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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jazz Jun 20. 2023

(해외 주재원 4년차) 넋두리

(해외 주재원 4년차) 넋두리… 긴 글 주의


주재원 발령 이야기가 나왔던 건 지금으로부터 꼭 4년 전이었습니다. 11월 20일을 지나 11월 말로 접어들던 2017년의 늦가을 어느 날 오후 4시가 넘어가던 무렵, 교통 체증이 늘 심각한 염곡 사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본사 사무실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던 저를 급하게 찾는 전화가 걸려왔었지요. 그 때 저는 회사에서 무언가를 파내는 내부 감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급하게 저를 찾는 전화는 대개 큰 사건인 경우가 많아서 대충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와 저를 찾던 이사님 자리로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들었던,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질문, “이과장, 너 터키 나가볼래?” 그리고 잠시 제 머릿속 필름이 멈추었고. (그냥 혼자 순간적인 정지 상태) 이윽고 저는 깜짝 놀라 “네? 언제요?” 라고 물었는데, 이 (망할!) 놈의 회사 인사에서는 정말 사악하게도 바로 다음날 아침까지 의사를 결정해서 알려달라 하더라고요. 만약 제가 못 간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줄 참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 제안을 듣고 나서 바로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 집으로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당시 육아휴직 후 5년 만에 복직해서 두 학기를 근무하고 있던 저의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놀랍게도 “그래? 그럼 나가자.” 라고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즉답을 주었더랬습니다. 그녀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뭔가 머뭇거리는 결정장애가 있었는데, 그런 건 생각보다 아주 쉽게 결정을 내리더라고요. 향후 몇 년 동안이나 부모님과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멀어짐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한편 그 때, 다른 주재원 부임 예정자들은 이미 영어교육을 비롯한 주재원 교육을 받고 있던 터였고 출국 예정 약 6개월 전부터 본인과 그 가족이 조만간 해외로 나갈 거라는 사실을 죄다 알고 있었는데, 유독 저만 정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지금 결정해서 딱 한 달 만에 출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사실 적잖이 당황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인지 터키라는 나라가 늘 그렇듯 대사관을 통한 워킹 비자 발급이 지연되어 한 달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로부터 약 두 달이 지난 2월 4일, 봄이 오는 문턱이라는 입춘임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게 추웠던 그 날 저는 가족의 배웅을 받고 인천공항에 가서 장장 11시간 40분의 비행 끝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금은 폐쇄된 이스탄불 아타투르크 공항에 입성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혈혈단신으로 약 6개월을 어렵게 살다가 가족들과 재회하고 본격적인 해외 거주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가족들은 아이들 학교 문제와 아내의 휴직(육아 휴직과 동반부임 휴직 등)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더 필요하여 이 곳으로 입국하는 시기 또한 예정보다 더 늦어지게 되었는데, 해외 거주라는 게 여러모로 힘들어서 초기 적응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리고 어찌어찌 3년 10개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이 곳과 작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으니, 4년 전의 그 결정을 이제 와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굳이 그때 여기에 나왔어야 했나?”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그 시기를 돌아보게 되는 건 어쩌면 제가 여기에서 얻은 것 보다 잃은 게 더 많다고 생각해서일까요. 사실 당시 저를 시샘했던 건지 아니면 본인이 주재원으로 나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건지, 제가 주재원으로 나가게 된 것을 영 못마땅해 여겨 본인이 대신 가야 한다고 우기던 자가 제 주변에 두어 명 정도 있었는데, (제가 확인한 인원만 해도 두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갈 수 있게 그때 제가 그냥 양보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본사로의 복귀 발령을 앞두고 이 현지 법인에서의 소속감이 사라지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제 맘이 싱숭생숭해져서 그런 건지, 마치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처럼 또다시 새로운 사회에 발을 디딜 것을 생각하니 예전 기억들도 새삼스럽게 떠오르면서 또한 갑작스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권 국가에서 주재했던 경험이 있던 당시 본사의 제 소속 담당 이사님은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도 아이들의 초등학교 취학 즈음해서 해외에 나가 국제학교를 경험하는 게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의 입장에선 그 나이가 해외 거주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때 같긴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지금도 영어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닌 우리 아이들은 입국 초기에 형편 없는 영어 실력 탓에 매우 힘든 학교생활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주재원을 나갈 수 있도록 엄청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한 실제 자신의 주재원 부임을 위해 심각할 정도로 윗선에 정치질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늘, 제가 해외 주재원을 나간다면 스스로 준비되었다고 자부하는 자들과 비교했을 때 왠지 모를 열등감 같은 것을 느꼈고, 저와 저의 아이들은 해외에서 노는(?) 게 뭔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였기에 제가 주재원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계속 달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떠나기 직전인 지금까지도 일만 주구장창 떠맡고 다른 주재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를 제외한 절대 다수 주재원들과는 주된 관심사가 다르니 대화의 주제도 다소 핀트가 맞지 않는데다, 그들 대다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정치를 하고 있으니, 그래서 정공법이 아닌 편법으로 만든 이상한 숫자가 보고서에 실려도 어느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으니. 그러다 침묵을 깨고 직설적으로 뭐라고 지적(?)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래, 네 말이 맞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말과 함께 피곤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지적할 거면 그냥 네가 해라! 라는 일감 몰아주기로 귀결되는,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금에도 현지시간으로 밤 열한 시가 넘어가는 시간까지 야근을 하다 도저히 개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자정이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몇 자 글을 쓰게 되었네요. 물론 쓰다 보니 핵심 내용도 없이 글이 주저리 주저리 길어졌지만. 요지는 성공하지 못한 해외 주재원인 저 같은 사람은 연차가 쌓여도 그만큼 넋두리도 늘어 간다는 것. 뭐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좌절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지만요. 그래도 이젠 이 좁디 좁은 주재원 사회에서 가면놀이는 그만하고 싶습니다. 한인 사회가, 그리고 주재원 사회가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그리고 사실, 해외 주재원보다 더 힘든 건 바로 주재원 아내의 삶일 겁니다. 남편은 그래도 회사 사람이라는 관계라도 있지만, 배우자는 그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 머나먼 타국에서 지금까지 잘 참고 견뎌준 제 배우자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끝으로, 회사생활 하다가 힘들어서 점쟁이 찾아갔던 이야기 추가.


그룹 감사실에 있을 때 너무 힘들어서 주위에 수소문한 끝에 유명 점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번 생에서 이렇게 투명하지 못한 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하게 된 겁니까?” 라는 질문에 그 점쟁이는 “근데, 만약 그 업무를 그만두고 다른 데 간다 하시더라도 아마 비슷한 일을 하게 되실 겁니다” 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실제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이후 저는 그룹 감사실에서는 어찌어찌 나오게 되었지만, 본부 내부 감사를 무려 4년 동안이나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소속은 바뀌었지만 담당 업무는 바뀌지 않은 셈이죠. 어? 뭐지? 여기에서 첫 번째 충격과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소름 끼치던 내용은 해외 근무 관련 건인데, 당시 해외근무 압박에 시달리던 저는 그땐 사실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서 해외 근무에 대해 그 점쟁이에게 물어봤었고, 그 분이 또 이런 답변을 했었습니다. “이런 저런 요인들로 인해 결국 해외로 나가게 되실 겁니다.” 그래서 추가로 했던 질문 “그럼 제가 가게 되는 국가는 어디일까요? 그랬더니 그 분이 했던 우문현답. “아, 거기가 어디인지.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니고 그 경계 같은데.” 와 이 사람 뭔가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것마저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맞힌 것 같은 느낌인데요. 참고로 저는 이스탄불 유럽 사이드에 거주하고 있고, 회사는 이스탄불 교외의 아시아 사이드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저는 주중에는 매일 유럽에서 아시아로 출퇴근하고 있는 셈인데, 이 분이 소름 끼치도록 딱 맞게 맞혀 버린 걸까요? 아, 물론 저는 손바닥에 ‘王’ 字 새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말고는 점집을 전혀 다니지 않는데다 이런 저런 미신도 믿지 않고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뭔가 좀 딱딱 들어맞는데요? 하하. 여기까지 하고 줄이겠습니다.


첨부된 사진은 보스포러스 해협에 앉아 있는 제 모습입니다. 제가 앉은 쪽이 유럽 끝자락이고 건너 편은 아시아 지역입니다. 이스탄불은 한 도시 안에 두 대륙(유럽과 아시아)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정말 특이한 도시입니다.





@ Bebek, Istanbul, Türkiye.


2021년 11월 24일, 개인 facebook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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