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추수. 쉼없던 겨울
시골농사의 클라이맥스는 들녘에서 초록의 벼 잎이 노랗게 변해가는 시점부터 탈곡과 수매를 끝내는 시점까지이고, 그중에서 하이라이트는 벼를 추수하는 것이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빨리 넘어가기 시작하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남자들은 논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아직 여름날 햇빛과 물기를 한껏 머금고 있는 튼튼하고 억센 벼를 날카롭게 벼려진 낫으로 베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해 농사가 야무질 때는 한 손에 두 단이상 잡기 힘들게 볏단은 굵고 매달린 곡식은 묵직했고, 그만큼 농부는 천천히 나아갔다. 병충해가 깊었거나, 가뭄으로 물이 모자랐거나, 많은 비로 햇빛이 모자랐을 때, 벼 포기는 가벼워서 농부는 서너 포기씩 돌려 잡아 빠르게 베어 나갔다. 그런 해에는 일찍 일을 끝낸 사람들이 더 주막으로 몰려 손아귀에 여전히 남아 있는 허전함을 막걸리로 달랬다.
잘린 볏단이 들에서 가을 햇빛과 가을바람으로 적당히 마르고 나면, 농부들은 한 해 지은 벼농사로부터 최종적인 결실을 취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볏단에서 모든 볏알을 떼어내고 따로 모아놓는 작업인데, 이를 '바슴'이라고 했다. 바슴은 들판에 세워져 있는 수천 개의 볏단을 탈곡기와 가마니가 준비되어 있는 집 바깥마당으로 나르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집이 가슴 하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는 잔칫날이기도 했다. 28마지기를 4형제에게 나눠주고, 각자 주인행세를 하며 농사를 지었지만, 바슴은 같이 했다. 여전히 생산물의 통제권은 시아버지에게 속한 사유가 가장 컸고, 무엇보다 이렇게 모여서 하는 것이 무엇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바슴하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그녀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여자들은 새벽부터 모여 가마솥 가득 국과 밥을 했고 몇십 명이 먹어도 될 양의 반찬들을 준비했다. 이 날을 위해 그녀는 직전의 홍산장과 서천장을 돌며 수십 명이 이틀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재료를 준비했다. 홍산장에서는 주로 소고기 같은 육류와 채소들을 구입했고, 서천장에서는 생선과 젓갈 등을 구입했다.
밥과 국이 준비될 즈음 근방의 건강한 농부들은 한 해동안 자기에게 잘 익숙해진 각자의 지게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아침밥을 든든히 해야 들녘에서 집까지 볏단을 짊어지고 나르는데 문제가 없을 터였다. 집 소는 하루에도 수차례 볏단이 가득 실린 구루마를 끌고 힘겹게 오르막길을 걸어 올랐다. 들녘에서 아랫마을까지는 비교적 평지여서 쉬지 않고 이동했고, 거기서부터 집까지는 오르막이어서 어른 두서너 명이 달라붙었고 아이들도 어른들 뒤에 붙어 힘을 보태었다. 멀리서 보면 사람이 밀고 올라가는 것인지 소가 끌고 올라가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소가 아랫마을에 도착할 때를 그녀는 귀신같이 계산했다. 소가 올라올 길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아랫마을로 내려갔고, 떨어진 볏줄기를 줍고 깊이 파인 곳은 주변의 흙으로 메꿔주면서 구루마가 올라간 오르막길을 천천히 따라 오르기를 반복했다.
"인숙이 엄마 어디 갔어?" 부엌에서는 그녀를 찾아 사람들이 두리번거렸다.
"구루마를 밀고 올라오는 오르막길에 볏단이나 볏줄기가 많이 떨어진다고, 그거 주우러 나갔어" 그녀를 잘 아는 석규 엄마가 시큰둥하게 사람들에게 알렸다.
"아이고. 허허.. 그거 떨어진 게 얼마나 된다고. 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한데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웃으면서 응답하였다.
"그 볏줄기 하나 둘이, 구루마나 지게에서 떨어져 내리고, 진흙바닥에 뒹굴어 섞여 있는 걸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다고 하네." 석규 엄마가 다시 한번 시큰둥하게 그녀를 대변했다.
"허긴, 여자 몸으로 봄날 여름날 내내 논바닥에서 살았으니까, 한 톨 한 톨이 아까울 거야." 듣고 있는 동근이 엄마가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멀게는 5리 정도 떨어진 논에서부터 농부들이 지게 가득 볏단을 짊어지고 줄을 지어 이동했고, 그 사이사이로 아이들이 물과 막걸리를 들고뛰어다녔다. 지게를 진 어른들은 누가 정한 것은 아니지만 쉬는 곳이 일정하여, 꼬맹이들이 물과 막걸리를 나르는 게 수월하였다. 점심 경이되어 들녘 볏단의 절반 정도가 뒷마당에 모였을 때, 남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패는 탈곡을 시작하고 나머지 한 패는 남아있는 볏단을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 어른 대여섯이 발판에 발을 올려놓고 구르기 시작하면 수십 개의 갈고리를 몸통에 박은 원통이 크게 회전하면서 차례로 들어오는 볏단에서 벼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 탈곡기 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앞마당 부엌에서 일하던 여자들도 잠시 밖으로 나와 자신들의 땀이 박힌 볏알이 비로소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슴은 한 해 논에서 이뤄진 모든 노동의 결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가마니에 물리적으로 담아두는 과정이었다. 농부들은 가마니에 담기는 햇벼가 생물학적으로 만져지는 벼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들이 봄부터 바슴 직전까지 쏟아낸 땀과 노동의 물리적 결정체인지 헷갈려했다. 동네 사람이 다 모여하는 집단적 수동적 작업이었지만, 볏단에서 털리는 벼의 수와 가마니에 담기는 벼의 숫자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볏단을 탈곡기 담당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도, 탈곡기를 밟아 회전시키고 벼를 터는 작업을 하는 메인 작업자들도, 다 털린 볏단을 다시 모아 털리지 않은 벼가 있으면 일일이 손으로 훑어내는 사람도, 팔팔한 벼만 잘 모아서 가마니에 퍼담는 사람도, 각자의 과정에서 허투루 흘려지는 벼는 없도록 하였다. 혹시나 볏단에서 털어지지 않는 벼가 아궁이에서 발견될 때마다, 그 벼는 아궁이 불에 잘 구워져서 팝콘 같은 간식처럼 아이들에게 몫이 되었다.
바슴하는 이틀 동안, 바깥마당에 산처럼 쌓아놓은 볏단은 점점 낮아지고, 햇벼를 가득 채운 볏가마니는 마당 한구석을 가득 채워나갔다. 가끔 벼를 가득 담은 가마니가 덜 여며져서 볏알이 새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녀는 귀신같이 찾아내고 마른 볏짚으로 구멍을 막거나 가마니 입구를 더 튼튼히 새끼줄로 여몄다. 이튿날 저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흥건히 취했고,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고, 그 집의 그 해 농사의 성공을 감탄했고, 한 해 모든 일이 끝났음을 자축했다.
바슴이 끝난 다음 날, 집 바깥마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가을 이슬을 머금은 채 고요하게 가라 앉았다. 그 시간, 거기서부터 그녀만의 가을노동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우선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벼가 날아갔을만한 범위를 넓게 정하고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흩어진 볏알을 쓸어 모았다. 탈곡기에서 볏알이 날아오는 것을 받아주기 위해 깔아놓은 멍석의 한쪽 끝을 잡고 탈탈 털어가면서 멍석을 말아 정리했다. 멍석에서만 한 되가 넘는 볏알이 걷혔다. 탈곡기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잔 볏짚들과 볏알을 훑어내렸고 탈곡기 통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볏알 더미를 두손을 깊숙히 집어넣어 최대한 끌어냈다. 이렇게 뒷정리를 하고 바깥마당이 원래 모습으로 정리되었을 때, 두 말이상의 잃을 뻔 한 볏알이 모여졌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텅 빈 가을 들녘으로 나갔다. 육철낫을 들고 논두렁을 따라 봄 내내 심어놓은 콩을 수확하였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서 콩대는 제법 나무처럼 단단하고 두꺼워져서 왜낫으로는 수확이 어려웠다. 거둬들인 콩대는 따듯한 가을 햇볕에 사나흘 말린 후 도리깨질로 털어내고 부는 가을바람으로 콩과 콩깍지를 분리해냈다. 한 바가지를 담아 들고 가을바람 위로 살살 떨어트리면 잘 영근 콩은 밑으로 떨어지고 가벼운 콩깍지, 가을 먼지들은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잘 영근 콩은 다시 하루 이틀 따로 말리고, 다시 제대로 된 콩과 벌레 먹거나 영글다 만 콩으로 골라냈다. 평평한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 동그랗게 잘 영근 콩은 쉽게 굴러 내리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밥상 위에 남아 따로 모아 버려졌다.
그런 작업을 거쳐 그녀는 가을마다 100kg(5 포대) 정도 콩을 손에 쥐었다. 그중 4 포대는 시장에 팔아 현금으로 간직했고, 나머지 한 포대로는 두부를 만들었다.
겨울, 쉼없던
그 시절 농촌은 쌀을 생산하는 것이 농사의 중심이어서 봄/여름/가을을 일하고, 그 결실로 한 겨울을 나는 방식이었다. 겨울에도 일하면 소득이 두배가 되는 얘기는 좀더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 의식이 좀더 깨어난 후의 이야기이다. 60년대 그 곳은 조선말의 모습을 올곳이 간직한 전 근대적인 농촌마을 바로 그것이었다. 일제시대나 6.25전쟁을 겪기는 했으나, 이 곳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거나 역사에 회자될 정도의 모진 역사의 터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심 밖에 존재하는 미약한, 어떤 곳이었다.
서천읍내에서는 40리 이상 떨어져 있었고, 사람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지리적으로 전투/전쟁의 최전선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하루 세 끼를 잘 먹고, 추위를 버티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해결되면 더 이상의 고민거리는 없었다. 더 나아질, 더 잘 살아볼 궁리를 하지 않았다. 한 해동안 육체노동에 시달린 남자들은 겨우내 다가올 봄을 두려워하면서 겨울이 지나는 걸 아쉬워한 채 빈둥빈둥 놀고 지냈다.
다만, 28마지기 중농의 집은 남들 같지 않게 겨울에도 일감이 줄지 않았다. 특히 여자들은 항상 바삐 찾아지고, 불려졌다. 남자들이 지붕을 새로 고치고 강녕을 땔깜으로 채우는 것으로 늦가을 일을 마치고 휴지기로 들어가는 반면, 여자들은 들에 이삭줍기, 집짐승 겨울나기 준비하기, 매일같이 먹이기, 집안 겨울나기 도배, 문마다 창호지질, 추석부터 시작되는 각종 절기/제사 준비등으로 하루해가 짧았다. 어떤 일을 하건 그녀는 누구보다 민첩했고, 걸음은 누구보다 빨랐다. 여느 집보다 늦가을과 초겨울에 허드렛일이 많았지만 빨리 모든 일을 끝냈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좀더 많은 모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것은 근방의 여성들에게 꽤 괜찮은 수익을 가져다 주는 부업거리였다. 그녀도 시집오고나서 그 다음해부터 이 부업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가을걷이와 겨울나기 준비를 끝내고 그 다음날부터 모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모시로 돈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모시 속껍질을 사다가 입과 손으로 가르고 갈라 천을 만들 수 있는 가느다란 모시줄로 만들어 팔거나, 더 나아가 이것으로 모시천을 짜 내다 파는 것이다. 그녀는 상당히 활기차게 이 두 가지 상품을 만들어냈다. 첫 두 해는 모시줄만 만들어 내다 팔았으나, 천을 만드는 것이 더 이문이 좋다는 걸 알고난 다음부터는 모시천을 만들어 팔았다. 시댁에는 모시천을 만들 수 있는 모든 도구들이 이미 다 갖춰져 있었다.
다른 집 아낙네들도 모시나 천 작업을 제법 쉬지 않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녀는 항상 두 배를 만들어 냈다. 모시/천을 만드는 작업은 엄청난 손작업과 입술작업을 필요로 하는, 순전한 개인적인 작업으로, 아무리 뛰어난 숙련자인들 만들어내는 양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생산량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녀는 졸음으로 모시줄기를 틀어쥔 손이 저절로 땅에 떨어지고, 비벼대는 손이 무릎 위에서 스르르 멈출 때까지 모시줄을 만들었다. 한산장날 그녀가 들고 나오는 모시줄의 양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어느 겨울 밤, 목이 말라 잠깐 깨어난 그녀의 아들은 그녀가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모시줄 작업하는 모습을 꿈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녀가 모시줄기를 이빨로 갈라내고, 갈라낸 모시줄을 올려놓고 비벼서 하나의 긴 줄로 만드는 무릎은 오른쪽 무릎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반대편 무릎을 베고 누운 채,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면서 모시 작업하는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엄마는 잠 못 자고 모시하면서 왜 웃어?’
보통은 쉽게 잠이 드는 아이가 이렇게 묻자, 그녀는 이빨사이의 모시를 좀더 가는 가닥으로 씹어내는 동작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일이 장날인디, 조금만 더하믄 세 필이 되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렇지’.
아이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녀의 무릎위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의 겨울 야간작업은 낮에 좋은 일이 있었건, 언짢은 일이 있었건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좋은 일이 있었던 하루라면 그것을 생각하면서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모시줄 작업을 하였고, 시어머니와 관계를 포함하여 특별히 언짢은 일이 있었던 하루이면, 사람을 혹은 그 일을 곱씹고 원망하는 말을 중얼거리듯 내뱉으면서 모시줄 작업을 이어갔다. 모시 줄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는 양반집 아낙네가 자수를 놓는 것과 유사하였다. 좋은 일, 슬픈 일, 기쁜 일, 괴로운 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국 혼자의 시간으로 돌아오기 마련이고, 혼자의 시간에는 어떤 행위든 해야했다. 양반집 아낙은 자수를 놓으면서 속마음을 달랬고, 그녀는 모시줄을 만들면서 그 모든 시간을 뒤로 뒤로 내쳐 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모시를 만들어 내다 파는 일에 더 몰두할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수익은 누가 뭐래도 그녀의 수입이었고, 이 수입만큼은 누구도 뭐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벼한가마니(20kg)가 4만원에 수매될때, 모시줄 한 필에 2만원을 받았다. 한산장이었기 때문에 외지에서 모시줄을 사려는 도매상들이 끊기지 않았다.
모시줄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시 속줄기 한 포기가 2천원이었고, 한 포기로 대략 1.5 필의 모시줄을 만들어 낼수 있었다. 한산장을 드나드는 시골 아낙네들의 쓰린 무릎, 겨울날 부족한 잠, 모시줄기를 풀어내기 위해 닳도록 사용한 입술 등이 팔리는 가격과 원가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첫째아들을 낳다
그녀가 시집 온 마을은, 20가구 이상 살고 있던 제법 큰 마을이었고, 한 단계 넓은 범위인 ‘리’ 단위에서는 신봉마을, 절뜸마을을 포함하여 100여 채가 넘었는데, 그녀의 남다른 시집살이는 어느샌가 신봉리 전체를 넘어 근방의 마을까지 소문이 나있었다. 시아버지나 시어머니가 소문나게 괴팍스러운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소문은 늦게 시작되어 빨리 퍼졌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은 집 밖의 사람들이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 마을에서 제일 높고 큰 집에서 일어나는, 이 평상치 않은 일은 이내 집 밖을 넘었다. 왜 그 집안 어른들은 유독 큰 며느리를 차갑게 대할까? 하는 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의문이었다. 시아버지는 육 척을 넘는 키에, 기분이 닿으면 구성진 소리가락을 펼칠 정도로 일과 풍류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시어머니는 들일을 많이 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애매했으나, 시골사람 같지 않게 깔끔하고 품위가 있는 것으로 회자되었다. 이런 사유로 시부모 두 사람이 갓 시집온 며느리를 차갑게 대한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겐 의외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 그랬을까? 우선 그녀는 성격이 그리 친화적이거나 사근 거리지 못했고, 표정은 항상 화난 듯 굳어 있었다. 시부모들 보시기에 며느리는 사근 거리지 못하고 불만 가득한 아이로 보였다. 그들이 이 젊은 아이를 이해할 아량은 부족했다. 그 시절 그 곳을 사는 사람이란 어느 정도 즉자적이고, 생존의 본능에 충실한, 잘 먹는 게 일상의 가장 중요한 이슈인, 그야말로 부족적이고, 원초적인 사람들이었다. 배가 부르면 행복했고, 겨울이 오면 불안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앞으로 평생동안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살아갈 한 식구가 되기 힘들다는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는 뭔가 불만에 차있고 항상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아이였다. 불행히도 그에겐 둥지를 겉도는 아이를 깊게 포용할 여력은 없었다.
바닥이긴 하지만 양반집 출신인 것을 시기 혹은 본능적인 질투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 얼마나 일을 똑부러지게 잘하는지, 말솜씨나 몸태가 다른지 보자는 심산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가감없는 핀잔이 쏟아졌다. 거기에다 남편의 철없는 남동생들이 더해져 형수를 놀림감으로 대했다. 그건 상당히 노골적이어서 마늘을 다 빻아놓은 절구통에 일부러 모래나 흙 한 줌을 던지고 달아나는 식이었다.
첫째와 둘째까지 딸을 낳은 것은 그녀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오직 자신의 몸뚱이로 5마지기 논을 28마지기 중농으로 일궈 놓은 시아버지에게, 수컷자손은 직접적인 노동력이었고, 자신이 일궈온 부의 축적을 이어나갈 절대적 요소였다.
5마지기에서 28마지기로 늘리는 동안 그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만 듣는 사람일 수 없었음은 당연연하다. 술을 좋아하되 되도록 혼자 빨리 마시고 일자리로 돌아가는 타입이었다. 허울과 형식, 예의, 상호관계를 철저히 따지는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농촌 구석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는 유일한 길은 되도록 많은 사람과 깊이 어울리지 않은 것이다. 품앗이가 가능한 수준에서 모든 관계를 최소화했다. 동네 사람들과 그의 관계는 같은 동네 살긴 하지만 약간은 뜨악한 관계였다. 무리지어 어울릴 기회가 있어도 그는 반쯤 돌아앉아 일어날 기회를 엿보는 타입이었다.
그의 계산은 명확했다. 내가 5마지기에서 28 마지를 늘렸으니, 그다음 세대에서는 50마지기로, 그다음 세대에서는 100마지기로 늘리면 된다. 그건 단순한 만큼 강력하게 그를 지배하는 삶의 목표였다. 이런 그에게 손주 자리가 연속 딸인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그 불용납은 며느리에 대한 무시 미움 실망으로 나타났다. 둘째가 손녀로 태어나는 날, 그는 아이 얼굴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삼일 만에 일어나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녀가 건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핀잔과 그 핀잔을 묵인하는 남편에 대한 서러움이 겹쳐서,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셋째가 아들로 태어날 때까지 시부모와 그녀의 관계는 대략 그러하였다.
20살에 시집온 그녀는 그 다음 해에 첫째 딸을 낳았고, 23살에 둘째 딸을 낳았다. 26살에 셋째를 낳았으니, 시집오고 나서 6년 동안은 그러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셋째는 자라면서 영락없는 시아버지의 생김새와 골격을 닮아갔고, 그로 인해 그녀는 처음으로 집안에서 부족하나마 며느리 대접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시부모의 관계 혹은 그녀의 삶 자체가 정상적인(‘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과 유사한’) 것으로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사실상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그녀의 시부모들이 그녀가 아닌 그녀의 ‘출산물’로 인해 그녀에 대해 약간의 태도 변화를 일으킨 것일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뭔가에 쫓기듯 바쁜, 여전히 살갑지 않은, 이물스러운, 어떤 존재였다.
셋째가 아들로 태어난 것의 의미는 – 나중에 확인된 것이지만 – 그녀의 시부모들보다는 그녀에게 작용한 의미와 맥락이 훨씬 컸다. 시부모들은 겉으로 드러내 놓고 첫 손자를 기뻐했으나, 그녀의 마음속에선 모종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듯 했다. 그동안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으로 홀대받고 있다고 그녀 또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는데, 세째를 아들로 낳은 것으로 그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그녀 스스로 각인시켰다.
그녀는 주위의 배려에 상관없이 5일 만에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좀 달라져 있었다. 시간당/하루당 해내는 일의 양이 더 많아졌고, 더 빨라졌고, 눈빛은 더 바빠졌다. 그동안 시어머니에게 품고 있던 불만도 모두 그대로 누그러뜨리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들일이 아무리 바빠도 시어머니는 스스로 새참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더 빨리 움직여 해결하기로 했다.
'들에서 오전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최대한 빨리 아침에 지은 밥을 한통으로 모으고, 준비한 찌개와 국을 끌여낸다. 생선구이 등 밑반찬은 별도의 소쿠리로 모아놓는다. 일꾼에 맞게 빈그릇 수저와 국과 밥통을 한 양푼에 차곡히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밑반찬 소쿠리를 올리고 이 전체를 커다란 무명 밥 포대기로 덮어 머리에 이고 다시 들로 나선다. 오른손에는 숭늉 주전자가 들려있었다.'
셋째는 그녀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대부분 그녀의 등 뒤에 항상 붙어있었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셋째를 등 뒤에서 내려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