보셔서요..)
신의 심심풀이 땅콩의 그 땅콩이 내가 된 것일 뿐이다.
남편은 직장 문제로 가지 못했고 나와 아들들 이렇게 세 식구가 오사카로 떠났다.
오후 늦게 오사카 성에 도착 해 잠시 둘러본 후
전철역에서 큰 아들과 한바탕 싸우고 극적 화해 후 하루카츠 300 전망대를 보러 갔다. 그렇게 이웃 나라에서도 사춘기 아들의 위엄은 줄줄 흘렀다는..
하루카츠 300의 입구를 못 찾아 빙빙 돌던 우리는 물어물어 하루카츠 전망대까지 갈 수 있었다.
아래로 보이는 콩알 같은 불빛이 얼마나 찬란하던지 넋을 놓고 보고 싶었지만 고소 공포증이 있는 나는 둘러보듯 야경을 보고 홀 중간에 앉아 커피 한잔 하는 걸로 만족했다. 아들들은 통유리 쪽에 붙어 서서 인생샷을 건지느라 온갖 똥 폼을 잡고 사진을 찍어 대고 있었고 나는 아들들이 내 고소 공포증을 닮지 않은 것을 내심 다행히 여겼다.
야경 감상에 푹 빠져 있던 그때까지도 초고층에서 보이는 광경을 두 눈에 쏙 담아 갈 생각만 했지 뜻밖의 풍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야경 감상 후 저녁 식사를 위해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쯤 가야 했고 내릴 역에 곧 도착할 때였다.
올 것이 온 것 같은 이 싸한 느낌
의사 선생님이 말하는 그것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구나~
나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눈앞에 검은 잉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잉크가 스포이트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나와 투명한 물속으로 떨어지는 형상이었다.
아들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 손 많이 가는 엄마의 망막박리를 이미 알고 있었던 아들들도 뜻밖의 상황에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우리 세 모자는 목적지 역에 내려 역무실을 찾아갔다.
일본에서 아들들과 나는 귀머거리에 까막눈이었다.
역무실에 들어선 후 내 왼쪽 시야는 더 흐릿해졌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 번역기를 돌리며 의사소통을 시작했다.
"저는 왼쪽 눈에 망막박리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비문이 늘어나면 바로 병원에 오랬는데 좀 전에 비문이 확 늘어났고 지금은 왼쪽 눈이 흐릿하게 잘 안 보입니다. 안과 병원을 가야 합니다."
그때 시간이 저녁 7시 30분경
우리나라였어도 안과 의사가 있는 응급실을 찾기 힘든 시간이었다.
일본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역무실 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일단 구급차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들 둘을 데리고 온 멀쩡해 보이는 아줌마가 갑자기 망막에 이상이 생겼다며 멀쩡하지 않은 소리를 하니 그는 그 순간 구급차를 떠 올렸던 모양이었다.
그 사이 아들은 출국 때 전송 된 영사관 콜센터로 전화를 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해외 위급상황시 영사콜센터 연락(+82-2-3210-0404, 무료전화 앱), 7개 국어 통역 가능, 해외 90일 이상 체류 시 재외국민등록(누리집: 영사민원 24)
영사관에 전화를 하면 통역을 해 줄 직원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어 통역 직원은 부재중이었다. 나는 다시 번역앱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했고 아들들과 나는 밖으로 나가 구급차에 올라탔다.
차 내부의 긴 의자 가운데에 나를 두고 아들들이 양쪽으로 앉았다.
구급 대원의 호구 조사? 환자 조사? 가 시작 됐다.
서로 말이 안 통하니 구급 대원은 탭의 번역앱을 통해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나이는? 주소는? 처음 진단받은 때는? 지금 증상은 기타 등등 많은 것을 번역앱으로 물어보고
번역앱으로 대답하려니 시간이 지체되기 시작했고 내 똥줄도 탔고 옆의 아들들도 똥줄이 타는지 초초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전에 지하철 역에서 나와 한바탕 했던 큰아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고 한국에 있던 남편은 오사카에 있는 인맥을 동원해 비상시 오분 대기조를 편성해 놓았다.
큰아들은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의 항공사에 까지 전화를 해 만약의 경우 긴급 고객 좌석을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해외에서 어떻게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대답은 예스였다.
하지만 내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약 수술이 불가피한 경우 한국에 갈 때까지 황반이 벗겨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또 너무 긴급이라 일본에서 수술해야 한다면
그 뒤의 부가적 문제들 예를 들면 수술비, 입원비, 환자 이송비 등등이 보험에서 해결이 될지 안 될지...
애들은 어쩌고 일은 또 어쩌고
온갖 생각들로 구급차 안에 있던 40분이 40시간은 족히 넘어가는 듯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