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토끼 Oct 26. 2022

런던에서 내집 마련하기 IV

세 집과의 밀당

(보니까 이 글을 작성하려고 제목을 적어놓은 게 7월이니 3개월을 묵혀둔 글이다. 집 계약이 날아가고 급하게 월세를 구하고 이사하면서 몸고생 마음고생 하느라 집이라면 진저리가 나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이제 이사한 지 두 달이 넘었고 게다가 3개월 간 서울에 들어와 있을 거라 안전한 한국 땅에서 적어본다.)


집집집

눈물과 한숨이 가득한 "런던에서 내집 마련하기" 대환장 블랙 코미디에는 세 집이 등장한다. 그냥 A, B, C라고 하면 재미없으니 길 이름을 따서 할튼(Halton), 프로보스트(Provost), 와프(Wharf)로 부르자. 


할튼

할튼은 영국에 오래 산 한국인 지인이 강추한 집이었다. 영국 부동산에 대해 지식이 전무했던 1월, 유일한 조건이 사무실에 걸어갈 수 있는 위치(Islington, Hackney 정도)일 때 예전에 살았던 단지라는 말에 믿음이 가서 바로 보러 갔다. 아주 오래된 집이었지만 집주인이 내부 수리를 해 주방과 욕실이 깔끔했고, 무엇보다 코너 집이라 창이 두 방향으로 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1. 오래된 영국 집에서 많이 보이는 붙박이 가구 스타일  2, 3. 주방과 욕실은 깔끔하게 수리했다
4. 양방향으로 창이 나있는 거실  5. 단지 전경  6. 평면도


하지만 주방이 좁은 게 걸렸다. 별도의 공간이라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오픈 플랜(open plan)처럼 주방을 확장해서 공간을 활용할 수 없었다. 수납 공간도 많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 집을 포기하게 만든 건 바로 앞에 초등학교 운동장. 쉬는 시간과 체육 시간에 아이들이 뛰어놀며 지르는 소리가 다 들렸다. 처음에는 평일 낮, 그것도 학기 중에만 그러니까... 하며 스스로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평일 저녁과 주말에는 그 공간을 일반인에게 대여해준다는 포스터를 보고 나서 완전히 접었다. 


금전적으로도 좋은 옵션은 아니었던 게, 땅 주인에게 내는 ground rent가 연 600 파운드(약 100만원), 관리비 개념의 service charge가 연 3,300 파운드(약 530만원)로 매우 높았다. 게다가 leasehold(런던에서 내집 마련하기 II 참조)가 91년밖에 남지 않아 몇 년 후에는 연장하는 데 또 비용이 더 들어갔을 거다.


프로보스트

프로보스트는 외관이 너무나 촌스러워 보러 가기도 전에 이미 아니라고 생각하고 간 곳이다. 괜찮은 집이 너무 안 나와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살던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라 그냥 가봤는데 어쩌다보니 계약 직전까지 가게 된 집.


7~9. 내부 사진
10. 욕실   11. 못생긴 외관  12. 평면도


그냥 무난했다. 1층에 경비실이 있어서 택배 받을 걱정을 안 해도 됐고 일방통행인 골목이라 시끄럽지 않을 듯했다. 사무실까지 걸어서 15분이었고 남향이라 햇빛이 잘 들었다. 주방은 할튼보다도 작았지만 거실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거실 식탁까지 사용하면 되겠다 싶었다. ground rent는 연 250 파운드(약 40만원), service charge 연 1,680 파운드(약 270만원)로 할튼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leasehold는 106년이 남아있었다. 가격은 거의 비슷해 여러모로 더 나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계약을 진행했는데 뭔가 계속 찜찜했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주변 지인들에게도 계속 물어봤다. 원래 집을 사면 빨리 들어가고 싶고, 설레는 마음이 들고 그러냐고. 난 오히려 당시 거주하던 월셋집을 떠나는 게 아쉬운 느낌이었으니까. 


와프

그래서 프로보스트 계약을 진행하면서 다시 오퍼를 넣게 된 집이 내가 월세로 살고 있던 와프다. 내가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매매로 나와 있던 집인데 북향이라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가 살아보니 장점이 많아서 뒤늦게 오퍼를 넣었다. 근데 1년 가까이 팔리지 않은 집이 하필 내가 오퍼를 넣을 때 두 명의 경쟁자가 생겨 best and final offer라는 제도까지 경험하게 됐다. buyer가 여러 명일 때, 오퍼를 주고 받는 시간을 줄이고 seller 입장에서 최고의 수익을 얻기 위해 동시에 오퍼 가격을 내게 하는 방식으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경매 비슷한 제도다. 기회가 한 번뿐이기에 꼭 사고 싶다면 높은 가격을 써내야 한다. 


13~15. 내부 사진
17. 외관   18. 평면도


나보다 높은 가격을 적어낸 사람이 있었지만 이미 들어와 살고 있는 세입자에게 팔고 싶었던 집주인은 금액을 맞추면 나에게 팔겠다고 전해와 일단 알겠다고 했다. 이미 진행 중이던 프로보스트와 집 크기와 구조도 비슷하고 심지어 걸어서 5분 거리라 같은 동네인데 무려 10만 파운드(1억 6천만원)나 더 비쌌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프로보스트를 방문해서 과연 그만큼 더 지불할 가치가 있는지 비교해보고 정할 셈이었다. 그런데 마침 이때 프로보스트 집주인이 코로나에 걸려 방문할 수 없었고 곧이어 내가 걸려버려서 집을 나갈 수가 없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부동산의 연락을 피하며 잠적해 버렸다. 결국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 프로보스트를 다시 찾아 그냥 그 집으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집이라는 인연


이후 약 4개월 간의 삽질은 복잡한 영국의 부동산 제도와 느려터진 부동산 직원과 변호사(내가 고용한 변호사는 나무랄 데 없었으나 상대쪽이 문제) 탓을 하기엔 나의 변덕과 잘못된 판단이 주된 요인이었다. 런던에서 흔하디 흔한 공원이 주변에 없다는 것, 창이 한쪽으로만 나있다는 것 등 계속 단점만 보였고, 그러면서도 빠른 결정을 내리지 않고 질질 끌려갔다. 


결정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는 결론에 이른 건 월셋집 부동산 직원에게서 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을 통보 받은 날이었다. 갑자기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게 현실로 느껴지며 10만 파운드를 덜 내려고 다른 집을 택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10만 파운드 자체는 집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거니까 나중에 팔 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문제는 취득세 구간이 달라져 세금을 거의 두 배 내야 해 망설였던 것. 하지만 이미 살아본 집이라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간과했다. 새로 들어갈 집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겪지 않아도 되고 이미 들어와 있으니 이사할 필요도 없는데. 그날밤 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으로 지내던 차에 에어비앤비는 영원히 재택근무를 해도 된다는 회사 정책을 발표했고 사무실에 걸어갈 수 있는 동네에서 집을 고르던 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면서 더더욱 프로보스트를 사겠다는 의지가 약해졌다. 이미 이사 나가야 하는 날짜를 받아둔 상태에서 제3의 집을 찾는 건 불가능이라 꾸역꾸역 계약을 진행시켰는데, 마지막 한 방이 계약서 사인을 며칠 앞두고 발생했다. 사무실 이전 소식. 결국 계약을 엎었다.


이삿짐 센터 예약과 인터넷 주소 변경 등 모든 이사 준비를 마친 시점에서 그렇게 계획이 어그러졌다. 다행히 월셋집에 한 달 정도 더 있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고 얼른 새로운 월세를 구하기 시작했는데 하필 월세 시장이 가장 치열한 7월. 게다가 6개월 사이에 월세가 말도 안 되게 비싸진 상황. 부동산 사이트에서 집을 찾아 보러 가기로 시간 약속을 하고 가는 길에 이미 누가 계약했다며 취소되는 경우가 연이어 발생했고, 가서 본 집은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었다. 이러다 길에 나앉겠다는 위기감이 들어 고민하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와프의 부동산 직원에게 돈 더 낼테니 나에게 집을 팔아달라는 전화를 했다. 직원은 집주인에게 말해보겠다고 했지만 다음 날, 이미 계약 절차가 많이 진행됐고 집주인은 하루라도 빨리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기에 안 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결국 8월 초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집은 정말 인연인가보다. 나에게 팔아달라고 애걸복걸한 지 3개월이 지난 10월 어느 날, 그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집을 사기로 한 사람이 막판에 계약을 취소했다고.(아직도 계약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말에 이미 놀랐다.) 영국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대출 금리가 폭등하면서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아직 관심 있으면 나에게 팔고 싶다고.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집인데, 난 이미 1년 계약으로 월세를 구해 그 집을 나온 상태였고, 이미 마음고생은 할 데로 했으며, 당시 1%대로 확보했던 대출은 기한이 지나버려 지금은 6%대라고 하니, 여러모로 상황이 달라졌다. 


런던에 집을 사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수시로 부동산 사이트를 들어가본다. 2023년에는 나와 인연이 맞는 집이 나타나기를 빌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II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