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언제부턴가 몹시 거슬렸던 "~이나"라는 표현
지하주차장을 내려가다 보면 계단 한편에 죽은 여치 한 마리가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여치인지 나뭇잎인지 모를 정도로 존재가 미미한데 유독 날벌레에 겁이 많은 작은 아이는 그 계단을 지날 때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으으으 벌레다.” 하며 내 팔에 매달려 종종걸음이 된다. 아이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갈 일이 많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내려가는 순간에도 그 장소는 몹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처럼 몹시 신경 쓰이는 표현 하나가 있다. “밥이나 먹자, 잠이나 자자, 책이나 읽자.”처럼 진지하지 못하고 가벼이 던지는 “-이나”라는 표현이 몹시 거슬렸다. 이 “-이나”라는 표현은 바로 앞에 오는 주어를 한방에 격하시킨다. 에너지의 근본인 밥이 “-이나”가 되고, 쉼의 근본인 잠이 “-이나”라는 표현으로 밥 따위, 잠 따위 정도의 느낌이 되어 버린다.
대체 불가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너무 쉽게 “-이나”를 발견한다. 회사 때려치우고 조그만 커피숍이나 해볼까? 퇴직하면 시골에 들어가 가축이나 먹이며 살까? 도대체 이런 “-이나”는 어디서 오는 근자감일까 싶다. 인생의 반을 직장인으로 살아온 당신이 접객하는 커피숍이나, 먹이고 치우기를 반복해야 하는 가축사육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현실의 답답함 때문에 묻어 나오는 실소겠지만 인생이 걸려있는데 좀 더 신중하고 진지해져 보는 건 어떨까?
2017년 겨울 ⌜책 쓰기 꼬박꼬박 월급 나올 때 시작하라⌟를 출간했다. 책이 출간되고 독자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받았다. 아는 한도 내에서 이메일로 답을 했는데 어느 순간 유튜브에 강연을 제작해 올리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영상이나 몇 편 찍어서 올려야지.”라고 생각했었다. 영상편집으로 먹고사는 처지라 이 정도는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워낙 좋아 대충 찍어서 올리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작업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트로 영상 딱 한편을 만들어 보고 내 생각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상이나”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책 쓰기 관련 영상이므로 배경이 도서관처럼 책들이 많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장소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조명이 설치된 안정적인 스튜디오를 찾는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결국 집 안의 가장 깔끔한 한쪽 벽면을 배경으로 촬영을 했는데 책상과 소품들 세팅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촬영도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없는 오전 아니면 모두 잠든 깊은 밤을 이용해야 했다. 문제는 조명이 없다 보니 자연채광에 의지하게 되는데 일정한 품질의 영상이 나오지 않았다. 마이크도 없어서 오디오 상태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책을 쓴 저자지만 영상을 찍는데 정해진 순서와 구어체로 된 원고를 다시 써야 했다. 편집도 타이틀과 효과, 음악, 자막 등의 작업이 가미되어야 했다. 유튜브 계정을 만들고 프로필과 채널 아트를 만드는 작업도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우리의 삶이 매번 진지모드가 될 수는 없지만 가벼이 생각하고 “-이나”를 붙여왔던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밥의 소중함과 잠의 편안함, 독서의 흥미로움, 술자리의 즐거움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조용히 나를 살찌우고 위로해주며 인생의 즐거움으로 작용한다. 애초에 책이나 써야겠다는 마음이었다면 아마 나는 제대로 된 문장 한 줄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나”로 삶의 질을 격하시키지 말자. 가벼이 생각했던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더 이상 죽은 여치는 없다. 며칠 전 퇴근길에 치워버렸다. 아이는 폴짝폴짝 뛰며 가볍게 그 계단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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