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슬픔
[지극히 개인적인 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한 달이었는데 새벽 감성으로 적어본다.
TV를 소유한 적이 없고 부모님 집에 있을 때도 리모콘 만질 일이 없지만 2023년 연말을 보내려 한국에 들어갔을 때 12월 29일 MBC 연예대상을 꼭 챙겨봐야지 머릿속으로 메모를 해두었다(까먹을까봐 엄마한테도 말해놓음). <나혼자 산다>로 지난 몇 년간 나에게 큰 위로를 준 기안84가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로 더 인정받으며 강력한 대상 후보였기 때문에. 응원하는 마음으로 시청해야지.
이틀 전인 12월 27일, 방에서 일하고 있는데 엄마가 문을 빼꼼 열더니 "이선균 죽었대". 난 입틀막을 하며 한동안 아무 말을 못했다. 아니야 아니어야 해 하며 바로 검색했지만 팩트를 돌이킬 순 없었다. 바로 든 생각은 지금 아내인 전혜진은 어떤 심정일까, 마지막 나눈 대화가 원망이나 질책이었으면 어떡하지. 어떻게 살지. 남은 가족을 생각하니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옆에 있으면서 원망도 하고 미워도 하며 함께 했어야 하는데, 이제 그런 마음조차 죄책감으로 남았을 생각을 하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의 대사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아니야”가 맴돌며 아무 일도 아닐 수 없었던 이선균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뒤로 온통 이 생각으로 며칠을 보냈다.
나랑은 상관없는 연예인인데 왜 이렇게 내가 힘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뭐라고. 괴로워하다가 지금 가족들이 겪을 고통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닌데 난 내가 힘든 게 더 괴롭구나 싶어서 죄책감에 휩싸이기를 반복.
내가 '민감자'라고 번역되는 Highly Sensitive Person(HSP)이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Empath(초민감자 또는 공감자로 번역)이기도 하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2022년 이태원 참사 때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힘들어 했었다.
Empath의 정의와 진단은 아직 명확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주로 언급되는 특징은:
(출처: uktherapyguide.com)
과도하게 민감하고 감정적이다.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본인의 감정처럼 느낀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없는데도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쉽게 상처를 받아 갈등을 회피한다.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자기 자신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타인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알아챈다.
자극을 과도하게 느껴 자연에서 휴식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압도되는 감정을 느낀다.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을 감지하면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하고 나면 감정 소모 때문에 재충전이 필요하다.
소리, 냄새, 수다, 불편한 이미지 등에 민감하다.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영국에는 세계 최초로 Ministry of Loneliness 부처가 신설됐다) 관련 서적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 아직 나는 이런 나의 민감성을 잘 관리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이선균의 발인일에 방송된 MBC 연예대상은 결국 시청하지 못한 채 다음 날 기안84의 수상을 마음속으로 축하했다. 이선균 관련 기사나 유튜브 영상을 외면하고 (뒤늦게 수사 과정의 문제를 제기하고 관련 성명을 발표하던데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태계일주3>를 챙겨보며 마음을 달래온 한 달이었다. 충동적으로 글을 썼지만 이렇게 속내를 적는 게 grieve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두려워 해서 충분히 슬퍼하는 방법도 아직 터득하지 못함. 누구는 남편을, 아빠를 잃었는데 난 주기적으로 다시 보던 <나의 아저씨>를 한동안은 못 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죄책감을 느끼는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