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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무 Jan 27. 2021

나의 방구석 여행기

의식의 흐름대로 떠나보았다



매일 저녁 숙소 옥상에 올라가 동화 같은 핑크빗 일몰을 보고 있다. 숙소 바로 앞 모스크에서 하루의 4번째 기도인 마그립을 올리는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오늘 기도의 목소리는 익숙하다. 나랑 경찰과 범인(술래잡기) 놀이를 했던 6살 남자 아이다. 나는 무슬림도 아니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기도문이지만 그 시간만 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감사의 마음을 어딘가에 올려야 할 것 같다. 지금 내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2022년 겨울 인도네시아 롬복에서


copyright. instagram @doni_raynolds



작년 이맘때 즈음 쓴 일기다. 작년 겨울 서핑을 하기 위해 발리에 3개월 동안 있었고,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한국에 돌아왔다. 3년째 겨울마다 떠나던 서핑 트립을 가지 못하니 우울함이 밀려온다. 그 우울감을 이겨내기 위해 이번엔 방구석을 여행 해본다.


예전엔 나의 육신이 이끌고,

영혼이 머무는 곳이 여행지였다면

이번엔 나의 영혼만 보내기로 한다.


여행 타입은 즉흥적인 편이다. 계획 없이 사는 사람이 여행 계획을 짜보았자 다 소용없다는 걸 진즉 알고 있다. 원래 육신이 해외에 나가 있어도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그저 삼시 세 끼를 챙겨 먹고 서핑이나 하며 사부작 사부작 지내는 편이다. 그러므로 이번 여행에도 종착지는 없다. 사냥개가 사냥감을 찾듯이 오늘도 집안 곳곳을 어슬렁 거리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그곳이 나의 여행지인 셈이다.



어느 여행지동네식당

여행에서 큰 기쁨을 주는 건 역시 먹는 부분이 크다. 버섯 리조또를 처음 만들어 봤는데, 세상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왜 그동안 안 해 먹었을까 놀라고야 말았다. 표고버섯에 올리브유와 레몬즙으로 조물조물 무쳐 올린 가나쉬를 한입 먹고나니 이미 영혼이 여행지에 도착해 있었다. 이번 여행지에서는 셰프가 되어 1년 치 식단을 짜버린다. 최근 인기가 많은 메뉴는 숙주와 청경채/배추/새우를 넣은 쌀국수, 토마토 프리타타, 퐁팟 뚜 카레와 게 튀김이다. 작년에 갯벌에서 직접 잡은 게를 얼려 둔 것이 있어서 무참히 튀겨버렸다. 맛보다 재고 관리에 특화된 셰프인 것 같다.




바르셀로나

가끔 축구 보는 걸 좋아해서 언젠가 바르셀로나 홈 경기장인 캄프 누에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바르샤 경기였다. 맙소사. 이 경기는 꼭 봐야 돼! 프로젝터를 연결하고 (스크린이 없어서) 빈 벽에 쏘니 어느새 나의 영혼은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에티오피아

어느 날은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로 떠나서 생두 한 줌을 사 온다. 그 지역의 어머니처럼 나도 낡은 솥에 콩을 볶아 본다.



어느 여행지의 산책길

한 뙤기의 땅도 없어 풀 한 포기도 못 심는 비참한 도시 노동자 생활을 오래 한지라 가드닝에 로망이 있다. 공중에 붕-떠 있는 아파트 생활이라 늘 흙이 그립다. 어딜 가나 비슷해 보이는 아파트 조경 말고, 집집마다 얼굴이 있는 소박한 정원 산책을 그리워하며 화분을 몇 개 샀다. 파도 물에 꽂아두고 키워먹는다. 꽃도 조금 샀다. 원래 이 여행에선 식비를 제외한 여행 경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가성비 갑인데, 이번엔 사치를 조금 부려봤다. 만족도가 매우 크다.


3일 만에 폭풍 성장한 파



스위스 만년설산

꽃을 산 김에 기념품도 좀 샀다. 두 발로 산을 오른 지 너무나 까마득하여 스위스에 만년 설산을 바라보며 크게 한번 숨을 쉬어본다. 와- 살 것 같다. 그동안 숨을 안 쉬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공기가 이렇게 맑고 청량할 줄이야. 이 순간이 너무 감동적이라 산에 오르기도 전에 산맥이 그려진 패브릭 포스터를 샀다. 여기가 티틀리스? 아니 몽블랑? 어디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자그마한 우리 집 정원 뒤에 스위스 산맥이 펼쳐졌다.







서핑트립

나의 여행엔 서핑 트립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내가 밥벌이 이외에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원동력이 바로 서핑이다. 하지만 이번 서핑트립엔 돈이 들지 않는다. 나의 영혼이 이미 바다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내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 시간대 별로 달라지는 바다의 빛깔, 바다라는 큰 여백과 다양성, 바다 위에 떠있을 때 누군가 안아주는 것 같은 따뜻한 햇빛이 그리워 더운 나라로 왔다.


이번엔 발리에 1달, 뉴질랜드에 1달 머물 예정이다. 뉴질랜드의 햇빛은 뜨겁지만 물은 차가우니까 비키니와 4mm 슈트도 함께 챙긴다. 5일을 여행하든 2달을 여행하든 나의 여행 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캐리어를 열어두고 그곳에 가져가고 싶은 것들을 쌓아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출발하기 1주일 전에 나의 애착 물건들을 선정해본다. 여행지에 가서 어떻게 생활할지에 대해 디테일하게 상상해야 한다. 그렇게 선정된 애착 물건들을 숙소에 배치해 놓으면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자 이제는 반팔 티셔츠를 고를 차례다. 더운 나라는 티셔츠가 많이 필요하다. 지난번에 티셔츠를 만들어 가져가 입었는데 역시 한국에서 만든 옷이 튼튼해서 오래입고 선물하기도 좋다. 바다에서 같은 티셔츠를 입으면 동지애가 느껴져서 재밌다. 그래서 이번에도 만들어본다. 요즘 어디서나 알로하 정신이 필요하기에 좋아하는 단어도 새겨본다. 지금 이 옷을 입은 채로 다음 여행지는 어디일까 어슬렁 거려본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로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영감을 받아서 나도 내 방 여행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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