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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Jun 12. 2021

어린 시절

영철이 에피소드 - 그녀의 아버지



그녀는 1940년 5월 초록이 한껏 물오른 어느 날, 아들 없는 추락한(정확히 어떤 사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녀의 아버지에게 추수한 쌀의 일부를 아무도 나누지 않게 된, 양반의 실질적 혜택을 상실하여, 자기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어진, 그래서 일반 농민-평민과 사실상 동등한 사회적 지위에 있게 된) 밑바닥층 양반집  세 번째 딸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충청도 서천군 시초면 조실리이다. 근처에서 제일 높은 천방산에 올라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그녀의 고향마을 조실리와 그 앞을 퍼렇게 덮은 수리조합 - 봉선지가 제법 규모 있는 넓이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시선을 약간 동쪽으로 틀면 나지막한 산 끝자락을 따라 내려가다가 작은 교회 종탑이 눈에 들어오고, 그 밑으로 제법 잘 가꿔진 후암리 마을이 이어진다. 천방산과 주위의 산들이 같이 낮아지고 저수지와 만나는 높이에는 영락없이 그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비옥한 논과 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봉선지는 남서쪽으로 20여 리를 흘러가면서 바다와 만나기 위해 좁아졌다. 좁아진 저수지 양 옆으로 넓디넓은 서천 평야가 길게 자리했는데, 그곳은 부잣집 혹은 번성한 양반집들의 영역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젊잖은 농사꾼으로 존경이 높았다. 무지했던 사람들은 작은 일도 그녀의 아버지와 상의하고 돌아갔다. 누구에게도 모질지 않았다. 6.25 내전시에는 철없이 인민군 앞잡이로 나대던 아랫마을 영철이를 두 달 동안 부엌 광속에 숨겨주어 목숨을 살리셨다고 했다. 영철이에 관한 얘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됨됨이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영철이는 그녀 집의 머슴에 가까웠고, 언니만 둘 뿐인 그녀에겐 친오빠 같은 존재였다. 해방 후에 머슴이라는 제도가 사실상 없어지면서 그녀의 아버지는 영철이를 분가시켜 아랫마을 빈집을 고쳐 쓰게 하고 거기에 머물게 했다. 부모 없이 근방 오일장터를 떠돌다가 시나브로 이 마을에 흘러 들어와, 이 집 저 집 허드렛일을 도와가며 마을에 정을 붙이고 살아가던 녀석을 그녀의 아버지는 정식으로 그의 집에 머물게 했더랬다. 사내 녀석이 15세를 넘기면서 엄연히 독립해서 살아야 한다고 그녀의 아버지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는 곳만 아랫마을이었지 모든 생활은 그녀의 집에서 이뤄졌다. 같이 먹고 같이 일하면 그것은 남이 아니라, 머슴이 아니라, 식구였다.


그녀가 10살 되던 어느 날, 서울 근방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어른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고, 얼마 후 인민군 소대병력이 ‘평화롭게’ 마을에 들어왔다. 인민군에 저항할 군이나 경찰이 마땅치 않을 만큼 작은 군, 작은 면이었다. 서천의 모든 마을을 장악하기엔 인민군도 숫자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방에서는 그래도 부자동네로 소문난,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는 조실 마을에 한 소대병력이 가까스로 들어섰다. 부모도 없는, 땅 한 자락 없이 비루한 머슴으로 사는 것 같은 영철은 인민군이 좋아할 만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일주일 정도 인민군 캠프에서 이런저런 것을 배우고 듣고 난 후, 영철은 인민군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인민군을 대신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민군이 전하고자 하는 소식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영철의 일이 되었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표시로 왼쪽 팔에 붉은 완장을 채워주었다. 인민군은 매일 저녁 사람들을 마을 공터에 모아놓고 자신들이 남으로 내려 온 이유, 전쟁의 의미, 남조선 정부의 무능과 부패, 북조선의 번영과 발전 등에 대해 유창한 연설 형식으로 전달하였다. 마을사람들이겐 생전 처음보는 풍경에, 처음 듣는 소리(sound)들이었다. 소리는 닿았으나 의미는 닿지 않았으므로, 그것들은 두렵기보단 신기한 풍경에 가까웠다. 저들은 뭣 땜에 저렇게 흥분해서 긴 시간동안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일까?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수군거리다가 맥락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영철이는 마을사람들을 모으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어느 날 인민군은 들어올 때처럼 소리 없이 물러갔고, 영철은 다시 혼자 남았다. 마을은 예전으로 돌아갔는데, 한가지 달라진 것은, 인민군에 쫒겨 달아났다가 돌아온 경찰서 순경들이었다. 크진 않았으나 그 근방도 전쟁이라는 소용돌이가 한바탕 지난 상태였다. 그 중에서 첨예한 전선에 있던 것은 경찰들이었다. 인민군이 군 단위로 밀려들어오자 군이나 면의 경찰들은 최대한 몸을 숨기거나 피난길에 올랐다. 인민군들이 경찰에게는 유독 독하게 군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까닭이다. 해방이후 남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벌어진 일 중 하나가 일제시대에 순/사/질을 해오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연이어 경/찰/질을 할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 구조와 관계가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한 세력과 순사/경찰에 종사하던 사람들과 피할 수 없는 악연의 틀을 만들었다. 


일제시대에 민족해방운동을 가장 거세게 진행한 세력은 사회/민족주의 세력이었고, 가장 첨두에서 이를 검거/탄압/제압한 것은 조선인 순사/경찰이었다. 조선인 순사에 의해 조선인 사회/민족주의 운동가들이 실질적으로, 효과적으로 사라져갔다. 해방 후 사회/민족주의 세력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이북에 건립된 조선인민공화국에 속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일시적으로 남한을 장악한 사회/민족주의자들에겐 잠시나마 순사/경찰 종사자들에게 보복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 이를 실질적,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인민군이 떠난 조실마을에도 군을 대신해서 경찰들이 들어섰다. 군은 한 소대 정도 지나가듯 들렸다 사라졌지만, 이를 대신해서 경찰들이 마을을 전시상태로 만들었다. 돌아온 경찰들은 이상하게 오기와 분노에 차있어 보였다. 직접적으로는 인민군에게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빼앗기고 심지어 일가 친족이 목숨까지 잃은 것에 대한, 피난으로 인해 삶이 많이 고달파진 것에 대한 생존본능 차원의 분노가 그들 안에 꽉 차있었다. 그들이 과거로부터 역사적으로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가는 그들의 계산법에 포함되지 못했다. 조금은 포악스러울지라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할수 있는 모든 일을 해온 그들은 스스로 마땅히 윤리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먹을 것이 없는 날을 기어이 참아내며 자신들을 키워내는 동안, 나라나 양반들은 배불렀던 시절의 기억들이 그들의 뼈와 살에 새겨져 있었다. 나와 나의 가족외 어떤 타인도, 남루한 생존 이외의 어떤 사고나 의식도,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들은 어느누구보다 생존의 본능에 더 충실하게 해방공간과 해방이후 전쟁의 공간을 살아나오던 터였다. 그것은 생존윤리적으로 완벽한 삶이었다. 동물로 태어난 이상 경쟁하여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는 것 만큼 중요한 삶은 목표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번 전쟁에서 인민군에게 상처받고, 대항하여 분노한 것은 그 부분이이었다. 자신들은 윤리적 생존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 밖에 없는데, 저들은 도통 알아듣기 힘든 언술로 자신들을 비판하고 비방하고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망신주기를 일삼다가 심지어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까지 했다. 그들의 본능이 상처를 받았고, 믿었던 생존윤리가 무시당한 것이다. 가진 것을 나누고 같이 잘살자는 모토를 주장하는 저들은 교묘한 선동으로 자신들의 것을 빼앗으려는 또다른 윤리적 생존본능의 또다른 모습을 뿐이었다. 생존경쟁에서 뒤쳐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윤리적으로 자신들의 생존본능이 지탄받는 상황에 대해 그들이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생존본능차원에서 포악스럽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겨내는 것 뿐이었다. 


조실마을에서는 경찰들이 시비를 걸 만큼 눈에 띄게 인민군에게 부역하거나 동조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마을 저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조그만 꼬투리라도 찾아내기 위해 눈이 벌개진 그들에게 영철은 좋은 분풀이 수단이었을 게다. 영철이가 사람들한테 크게 해꼬지를 한 것이 없다는 말은 크게 귀에 담기지 않았다. 자신들을 쫒아낸 인민군과 한편이 되어 마을을 개선한다는 둥, 토지를 개혁한다는 둥, 하면서 선동질을 해대었던 것 자체가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인민군에 붙어서 선동질을 해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크게 상해를 입히거나 감옥에 쳐 넣을거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마을마을마다 퍼졌다. 


조실마을에도 파장이 일었다. 


철들고 나서는 마을을 떠난 적이 없는 영철은 떠나 도망가길 포기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철이를 부엌 광에 숨겼다. 마을사람들 몇몇은 영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으나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영철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서. 쓸모 없어진 오래된 항아리 두어개를 치우자, 부엌 광에는 제법 넓직한 공간이 마련되어 한 사람이 먹고 자기에 충분한 자리가 생겼다. 그녀와 그녀의 두 언니는 번갈아 가며 부엌 광에 있는 영철이에게 하루 세끼 먹을 것을 배달했다. 영철이는 두 달 동안 그녀의 집 앞마당, 안방, 부엌에서 놀다가, 가끔 마을을 기웃거리는 경찰이나 경찰 앞잡이를 피해 부엌광으로 숨어들기를 반복하였다. 두 달이 지나고, 경찰의 오기가 한풀 누그러지고, 사람들도 제 일에 바빠져서 조실마을 전체가 한가해질 즈음, 그녀의 아버지는 영철을 설득하여 도시로 나가게 했다. 


영철은 천성이 성실했으므로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게를 이루었다. 죽기 전까지 해마다 조실리를 찾아와 그녀의 아버지에게 절을 올리고, 하룻밤을 묵고 올라갔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 동안 해마다 묘소를 찾아 절을 올렸다. 영철이 받아온 청주는 늘 그녀의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양오빠


그녀의 아버지는 더 이상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고서는 연명하기 힘든, 양반이 아닌 지위에 있었으나, 예의와 체면 면에서는 뼈 속까지 양반이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행실이 몸에 배었다. 다른 필부들과 달리 언사가 거칠지 않았고, 행위에 절제가 있었다. 작은 일이라도 눈에 띄는 사람들 모두를 돕고자 했다. 주로 글을 모르고, 글을 모르니 상황 판단이 서툴고, 그로 인해 억울해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우왕좌항 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 그의 주변에 허다했다. 그는 그 사람들을 물리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주로 판단이 어려울 때, 다툼이 일었을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는 모든 내용을 점검하여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해주었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이치에 닿아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이 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저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가 제공한 모든 도움에 대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행위로 보답하려고 했다. 그들은 자기 일터로 나가다가, 새참 후 잠시 쉬는 틈에,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조금씩 자주 그녀의 아버지 논밭을 들러, 살피고 돌아갔다. 그녀 아버지의 논과 밭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집안에 아들이 없다는 건, 그에게 또는 그의 아내에게 또는 그의 여식들에게 각각 다른 질의 고통으로 남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집안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는 죄의식이 평생 가슴에 가라앉았다. 그의 아내는 시집살이 내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살았다. 남편은 대문 밖과 대문 안에서 대문을 사이에 두고 사람이 달라졌다. 대문 안에서 남편은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했다.


세 딸은 방목되었다. 자라는 대로 자랐다. 중등학교에 꼭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큰 언니를 빼고 그녀와 그녀의 둘째 언니는 초등학교만 마쳤다. 그것에 대해 그의 아버지는 일절 괘념하지 않았고, 그녀의 어머니는 속으로 눈물을 거두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괘념하지 않았음’을 나중에 기억하게 되고,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일정한 원망이 되었다.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하여, 양자를 들이는 것은 당시에는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촌동생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를 포함한 그 집의 모든 여성(어머니, 두 언니)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과 공통적으로 깃들 우울증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촌동생은 겉으로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나 재물에 약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항상 좋은 모습을 보인 이유는 자신보다 더 많은 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족한 논을 서로 나눠야 하는 형제들보다 사촌형과 더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일손이 부족한 농번기에는 이틀에 하루는 사촌형 집에서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양자를 들이기로 결심 했을때, 사촌동생은 이를 제일 먼저 파악할 수 있었고, 자기의 아들을 제안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의 아들은 사촌형의 양아들이 되었다. 


그녀 아버지의 극진한 지원으로 양오빠는 공주사범대학교를 졸업했다. 조실리 정도에서 공주사대를 졸업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양오빠는 동네 아이들과 달리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들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나오지 못하게 한 것도 있었고, 본인 스스로도 들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편한 것이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깨달았던 까닭이다. 


특히 아버지를 둘을 모시고 있었던 그는 존재자체가 특별했다. 두 아버지로부터 동일한 지지를 받았고 관리를 받았다. 특히 그를 떠나보낸 아버지는 자신의 돈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아들이 잘 성장하고 잘 교육받은 것이 말할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여느 집이라면 응당 남자형제가 해야 할 일을, 이 집에서는 그녀와 그녀의 두 언니가 메꿔야 했다. 양오빠가 방 안에서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는 동안, 그녀는 마당에서 작두로 소여물을 썰고 가마솥에서 끓여내어 외양간으로 날랐다. 양오빠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그녀는 논으로 밭으로 세참을 날랐고, 밭고랑을 기었다. 해가 떨어질 녁, 들에서 집으로 들어오면 양오빠는 슬쩍 방문을 열고 잠깐 쳐다본 후 이내 바로 문을 닫았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공부할 것을 크게 강요받은 적이 없었고, 그녀 또한 공부하는 것에 대해 크게 흥미를 갖지 못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공부하는 것이 어린 시절 그녀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걸 누구도 알게 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공부하는 재주, 글을 읽는 재주 혹은 욕망을 운명처럼 갖고 태어나지 않는 한, 어린 그녀가 글/공부와 가까워지거나 글/공부를 가까이 할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그 시절 그 시골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동일한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미교육 상태로 한 두살 먹어가게 되고, 그 정도 미교육 상태로도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농사꾼으로 자라났다. 


먼 도회지에서 시작되는 급격한 삶과 생활의 변화가 이곳 시골마을까지 간신히 흘러 들어왔을 때, 같은 농사꾼이라 하더라도 조금씩 다른 농사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TV를 포함한 미디어가 미약하던 시절, 그 변화는 도회지를 잠시 다녀오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이 타고 오는 버스 안에서, 도회지 다녀온 소감을 안주 삼아 목청 높이던 마을 주막을 통해, 이 곳 사람들에게 흘러 들었다. 


‘문자화된 지식’이 아이들의 삶과 성장의 일부가 되지 않았던 시절에, 그녀의 양오빠는 유독 달랐던 첫 사람이었다. 세 자매 중 막내였던, 욕심이 많았던 그녀는 못마땅한 것 이상으로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그녀와 양오빠 사이에 있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 절실하게 각인하고 있었다. 양오빠는 단 한차례도 들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과 두 언니가 (근방의 모든 집안의 모든 아이들처럼) 좁은 방을 같이 쓰는 동안, 양오빠는 책상과 책꽂이와 옷장이 갖추어진 방을 중고등학교 내내 혼자 사용하였다. 그녀는 그녀가 들에서 들어올 때 살짝 문을 열어 비친 양오빠 얼굴이 달처럼 하얗다고 느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얀 얼굴의 양오빠가 사는 삶이 그녀가 사는 삶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생각해보거나 비교해보거나 하지 않았다. 시집을 가서 첫 아들을 낳고 그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모르는 한글을 드문드문 읽어대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그 날, 그 아이의 자는 얼굴을 문득 쳐다보던 그날 저녁, 그녀의 가슴과 머리속에 그 옛날 잠시 문밖으로 비치던 양오빠의 달처럼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왜 그 얼굴이 달처럼 영롱하다고 느꼈는지, 자신의 아이를 보면서 비로소 가슴이 무너지듯 깨닫게 되었다. 그날 저녁 이후로 그녀의 삶은 조금씩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양오빠가 공주사대에 합격했다고 통보 받던 날, 그녀의 아버지는 모든 동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낮에 장에 나가 개 다리 두 짝을 사다가 오후내내 푹 삶아 진한 개장국을 만들어 동네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접했다. 모두들 조실마을에서 처음있는 경사를 축하해주었다. 그녀와 언니들은 개장국과 반찬이 올려진 쟁반을 날랐고, 빈자리를 치우고, 다시 개장국을 내오느라 저녁을 걸렀다.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 마당 구석에 임시로 걸린 가마솥에 남아있는 국물을 한 방울까지 떠내어 셋이 함께 먹었다. 


양오빠는 중학교 선생으로 근무를 시작하여 교감자리까지 오른다. 조실리를 넘어 문산면에서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사람들은 좋아하였다. 양자로 보낸 쪽이나 양자로 받아들인 쪽이나 모두에게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구씨집안이 다시 살아났다며 이구동성으로 구씨 사촌형제를 칭찬했고, 양오빠를 칭송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와 그녀의 두 언니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변곡



선량한 사람인 줄 알았던 아버지의 사촌은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돌변하였다. 마치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사촌동생의 이름으로 이관되었다. 모든 수단을 손아귀에 쥔 사람들이, 몇 년에 걸쳐 준비한 일이었기 때문에, 막을 방법은 없었다. 지난 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몇몇 사람들이 조심하라고 충고를 하였지만 귀에 담아두지 않았으므로 허사였다.  


그녀와 그녀의 두 언니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는 남아 있는게 없었다. 문서상으로 모든 것은 양오빠와 양오빠의 친아버지 이름으로 귀속되었고, 어느 면으로 보나 이 모든 이관은 그녀의 아버지가 동의한 상태에서 진행된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네 여자에겐 실체를 밝힐 만한 용기도 지혜도 부족하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어머니가 일이 커지고 집안의 일이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세 딸은 그럭저럭 시집을 보내고, 자신이 이곳에 남아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본인들이 서두른 것인지 양오빠 쪽에서 서두른 것인지 그녀의 어머니가 서두른 것인지 확실치 않았으나, 세 자매가 일찍 시집을 가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판단이었을 것이다. 큰언니가 20리 떨어진 화양면에서 국민학교 선생질을 하는 성실한 젊은이에게 시집을 갔고, 1년 후 작은 언니는 그보다는 좀 못한 농가집 아들에게 쫏기듯 시집을 갔다. 그녀 역시 동네에서 발이 넓기로 소문난 아저씨를 통해 20리정도 떨어진 마을에 살고있는 4남 1녀의 장남과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된다.


세 딸이 떠나간 집에 그녀의 어머니는 홀로 남았다. 불과 3년전 만해도 남편과 아이들과 양자와 머슴들이 들락거리며 북적거리던 집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혼잡스럽지 않고 다복한 어떤 것으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는게 낙이었는데, 불과 3년만에 모든 것은 달라져있었다. 집안에는 서로 어색해하는 양아들과 그녀의 어머니 둘이 남아서 하루종일 겉돌았다.


결론적으로 양아들은 그의 어머니를 잘 모시지 않았다. 양아들이 근방의 마을이나 읍이 아닌 먼 도회지에서 온 여성과 결혼을 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추측 하건데, 그 여성은 이 집의 내력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난 후 결혼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비록 시골마을이었지만, 남편의 재산은 친아버지의 재산과 양아버지의 재산이 합쳐져 제법 규모있는 중농의 규모가 되었다. 게다가 남편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교편생활을 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엘리트였으므로, 그녀는 젊은 나이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제법 괜찮은 집안의 안방마님 자리를 차지할수 있었다. 도회지 여성은 상황판단이 빨랐고 이재에 밝았다.


시집을 오고나서 얼마되지 않아 길산장을 보고 돌아오던 어느 날, 그녀는 친정집에 들렀고 새언니가 어머니를 어떻게 모시는지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만해도 제대로 장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집안에서 경제권을 쥔 남자들이었다. 당장 소나 염소를 끌고나가 직거래를 진행할 수 있는 것도 남자들이었다. 갓 시집 온 며느리가 장을 나가는 일은 여러가지 이유로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날부터 시댁의 일은 미어터졌고, 일꾼들을 대접할 음식은 갑자기 동이 났다. 길산장은 그녀의 고향마을 조실리에서 가까웠다. 


뭔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도착한 고향집 대문 밖에서, 그녀는 쉽게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양오빠와 결혼한 도회지 여성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 시어머니를 평온하게 모시지 않는다는 소문은 그녀의 귓가를 피해가지 못했다. 


먼 발치 별채 마루에서, 김치 한 종지, 간장 한 종지를 반찬으로 찬밥에 물을 말아드시는 엄마가 보였다. 치아가 좋지 못했던 그녀의 엄마는 자주 밥에 물을 말아 드셨다. 마신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것은 그리 낯설지 않았으나 엄마 앞에 놓인 상의 초라함을 확인하고는 울화통과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최소한 조기 한마리는 올라가 있어야 했다. 


그녀는 새언니와 대판 몸싸움을 벌이고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려고 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막내 딸을 따라 나오지 않으셨다. 이 상황에서 갓 시집을 간 막내딸을 따라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들은 대문밖 바깥마당 구석에 자리잡은 꽃밭을 둘러싼 벽돌담 위에 긴 시간동안 걸터 앉아있었다.  3년전에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가꿔놓은 꽃밭에는 수국, 국화가 담 경계선을 넘어 수북하였다. 


“나 이제 갈란다.’ (그녀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집안 어른들 눈에 들게 열심히 잘혀. 힘들어도 참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붙잡지 않은 채 꼭 하고싶은 당부만 전달했다.)


그녀의 어머니의 눈에 걸어가는 막내딸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아직도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어린 아이의 그 모습.  몇 발자국을 옮길때마다, 딸은 징징거리며 걷다가 눈물을 닦아내는 듯 손을 접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막내딸이 돌아볼 것 같으면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한동안 딴 곳을 바라보다 다시 막내딸을  찾았을때, 그녀는황토색 담배밭 사이로 난 낮은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대문안으로 들어오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을 여읜 후 한동안 참아내던 눈물을 흘렸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급하게 쫓아내듯 시집을 보냈다. 막내는 아직 어리고 어린 아이였다. 속이 좁고 혈기는 높았으므로,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돌아가는 속내가 어떠할지는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직도 아무것도 모를 것인데… 

얼마나 가기 싫을까, 

생면부지 시집에서는 얼마나 눈치가 보일까, 

잠이 많은 아이인데 잠은 좀 잘까, 

가자고 할 때 따라 나서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나 올걸 그랬나, 

걸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큰 두 딸은 그나마 나이도 좀 먹었고 제 앞길 정도는 살필수 있겠다 싶어 큰 걱정이 없었으나. 막내는 그렇지 못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아닌 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눈빛으로, 말투로 막내에게 화살처럼 박혔을 것이다. 어머니 당신의 것이 없을 것으로 확신하지 못했다. 


막내는 많은 시간을 들과 산에서 보내었다. 겉으로는 더 씩씩하고 쾌활하였으나, 속내는 그렇지 않았을 것임을 그녀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차라리 일찍 시집을 가서 의지할 수 있는 남자와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이의 시집을 그렇게 쫒아내듯 서둘러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중매가 들어왔고, 아이가 선뜻 좋다고 했을때, 그녀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두고두고 그녀의 어머니 가슴을 깊이 가라앉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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