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토끼 Sep 17. 2022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II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여왕 일반공개 조문

10일 간의 장례 절차


D+6(9월 15일)

여왕 조문을 하고 싶은데 줄이 어마어마할 것 같아 전략을 세웠다. 첫날인 수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기간 중 가장 줄이 짧을 것 같은 목요일 새벽을 공략하기로. 영국 정부의 유튜브 줄 현황을 보며 잠이 들었고 새벽 5시에 눈을 떴을 때 줄이 2마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준비해서 나갔다. 원래는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춰놨으나 신경 써서인지 잠을 설쳐 늦었다. 공항의 보안검색보다 더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정부 안내에 따라 금지 품목을 꼼꼼이 살펴보고 짐을 챙겼다. 대기가 길어질 것을 대비해 에너지바, 빵, 귤과 물을 챙기고 책도 한 권 넣었다. 추울까봐 스카프도 넣고 비올까봐 우산도 넣고. 


1~4. 일반공개가 시작된 수요일 오후 5시 이미 3마일로 시작, 내가 줄을 선 목요일 새벽 6시가 2마일로 가장 짧았고 이후 계속 길어져 금요일 새벽 1시에는 5마일에 달함
5~6. 금요일 오후가 되자 더 이상 추가로 사람을 줄세울 수 없을 정도로 줄이 길어졌고 대기 시간은 25시간을 넘겼다.


세 단어로 정확한 GPS를 찍어주는 What3words를 이용해 줄의 끝을 찾아 섰다. 자연스럽게 앞뒤 사람들과 인사했고 여왕 얘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정부에서 안내한 대로 줄은 빠르게 줄어 책을 꺼내 읽기 애매했지만 덕분에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템즈 강변을 따라 쭉 서쪽으로 가다가 램버스 브릿지를 건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입장하는 루트라 쾌적했다. 자원봉사자 요원들과 경찰 인력이 충분했고 중간중간 간이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어(휴지까지 완비) 준비를 철저히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런던 아이에 다다르자 팔찌를 나눠줬고 그뒤로는 계속 팔찌 검사를 해서 대신 줄을 서주거나 끼어들 수 없게 통제가 잘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 정원에 들어선 게 8시 반 정도니까 줄을 선지 2시간 반만에 2마일을 걸었으니 100m 가는 데 4분 정도 걸린 셈이다. 정원에 들어선 다음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지그재그로 촘촘하게 줄을 세워 오히려 다 와서 두 시간이 더 걸렸다. 보안 검색대가 가까워지자 너도나도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 먹기 시작했고 자원봉사자들은 버릴 음식 중 뜯지 않은 건 기부처에 보낸다고 따로 수거했다. 손 세정제와 립스틱까지 압수하는, 공항보다도 철저한 보안 검색을 통과한 후에 건물 입구에 다다르자 사람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모두 옷 매무새를 다듬었고 머리를 정돈했다(조문하는 사람들을 실시간 중계한다는 안내도 있었다). 원내로 들어서자 고요함이 맞이했다. 가슴이 떨리면서 동시에 차분해지는 묘한 분위기였다. 높은 천장의 웨스트민스터 홀 한가운데 경비병들이 왕관과 보라색 천이 덮인 여왕의 관을 지키고 있었다. 관 양쪽으로 두 줄로 줄지어 사람들이 여왕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줄이 지체되지 않도록 아주 잠깐만 멈췄다가 바로 나아가야 해 아쉬웠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총 4시간 반이 걸려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고, 일반 대중도 여왕을 떠나보내는 의식에 참여할 수 있게 조직적으로 준비한 영국 정부와,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사람 없이 질서 있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영국 국민들에게 감탄한 하루였다. 


7. 아침 6시, 블랙프라이어즈 브릿지 근처에서 줄 끝을 찾으면서 찍은 영상


8. 런던 아이 근처에서 받은 팔찌  9. 템즈강 남쪽을 따라 줄서는 루트를 마련해 쾌적하다  10.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 정원에 들어서면 지그재그로 줄을 서서 여기서 한참 걸린다


나머지 장례 절차는 다음 편에...

매거진의 이전글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