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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Jun 12. 2021

시집살이 1

시댁. 노동

20살 철없는 나이에 시집살이를 시작하는 그녀에게 시댁가족들이 전반적으로 친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시아버지는 원체 무뚝뚝한 편이었고, 시어머니는 그녀에 대해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은 부모들 사이 어딘가에 눌려있었다. 남편에겐 3명의 남동생과 1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들을 노골적으로 형수를 무시하거나 짖궂게 굴었다. 그들 모두 성실하게 일해서 어느정도 여유를 만든 부모(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덕에 근방에서는 드물게 고등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으나, 배움의 그릇은 그리 크지 못하였다. 근방에 많은 동년배들이 중학교를 마치면 대부분 논 몇 마지기를 맡아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세 명의 시동생들은 검정색 교복을 입고 서천읍에 있는 학교를 왔다갔다 했다. 공부의 크기는 늘지않은 채, 실속없는 겉 모양태와 이상한 자만심은 높아졌다. 그들에게 그녀는 질투심을 자극하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비록 가난했고 끝물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양반집 딸이었다. 자신들은 비록 농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까지 다니는 상황이었던 반면, 시집 온 그녀가 양반집 딸이라고 해서 잔뜩 뭔가를 기대하고 약간 주눅도 들었는데, 막상 중학교도 못나왔다는 것을 알았을때 일종의 실망감과 우월감이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나마 막내 여자 시동생은 성격이 쾌활하고 모나지 않았고, 일찍부터 교회생활을 시작하여 새로운 사고와 문물에 열려 있었다. 여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교에 진학하여 전도사가 된다. 


동갑내기 남편은 철든 남편이기보다는 철없는 청년에 가까웠다. 아직까지 집안 살림보단 바깥생활을 동경하고 배회하였다. 초반에는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불평삼아 전달했으나 남편은 매번 침묵했고, 그 후로 그녀도 그에게 침묵했다. 


그녀가 시집을 온 집은, 시아버지 혼자서 5마지기 논을 28마지기로 늘려놓은, 전형적으로 성실한 농사꾼 집이었다. 5마지기 논이 어떻게 젊은 시아버지에게 ‘확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자신의 것이 된 순간부터 젋은 시절 시아버지는 그야말로 악착같이 일하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는 새벽 5시에 소주 한 병과 김치 한 종지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네 발 쇠스랑을 어깨에 지고 나가 아침 8시까지 쇠스랑질을 하면 두 마지기 논을 갈아엎는 것이 거뜬하였다. 봄볕이 완연해지기 시작할 때 농부들은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하고. 보름이 지나 논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흙이 부드러워졌을때, 씨앗과 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농부들은 논을 갈고 쇠스랑으로 여미고, 써래질로 마무리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모내기가 시작되는데, 이때 쯤 시아버지의 손은 쇠스랑 자루만큼이나 단단해지고 매끈하게 굳은살이 박혔다. 시아버지의 쇠스랑은 일반적으로 남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폭이 넓었고 더 깊숙히 박혔다.더 깊이 갈리고 더 기름진 만큼, 가을에 그의 논에서는 더 많은 벼가 걷혔다.


그녀도 5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이제 갓 20살을 넘긴 새벽잠이 많은 그녀였지만, 28마지기 농사꾼 집 맏며느리의 삶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새벽 5시라도 여름날엔 이미 아침이 뿌옇게 시작되어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으나, 겨울에는 한치를 분간하기 조차 어려워 시집살이 초반에는 토방에서 부엌계단으로 내려갈때, 부엌 문턱을 넘어설때, 발을 헛디뎠고 무릎에 생채기가 났다. 부엌에는 아궁이 세 개에 가마솥이 걸려있었다. 왼쪽 큰 가마솥은 소 여물을 삶는 용도로 혹은 잔치나 큰 일이 있을 때 엄청난 양의 국이나 탕을 끓일 때 사용하였다. 가운데에는 아담한 크기의 솥이 걸렸는데, 주로 밥을 짓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른쪽에 걸린 큰 가마솥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크게 쓰이지 않아, 뭔가를 보관해두거나 하는 용도로, 가끔 엄나무 같은 약재를 끓여내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새벽 부엌에 들어서면, 그녀가 제일 먼저하는 일은 왼쪽 큰 가마솥을 열어 밤새 익힌 여물을 담아 소를 먹이는 일이었다. 커다란 붉은 고무다라에 여물을 가득 담아 맷져를 섞은 후 마당 건너 외양간 소 여물통에 부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가운데 가마솥에 어제저녁 불려놓은 쌀을 안치고 밥을 짓는다. 밥이 되는 동안 부엌 한 구석에 놓인 곤로을 이용하여 밥상에 올릴 찌게나 국거리를 준비했고, 잠시 틈을 내어 좁지 않은 마당을 쓸고나면 밥에 뜸이 들고 찌개는 충분히 끓고 있었다. 밥상은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차려서 부엌에서 안방으로 두번 날랐다. 남자들 밥상은 안방에 놓이고 여자들 밥상은 건넌방에 놓인다. 평범한 평민 농가에서도 양반의 규율은 적용되었다. 식사가 끝나면 두 밥상에 남겨진 음식을 모아 닭, 오리, 돼지, 개에게 먹이고, 설거지를 마친 후, 들로 향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 속도는 점차 그 동네 뿐 아니라 근방에도 소문이 났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 모든 일을 아이를 등에 업고 진행했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건사하기를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주 타박을 받았다. 아침준비가 조금이라도 늦거나 부족하거나 잘못되면 여지없이 식구들로부터 타박이 쏟아졌다. 특히 된밥을 싫어하는 시아버지는 보란 듯 숟가락을 내려놓고 누른밥이나 가져오라고 지청구를 내렸다. 빗자루질은 허리를 굽히고 빗자루 끝이 허리춤에 닿게 하여 최대한 낮은 각도로 해야 하는 것으로  잠시 허리를 풀고 빗자루를 좀 세워서 빗질을 하고나면 여지없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게으른 상놈들이나 저렇게 빗자루질 허는 것이지… 누구한테 배운 것이랴..

-빗자루질 하나 하는 걸 보면 심성이 보이는 법이여…


시집살이 초기에는 음식솜씨가 없다는 투박이 식사때마다 공공연히 쏟아졌다. 짜다, 싱겁다, 마늘 빻은게 곱지 못하다, 계란찜이 너무 익어서 딱딱하다. 반찬을 담은 접시가 정갈하지 못하다.. 어설프다...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막내딸이었다는 조건은 하등의 고려사항이 되지 못했다. 벼농사가 집안의 기둥인 집으로 시집을 온 이상, 며느리는 가급적 빠르게 적응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집들은 남편이 그 집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던 반면, 그녀의 집은 시아버지의 지위가 여전히 확고했던 것도 그녀의 시집살이에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다른 집들은 남자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 어느정도 어른으로 인정해주기 시작한다. 비록 한 두가지 못마땅하거나 실수를 하더라도 눈감아 주기도 하고, 쉽게 건네는 말도 조금은 조심스러워진다. 들에서는 젊은 아들(남편)이 더 많은 일을 하기 시작할때였으므로, 부모가 이전처럼 아이 다루듯 하지 않았다. 결혼한 남자사내도 자신이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는 자각에 행동거지와 말품새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말그대로 가장 혹은 어른으로 색깔을 급작스럽게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바꿔가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 집 사정은 좀 달랐다. 시아버지의 노동력과 기운이 집과 들녁을 가득 채웠다. 180cm 넘는 훨친한 키에 완력이 대단하여, 웬만한 젊은이들이 시아버지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였다. 남편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왜소한 편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는 불필요한 소리는 삼가고 행동은 조심하는 게 역력했다. 시집와서 서너 달이 지나자, 이런 구도는 명확히 드러났다. 그녀가 상황을 쉽게 바꿀 수는 없었다. 


눈길과 타박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로 묵묵히 밥상을 올렸고, 밥상을 내렸다. 내린 밥상에서 남은 것들을 모아 끼니를 후딱 처리하고, 곧바로 들로 나갔다. 들은 그나마 열려있었으므로 집 안쪽보다 나았다





고부간 



그녀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고부간의 관계 혹은 갈등으로 보기에는 좀 복잡하고 독특한 측면이 있었다. 그건 시어머니가 좀 더 독특했기 때문인 측면이 있다. 시어머니는 28마지기 중농의 농사꾼과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드센 들녘에 나가보지 않았다. 그녀가 시집오기 전에는 새참을 준비해서 들로 나르는 일 정도는 했으나 그녀가 시집오고 나서는 모두 그녀의 몫이 되었다. 무엇보다 시아버지가 자신의 아내를 절대 진흙 논밭에 들이질 않았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이러한 관계는, 워낙 독특한 것이어서 근방에서 꽤나 유명했고, 그 당시뿐 아니라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동네에서 아니 근방에서 시어머니는 가장 고왔다. 햇빛에 그을리지 않은 유일한 시골 아낙네였을 것이다. 사계절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을 떠나지 않았다. 집안에 머물면서 앞마당 뒷마당 화단을 돌보아 항상 새롭게 하는 일, 뒷광에 차례상과 손님상에 차려낼 것들을 바지런하고 정갈하게 준비하는 일, 한산장에서 떼어온 모시천으로 남편의 여름 모시 정장을 (손수 바느질하여) 만드는 일, 남편과 머무르는 공간인 안방과 골방(안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 등이 시어머니가 정성을 들이는 일들이었다. 유일한 나들이는 바쁜 한 철에 시아버지를 대신해서 장을 봐오는 일이었는데, 장 보러 나오는 그녀의 옷차림이나 품새는 새초롬한 부잣집 막내딸을 연상시켰다. 손에는 항상 고운 양산이 들려있었고, 깨끗하게 다려진 흰색 버선, 새하얗고 단아한 꽃무늬 구두를 신었고, 고운 긴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머리에는 손수 뜬 장식포가 살짝 얹혀 있었다. 시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거나 섞이기는 것이 싫어서 십리 떨어진 장은 혼자 걸어갔다 걸어갔고, 이십 리 떨어진 장은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급히 다녀왔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어째서 그렇게 독특한 대접받고 살았는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원래 약간은 부유했던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성격이 그러그러한 측면이 있었을 수 있었다. 귀하게 자라 자기만 귀한 줄 아는, 고약하지만 정이 가는 막내 타입이었을 것이고, 남편의 극진한 애정이 더해진 결과일 수 있다. 28마지기 농사꾼 집에서 시어머니는 어떤 들녘 노동도 수행하지 않았던 대신, 집안을 어느 집보다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꾸었다. 시어머니의 손끝에서 화단은 놀랍도록 정갈하게 봄 채송화에서 가을국화까지 한겨울을 제외하고 꽃이 지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자상한 말을 건네지 않았다. 시어머니로써 지시와 요구와 가끔 타박만이 오갔을 뿐이다. 일반적인 고부관계가 아니었다. 20살 차이 나는 두 여성은 여러 면에서 달랐고,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시어머니는 그녀가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급하고, 우악스럽다고, 여자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부엌살림하는 방식을 탐탁지 않아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바쁜 시골생활에서 들녘의 일에 품을 더하지 않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들일을 거두지 않더라도, 한참 바쁜 때에는 새참을 준비한다거나, 집안일을 좀 더 거든다거나 할 수 있는데 전혀 그런 ‘협조’ 혹은 ‘도움’의 행위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는 막내로 자라나, 조금은 자기중심적이었고, 각자 자기가 생각하기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상대의 말을 새겨듣고 반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그녀가 소통하는 경우는 참으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맏며느리에게 시어머니로서 살림살이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을 알려줘야만 할 때였다. 시어머니 대 맏며느리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건조한 대화가 오갔다. 맏며느리라고 해봐야 기껏 스무 살을 막내딸로 커 온 철부지일 뿐이었다. 게다가 친정집이 양아들과 양아들의 친아버지 손아귀로 넘어가면서 쫓기다시피 시집을 온 터라, 하다못해 밥 짓는 것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채였다. 스무 평생을 막내로 커온 그녀는 손이 거칠었고, 대부분의 살림살이에 대해 서툴렀다. 시집살이 초반에는 가마솥 밥을 태워먹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본인이 원하는 습기 정도의 흰밥이 아니면 시아버지는 밥상을 물리고, 속이 빈 상태로 들로 나갔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남편을 위해서, 며느리가 들어온 후 한동안 출입을 하지 않았던 부엌으로 나와 쌀 불려놓기, 물 맞추기, 아궁이에 불 지피기, 뜸 들일 때 아궁이 불 조절하기, 뜸 들이는 시간, 밥을 푸는 법 등을 세세하게 가르쳤다. 쌀은 그 전날 밤에 씻어서 물에 담가놓을 것, 그러면 밥 지을 때는 쌀이 살짝 넘칠 정도로만 물을 채워도 된다는 것, 밥 짓는 불은 장작이 아니라 짚불이나 솔잎 불로 지을 것, 한번 끓어 넘치면 아궁이에서 불을 살짝 밖으로 빼어 직접 가마솥 바닥에 닿지 않게 할 것, 그러고 나서 ‘적당히’ 뜸을 들이면 꼬들 거리지도 질퍽거리지도 않는 밥이 완성된다는 것. 시어머니는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고 손수 밥을 지었고, 그녀는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렇게 지어진 밥은 적당히 고들했고, 잘잘한 윤기가 흘렀다. 가마솥 바닥엔 보기 좋게 누룽지가 생겼다.  


가을걷이가 끝났을 즈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두부는 만들 줄 아느냐, 묵은 쑬 줄 아느냐, 김장은 해봤느냐, 생선은 어떻게 다듬어서 말려서 겨울을 준비하는 줄 아느냐, 베는 짜 봤느냐, 등을 물으셨고, 대부분의 질문에 그녀는 해본 적 없다고 답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가을 햇살에 여름의 따스함과 초겨울의 차가움이 섞일 때, 한해 들일을 마무리하고 조금이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시어머니는 밥 짓는 것을 가리킬 때처럼 여러 말없이 그저 손수 두부를 만들고 묵을 만들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하는 일을 옆에서 건성으로 지켜봤다. 그런 날은 그녀가 들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기도 했고, 그녀가 다른 곳으로 내뺄 수도 없는 날이기도 했다. 아주 날 것인 콩, 도토리, 상수리 같은 것들이 익히고 갈려서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것들로 만들어지기까지 가을 해는 전혀 길지 않았다. 


어느 아침을 치우고 나서, 시어머니는 뒷광에서 맷돌을 힘겹게 들고 나와 사랑방 쪽 마루 위에 걸쳐놓았다. 강한 솔로 구석구석 씻어내고 나서, 아랫돌에 윗돌을 끼워 맞추었다. 엉성하게 보이는 손잡이가 끼워지고 시어머니와 그녀는 각각 한 손으로 같이 맷돌 손잡이를 잡고 돌린다. 시어머니가 왼손으로 맷돌 손잡이를 잡과 오른손으로는 그 전날부터 잘 불려두었던 콩을 맷돌 돌아가는 박자에 맞춰 맷돌 구멍에 공급하기 시작한다. 맷돌 사이로 콩이 갈려서 하얀 죽처럼 흘러내리고 마루 밑에 놓인 커다란 함박에 차곡차곡 쌓인다. 두세 시간에 걸쳐 한 양동이 분량의 콩을 갈아내면, 한 함박 정도의 갈린 콩이 만들어진다. 일차로 갈린 콩은 삼베 보자기를 통과하면서, 삼베보자기 안에는 콩비지가, 밑으로는 뿌연 베이지 빛의 비릿한 콩국물이 남는다. 콩국물은 깨끗하게 떠다 놓은 맑은 지하수와 일정 비율로 섞인 후 커다란 가마솥에 부어진다. 가마솥이 중간 불로 천천히 달궈지면서 온통 부엌은 수증기로 가득했다. 소년과 소녀들이 괜히 신나서 할버니와 어머니 주변과 부엌의 안과 밖을 뛰듯 넘나들었다. 가마솥의 콩국물이 충분히 끓어 올라왔을 즈음, 아마 두부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간수’를 한 두 숟가락 섞어준다. 그러면 서서히 익은 콩국물들이 서로서로 엉기기 시작하고, 드디어 순두부가 만들어진다. 시어머니는 이 엉김 정도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간수를 좀 더 부을지를 결정하였다. 순두부가 만들어지기 무섭게, 서너 그릇 가득 떠서 내어놓으면 기다리는 남정네들이 미리 준비된 양념간장을 듬뿍 섞어 순두부를 들이켰다. 한 해를 고생하며 잘 보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으니.. 하는 의식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운 느낌과 향으로 그 해 농사가 얼마나 만족스럽게 되었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어느 집에서는 순두부에 막걸리와 소주를 곁들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집은 그 순간은 순두부와 그해 수확한 햇마늘이 충분히 들어간 양념간장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순두부 만들기가 좋았고, 누구보다 빨리 정확히 숙달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순두부로 배를 채우고 나면, 가마솥에 남은 순두부는 삼베 보자기로 둘러싸인 나무틀 위에 부어지고, 삼베 보자기를 감싸고 묵직한 것으로 눌러놓으면 두부로 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부는 깨끗한 물이 담긴 항아리리나 양푼에 보관되어 두고두고 밥상에 오르게 된다. 


시집 온 후 두 해까지는 시어머니와 함께 두부를 만들었고, 이후부터는 모든 것을 그녀 혼자서 해내었다. 



봄날 쟁기질


3 중순 아지랑이가 들녘에 스무스물 거릴즈음겨우내 고즈넉하던 들녘에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부지런한 농부는  주변으로 흐르는 물길 먼저 살폈다. 4월이 지나면서 들녘 논에 적당한 양의 물이 잡히면 겨우내 메말랐던 논바닥이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하고 농부들은 소를 기계삼아 논을 갈아엎었다누런 소는 나무로 만들어  쟁기를 달고 질척한 논바닥 사이로 뒤뚱뒤뚱 앞으로 나아갔다넓은 논바닥을   마리가 온전히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으므로농부들은  공백을 자신들의 힘으로 메꾸었다소가 당기는 것만으로는 쟁기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소가 당기는  70, 60,50으로 떨어지고 그때마다 농부가 미는 힘이 30, 40, 50으로 올라갔다농부가 미는 힘이 50 다다를  28마지기 논바닥은 모두 뒤엎혀 있었다봄이 지나면서 소의 다리와 사람의 다리는 동시에 말라가면서 가죽처럼 질긴 근육질로 변해갔다사람은 소가 당기는 쟁기와  몸이 되어  뒤에 붙었다.


농부는 쟁기를 오토바이나 자전거 손잡이 잡듯 위에서 아래로 놓아 잡는 게 아니라, 역기를 들 듯 밑에서 위로, 뒤에서 앞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잡는다.


봄 논바닥 쟁기질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물이 많아 더 질퍽거리는 논을 갈아야 할 때, 소는 더 이상 혼자서 쟁기를 끌지 못했고, 이때부터 소 옆에는 소를 끌고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 더 필요했다. 다른 집들은 이 역할을 남자가 하였으나, 이 집에서는 그녀가 하였다. 시아버지나 남편이 쟁기를 밀어 올릴 때, 그녀는 소의 목 위로 놓인 멍에를 움켜쥐고 소와 함께 진흙밭을 디디며 나아갔다.    


쟁기질과 써레질이야말로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농사로 한 식구를 먹여 살릴만한가 아닌가, 힘이 되는가 안되는가, 부지런한가 아닌가, 평생 이 노동을 참아내는가 못 참아내는가는 봄날 쟁기질과 써레질을 감내하는가 못하는가에서 갈렸다. 쟁기질과 써레질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농부는 더 많은 땅을 경작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런 농부들은 좀 더 깊이 갈아엎을 수 있으므로, 그 땅에서는 더 많은 곡식이 자랐다. 쟁기질과 써레질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육체적인 문제이기보다는 끈기와 인내의 문제였다. 고통을 이겨내는 남자는 막걸리 한잔을 해도 정신을 놓지 않았고, 이겨내지 못하는 남자는 결국 막걸리 한잔에 들판 그늘 어딘가에서 힘겹게 쓰러졌다. 쟁기질을 감당할 수 있는 농부는 어느덧 소 한두 마리를 더 거둘 수 있는 살림살이로 나아갔다. 그에겐 소를 반드시 거둬어야할 현실적인 이유와 경제적 토대가 마련된다.


이겨낸 자는 해마다 한 마지기 씩이라도 자기 소유의 논과 땅을 넓혀 나갔고, 이겨내지 못한 자는 할 수 있는 만큼만 소작을 부쳤다. 이겨낸 자들 중에 소를 더 많이 키워 부업화하는 자가 나타났고, 일찍이 경운기로 논을 돌려 기계식 농업을 시작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겨내지 못하는 자는 농사로 거둬들인 것으로는 제 식구를 충분히 먹이기에 부족하여 일종의 부업전선에 뛰어들게 되는데, 동네 상갓집에서 염을 한다거나 상여지기를 한다거나 동네 잔칫날 필요한 소나 돼지를 잡고 닦달해서 먹기 좋게 배분하는 일종의 임시 백정 노릇 등이 그것이었다. 이겨내지 못한 자들 중에는 한 방에 형편을 뒤집어 보겠다는 심리가 생기기 마련이었고, 이들은 긴 겨울 도박판으로 향했으나 결과는 항상 더 나쁜 것의 연속이어서 제 식구 먹일 마지막 쌀 한 가마니를 현금으로 바꿔었다.


그녀의 남편은 이겨냄과 이겨내지 못함의 묘한 경계선에서 항상 방황했다. 그의 아버지와 그녀가 없었다면 필경 이겨내지 못하는 쪽에 속했을 것이다. 힘은 남아돌았으나, 제 힘을 논바닥에 소모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남들보다 일을 빨리 마치는 편이었으나 일한 결과가 깔끔한 편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일을 빨리 마치고, 먼저 주막으로 향했고 술 동무들과 어울렸다. 가끔 술과 노동이 과하게 겹친 다음날, 남편은 다시 들판에 나오기를 거부하기도 했는데, 그때만큼은 그녀와 그녀의 시아버지가 같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내었다. 젊은 날에 여기서 주저앉으면 가까운 장래에 어떤 상황이 된다는 걸 시아버지는 얼굴에 박힌 주름처럼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어찌 되었건 한 평생을 지아비로 같이 살아가야 할 남자가 눈에 선히 뵈는 서푼짜리로 전락하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아버지와 그녀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은 자신도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어느 술 동기들보다 먼저 자리를 이겨내고 다시 쟁기와 써레가 기다리는 들로 향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시아버지와 그녀가 아니었으면 그녀의 남편이 농촌에서 사람 구실 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사람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쟁기와 써레를 지고 들로 나가는 흔하지 않은 풍경을 구경하였다. 남편은 그 모습을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누워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시아버지가 밀고 며느리가 소의 멍에를 끌면서 아침 쟁기질을 끝내고 새참 겸 잠시 휴실을 취할때, 남편은 슬그머니 나와 논두렁 끝에서 잠시 쉬고 있는 쟁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시집을 온 지 서너 해가 지나서, 그녀의 남편이 쟁기를 잡고 그녀가 소의 멍에를 잡고 끌기 시작했다. 쟁기가 지나간 자국을 시아버지는 무심히 살피었다. 쟁기질의 깊이가 충분하고 비어있는 곳이 없어질 무렵, 시아버지는 큰 아들 부부에게 논 10마지기를 떼어 주었다.   


모내기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 모든 논은 써레질을 마쳐두어야 바닥이 단단해져서 볏모의 뿌리를 단단히 박아 세울 수 있게 된다. 모내기는 봄 논농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인접한 3~4개 마을이 결합한 품앗이로 진행된다. 작은 볏모를 촘촘히 논바닥에 심어야 하는 일의 특성상, 많은 사람이 동시에 진행하는 게 백번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모내기 시작하기 3일 전부터, 시아버지와 남편은 못자리의 볏모를 뽑아 들기 좋은 무게로 볏모단을 만들어 두었다. 모내기 시작하기 전날, 못자리 판에서 모가 심어질 논으로 못단을 짊어날라 논에 골고루 퍼뜨려두었다.


모내는 날은 아이들도 학교에서 농번기 봄방학을 맞는다. 조막만 한 아이들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는 취지였으나, 그건 일종의 방학이자 놀이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못줄을 따라 모를 심으면서 뒷걸음질로 논을 메워올 때, 그들 뒤에 뿌려진 못단이 좀 더 적절하게 배치되도록 논바닥 이곳저곳을 휘어으며 못단을 때론 섬섬히 때론 촘촘히 배분하는 일을 맡았다. 논바닥을 놀이터 삼이 이리저리 미끄럼질 치며, 못단을 이리저리 던져 보내는 일이었는데, 그 재미가 남달랐다. 아마 그 논바닥 전체가 놀이터였을 것이다.


시아버지 소유의 논 28마지기를 마치는데 근접한 이웃동네 사람들이 다 참여하여  일주일 정도 소요되었다. 모내는 노동은 다른 어떤 노동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하는 일이고,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것을 하는 것이다 보니, 이때에 근방에서 눈에 띄는 재담꾼, 노래꾼이 자주 등장하였다. 노래꾼은 다른 누구보다 흥겹게 모를 심는 장단에 맞춰 구성진 노랫자락을 시작하곤 하였다. 한두 소절 노래꾼이 마무리하면 모내기 줄 앞에 한 줄로 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복된 구절을 쉽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서너 번 노래 구절을 반복하면 어느새 한 마지기 논바닥에 연한 볏모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노래 사이사이에 재담꾼은 자기가 직접 겪었던 것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를 은근슬쩍 시작하여 사람들의 배꼽을 잡았다 놓았다 하였다. 시골의 모든 소식은 재담꾼들을 통해 마을과 마을을 넘나들었다.


봄 들녘은 한바탕 모내기를 끝내면 일시적인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벼뿌리가 자리를 잡고 가지를 치면서 성장하기 시작하기까지 보름 정도는 어찌 보면 황금 같은 휴지기였다.


그녀는 그 텅 빈 들녘 논두렁 위를 작은 손도끼와 씨앗콩 포대를 들고 헤매었다. 오른손으로 손도끼를 내려쳐서 적당한 틈을 만들고 왼손으로 씨앗 콩을 그 틈에 던져 넣었다. 한 논두렁이 씨앗 콩으로 메워지고 나면 다시 돌아가 거름용 재 포대를 메고 지나온 모든 틈에 일일이 적당량의 재를 뿌려주었다. 직접 햇빛을 피하게 되고, 적당히 수분을 유지하고, 거름이 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논뿐 아니라, 논두렁에 콩심기를 포기한 논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가 자기가 심어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고 그 논두렁을 자신의 콩으로 채웠다. 그녀가 그녀의 콩으로 채운 들녘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주어진 10마지기 논에, 남편의 동생들에게 주어진 18마지기 논 전부에, 동네 몇 집의 논을 합쳐서 50마지기 이상 되었다.


그녀가 50마지기 논두렁에 콩을 다 심자마자, 본격적인 여름 농사철이 열렸고, 사람들은 다시 들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 그녀의 허리에는 콩포대 대신 비료포대가 둘러있었다. 진흙 때가 치밀하게 베인 손톱에 이번에는 미세한 화학비료 가루가 스며들어 손톱 밑은 하루 종일 따끔거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은 다르게) 쌀농사를 주로 하는 시골마을에서 여름은 모를 내어야 하는 봄날과 벼를 거두 들여야 하는 가을날과 비교해서 조금은 덜 바쁜 계절이다. 모든 논과 밭에 씨앗과 이삭을 심어둔 후, 그 자람을 햇빛과 물과 바람에 맡겨두는 일종의 기다림의 시간이자, 지켜봄의 시간이었다. 혹시나 햇빛이 과하거나 물이 과한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았다. 잡초를 거두어 주고, 비료를 뿌려주고, 야생동물로부터 지켜주고, 물을 조절해주는 시간이 7월~ 8월이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 시간에 바쁘게 움직였고, 햇볕이 대지를 달구는 낮 시간은 시원한 집 마루, 대청, 정자 등에서 휴식을 취했다. 물론 이 시간에도 일을 하는 독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녀도 이와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한두 차례 논바닥을 돌면서 잡초를 제거할 때, 그녀는 틈이 나면 쉼 없이 논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녀의 논에서는 일체의 잡초가 자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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