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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맑음 Dec 12. 2020

코로나 통금과 진짜 통금

하면 안 되는 것들이 원래 많았다.

      

 최근 모임에서 통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통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하나 둘 자연스레 본인들의 통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0시, 9시, 11시 등 각각 다양했다. 통금이 있는 집은 많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말하기 부끄러워져 굳이 통금이라는 단어를 꺼내진 않는다. 물꼬가 트이니 각자의 통금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나도 독립하기 전에는 10시 전에 들어가야 했다. 대학생 때 유일하게 친해진 친구는, 나와 똑같이 통금이 있었다. 10시까지 들어가야 하는 우리는 6시에 술을 미친 듯이 마시고 빠르게 취한 후 집 문 앞에서 술까지 깨고 들어가야 했다. 연대감으로 친해졌다. 지금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진짜 못할 짓 했다고 이야기하며, 한숨을 쉬면서 웃는다.

 주위 사람들에게 통금에 대해 물어봤다. 대부분 통금이 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쓰럽게 쳐다본 후, 나는 그런 거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진짜 통금’이 존재했다. 통금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일정 시간이 되면 꼭 부모님이 전화가 온다. 예전에 통금은 여자들만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서른이 넘어가는 남자들도 통금이 있는 사람들이 천지였다. 10시, 11시에 맞춰서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거짓말을 한다. 야근하고 있어요, 친구 만나고 있어요, 출장가야 해요, 결국 똑같은 통금 아닌가 싶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을 조용히 시키거나 본인이 조용한 곳으로 간 후, 친구 집에서 잔다고 말한다. 통화중에는 다들 약속 한 듯 조용히 해주고, 통화가 끝나면 다들 원래대로 돌아온다. 다들 거의 배우들 급이다. 이성과 여행 갈 때, 친구 집에서 잔다고 할 때는 각자 집에서 거짓말 담당으로 입을 맞춰주는 친구가 있다. 내가 여행갈 때마다 집에 A친구와 간다고 하면, A친구는 본인이 이 외박할 때 나를 사용한다. 서로 너무 많이 사용했으면 품앗이처럼 새로운 친구 B친구가 등장한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입을 맞춰준다. 왜 이런 짓까지 하냐면, 믿기지 않겠지만 아직까지도 인증 샷을 원하는 부모가 있고, 영상통화를 시키는 집이 꽤 많기 때문이다.


 통금이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통금에서 오는 간섭과 잔소리 때문에 독립했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이들은 그것들 때문에 독립 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가족들 천불 터지는 소리다. 그러나 사실 간섭과 잔소리라는 가벼운 단어들 때문에 독립이라는 큰 결정을 하기는 힘들다. 가벼운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설명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서사를 남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느니 남들이 말하는 잔소리, 간섭이라는 단어로 퉁치고 넘어가는 게 편하다. 나 또한 잔소리 및 간섭으로 인해 독립한 케이스다.

 예전에 통금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주위에서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화를 받지 말고 잠수를 타라, 형제들 중에서 누가 미리 길을 닦아놓으면 수월하다, 그냥 한 번 싸워라, 등의 이야기를 한다. 나도 그런 적이 왜 없겠는가. 통금을 참고 사는 사람들의 케이스는 두 가지다. 지쳤거나, 가족도 이해가 되거나. 누군가가 전화를 받지 않고 연락이 되지 않을 때의 치솟는 불안감과 초조함, 걱정을 알고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 남녀불문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햇수가 쌓여가고 다른 집들과 달라지는 내 집을 보면 약간 과보호의 느낌이 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제 부끄러워 이러저러한 집안 사정을 말하지 못한다. 돌아올 반응이 뻔하니 타인에게 넋두리하기도, 말하기도 귀찮다. 10시까지 집에 가야 하면 8시부터 초조해진다. 통금 때문에 약속이나 모임을 잡을 때도 차질이 생긴다. 집에서는 사회생활 취급을 해주지 않는다. 말싸움하기 싫어진다. 지친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 하나 때문에 내가 해보고 싶었던,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멀어진다.      


 통금은 걱정에서 오는 잔소리일 수 있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자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가족이 많아 생기는 금기인 것 같다. 자식들은 부모가 원하는 통금을 지켜왔다. 통금을 지켜주는 것은 착해서도 아니다. 가족을 존중해주기 위해 약속을 지켜주는데, 그에 대한 대우는 돌아오지 않고 당연시하기에 갈등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닐까? 당신의 자식들은 이미 자랐고, 성장했고, 더 이상 아이가 아닌데 아직까지 아이로 본다. 부모들 눈에는 다 애라고 해도 성장하는 데 있어서 존중은 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만 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집집마다 일종의 협박 아닌 협박이 많이 존재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생기면, 너 그렇게 마음대로 살 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는 소리가 오간다. 이 집이 내 집인데 어딜 나가란 말인가? 갈 곳이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가라고 하는 것은 참, 치사하다. 태어나기 전에 선택할 권리도 주지 않아 놓고 부모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당신들에게 맞추라는 것은 폭력이다. 결국, 이것도 자식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학창시절 성적을 일정 이상 받지 못하면 핸드폰을 뺏어버리는 행위, 용돈을 끊어버리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면 아이는 항상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한다. 나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 돈을 모아야 하고, 어떠한 행동을 하면 금지를 당하니 거짓말을 대비해놓아야 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겉으로 멀쩡하게 보여도 어린 시절 멈춰버린 부분이 생긴다. 그러면 우리는 내 안의 덜 자란 어린 부분 때문에 뒤늦은 사춘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진짜 통금'조차 없는 집도 있다. 소위 방목형.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산다. 그들은 통금이 있는 집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그리고 통금이 있는 친구들이랑 놀면 분위기를 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좀 짜증난 적이 많다고 했다.      

 코로나블루로 우울함에 대한 이해의 계층이 넓어졌다. 우울은 정신상태가 나약해서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울의 이해가 없어서 툭, 하고 뱉는 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준다. 코로나로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지니 “다들 힘든 때”라고, 이해를 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


통금이 있는 집, 집안의 간섭이 심한 친구를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을까?


 마스크를 처음 낄 때 갑갑하고 불안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곧 있으면 1년이 되간다. 이제 마스크 없이 다니는 것은 핸드폰을 두고 나왔을 때만큼 불안하게 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괜히 불안해진다. 물론 코로나 통금은, 9시까지만 밖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기에 진짜 통금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하면 안되는 게 많아졌다. 여행, 노래방, PC방, 술집 등을 못 가게 된지가 오래 되고 시간이 갈수록 다들 지쳐가고 있다. 마스크를 오래 끼고 다니니 언젠가 코로나가 종식되더라도 마스크를 끼고 다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을 하고 나서도 가족들에게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으면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들도 이미 통금에 대해 집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을 것이다. 집에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린 사람도 있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당한 경우도 있다. 용돈이 끊기고 외출금지를 당한 집도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뭐, 심금을 울리는 문자폭탄으로 반강제적으로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로 지쳐도 어쨌든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듯, 무기력해져가듯, 그들도 그렇다. 몇 십 년 동안 통금이 있는 상태로 살아가면 더 이상 집에서 반항 할 힘이 없다. 마스크를 당연하게 껴 온 우리들처럼, 그들도 당연하게 통금이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코로나 이전에도, 하면 안 되는 것이 많았다. 코로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들에겐 그저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몇 개 더 추가 됐을 뿐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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