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그녀는 생활방식, 성격이 전혀 달랐다. 남편은 시골스럽지 않은 외모에, 여유가 있는 스타일이었다. 성격이 유하고 웃는 모습이 좋았다. 부모가 가진 논마지기가 적지 않은 편인 것까지 더해져서, 그는 군 읍내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정도였다. 집안일, 집안사람과 있기보다 바깥일, 바깥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더 편해했다. 일에 대한 끈기와 결기는 부족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주어진 기한을 놓칠 정도로 게으른 종자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될 수 있으면 덜하고 좀 편한 방식을 찾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리 회전이 빨랐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속도가 빨랐다.
그녀는 우직하고 항상 안으로 향했다. 동네 아줌마들 수다판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항상 결기와 불만이 가득 찬 모습이었고 할 수 있는 일 이상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굶더라도 예의와 체면은 지키고자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많이 달랐지만, 마음속 깊이 가두어 온 많은 생각 중에서 한 가지가 겹쳤고, 그것으로 두 사람은 평생을 같이 살아가게 된다.
이 바닥을 뜨는 것. 최소한 자식새끼들은 이 바닥을 뜨게 하는 것.
이것은 당시 다른 집들도 갖고 있는 목표일 수 있었으나, 우선순위 혹은 중요도가 전혀 달랐다. 이 부부에게는 이 목표가 유일한 목표, 두 사람이 같이 사는 이유를 설명하는 목표,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목표였다. 왜 이 부부에게 이런 목표가 만들어지고 하나의 목표로 되었을까?
남자는 다른 집 남자들보다 좀 일찍 도회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나마 좀 여유 있는 농사꾼의 아들이라 도회지로 심부름 가더라도 한 번은 더 갔을 것이다. 도회지 삶에 좀 더 기회가 있고 더 편한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라는 걸 일찍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의 성격과 삶의 방식이 이곳보단 도회지가 더 맞았을 것이다.
그녀는 천성적으로/본능적으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자기 자식에게 두는 편에 속하는 부류였다. 그녀 자체를 위한 삶은 비어 있었다. 자식들이 잘 되도록 끊임없이 걱정하고 노동하는 삶이 그녀의 삶이었다. 어째서 그런 목표 혹은 삶의 방법을 갖게 되었는지, 그 시절 그 곳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경로로 들어섰는지는 분명치 않다. 짐작해보자면 세 자매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아버지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다는 상처의 기억이 기저에 있었을 것이다. 조실 마을에서 제일 컸던, 자신들의 공간이었던 기와집의 주인이 자신들이 아닌 의붓오빠로 바뀌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한 그날, 자신과 언니들이 자라고 뛰놀던 그 안방, 건넌방, 사랑방, 마루, 토방, 안마당이 더 이상 그녀들의 소유가 아니고 낯선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버려졌다는 혹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후 지속적으로 그녀들의 삶을 짓누르고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어 있었다.
세 딸 모두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좋은 것들로 가득했었다. 근방의 어떤 부모보다 어질고 부지런한 아버지였다. 자식들에게 손찌검이나 험한 말을 일절 하지 않으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마지막에 의붓오빠를 선택한 것은(겉으로는 수긍하고 인정하는 모습과는 달리), 무의식 속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반전이었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의붓오빠와 그의 친부모에게 기와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이 넘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으면서, 세 자매에게 남은 상처와 굴곡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엄마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으로, 모든 것을 빼앗아간 의붓오빠보다 더 낫고 잘 살겠다는 다짐으로 전환되었다. 이 모든 전환의 과정은 세 자매 중 막내인,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제일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믿어왔던, 그녀 안에서 가장 강렬하고 드라마틱하게 발생했다.
버려졌음을 깨닫게 된 이후로, 그녀의 삶의 목표는 주어진 현실 공간(물리적 공간과 사회 의미적 공간)을 떠나는 것 자체, 그리고 새로운 정착지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것이 된 것이다. 좌고우면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으므로 삶의 목표가 정해진 순간 해야 할 일은 명확했고 구체적이었다.
어느 날인가, 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남편은 그의 경험과 간단한 생각을 언급했을 것이고, 그녀는 그 순간 그와 함께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야 할 방향이 명확해졌을 것이다.
통상적인 부부간의 갈등 정도는 항상 발생했다. 남편은 술이 약한 편이었으나, 수려한 외모나 말솜씨 때문에 술자리에 자주 불려 다니는 편이었다. 그녀는 원체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친하려 하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과 심지어 가족들과 데면데면 사는 것에 익숙한 편이 되었다. 자신이 가진 꿈, 그것으로 그녀는 충분하고도 충분하게 스스로 충족되었다. 이건 그녀만의 상당한 특성이다. 그 외 모든 것 -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사람 관계, 재미, 좋은 것, 즐거운 것, 노는 것,- …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모든 것은 부차적이었다.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인해 두 젊은 부부는 많이 다투었으나, 끝까지 서로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던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그녀 안에 잠재해 있던 목표를 발견하게 해 주고, 같이 가기로 작정한 것이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부부가 동의하고 모의한, 둘이서 비로소 하나의 가족체가 되어 둘만이 생각하고 기획하고 공모한, 첫 번째 실천이 상당히 큰 규모의 계를 시작한 것이다.
결혼 후 세 번째 해 수확부터 그들은 계를 시작했다. 일 년 동안 수확한 대부분의 수익을 투자하는, 당시로서는 제법 큰 규모의 계였다. 아버지 다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믿고 따랐던 언니, 언니의 남편과 그 남편의 동생이 주가 되어, 20명 규모의 계원들이 만들어졌다. 당시 마을마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진행되던 평범한 계에 비하면 참여 규모와 1 계좌당 금액이 상당했다. 대부분 큰 언니가 살고 있던 화양리와 관계된 사람들이 계원을 구성하였고, 농사짓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한 계원은 그들 부부가 유일했다. 화양리는 서천 평야에 속한 마을로, 계원들 중 논농사 짓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그 규모가 그들 부부의 논농사와 규모를 달리했다. 대부분 물려받은 재산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서천읍내에서 그럴듯한 점포를 내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그다음이었다. 그녀의 형부의 동생이 문제적 인물이었다. 일찍이 도회지 삶을 시작했고, 두뇌가 명석했고, 그 시절 금융판을 꿰뚫었다. 그들 부부를 포함시켜달라고 그녀의 언니는 시동생에게 절절히 부탁했다. 시동생은 규모가 커서 논 몇 마지기 짓는 걸로 계돈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형수의 끈질긴 설득으로 그들 부부를 받아들였다. 언니는 동생이 어떤 목표가 생겼을 때 고집스럽게 집중하는 성격이어서 어떻게든 한 구좌는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 정도 인원으로 구성되어 규모 있게 진행되는 계를 마무리하면, 과정은 좀 힘들겠지만 막냇동생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언니는 둘째 동생한테는 이 계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계에 들어올 거냐고 언니로부터 언질을 받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언니는 그런 동생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았다. 너무나 예상하던 그대로의 반응이어서 바라보는 눈엔 상념, 막내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셋째야, 한번 내야 할 계돈이 제법 큰 규모여. 지금 규모의 수익으로는 계돈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할 텐가?’
언니는 그들 부부가 시부모로부터 어느 정도 논마지기와 수익을 할당받는지 대략 가늠하고 있었고, 막내에게 어렵게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받아두어야 했다.
‘응, 언니. 논농사 만으로는 안될걸 알고 있어. 몇 가지 더 해볼 요량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막내의 눈빛은 예전과 같았다. 막내의 눈빛은 뭔가 할 일이 명확히 생겼을 때 약간 내리 깔리면서 가끔 상대방을 쳐다보려고 올려볼 때 남다른 독기를 품는 눈빛이었다.
‘너 혼자 하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오늘 집에 가면 남편이랑 잘 상의해봐. 뭣보다 남편이 하겠다고 해야 혀. 그리고 남편이 좀 더 고생해야 허고… 잘 생각하고 상의하고 다음번 장에서 다시 보자’
‘응 그려. 언니’
그날 저녁에 젊은 부부는 결혼하고서 처음으로 초저녁을 넘어 긴 야밤까지 두런두런 계에 대해서, 앞으로 살아갈 방향에 대해서, 지금 여기에 대해서, 자신들의 자식들에 대해서, 시부모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밤이 일찍 찾아오는 겨울날이었고, 차가운 공기는 이불 위로 서성였다. 시골마을 부부들은 이렇게 누워서 얘기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부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정작 언니가 제안한 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언니가 만든 계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과 계의 규모가 어느 정도라는 것을 얘기했을 때, 남편은 깊은 신음소리 혹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동안 별다른 말을 내어놓지 않은 채 오래도록 천정을 응시했다. 그 침묵이 그녀에게는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작지만 깊게 흥분하고 있다고 느꼈다. 10년 후에 그들이 확보할 목돈의 크기가 허무맹랑한 무엇이 아닌,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올 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작은 흥분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들의 대화는 왜 그 정도 규모의 목돈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나중에 잘되면 자식들은 어디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것으로 즉각 옯겨갔다. 짧게나마 남편은 시부모 밑에서 고생하는 걸 알고 있다는 말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었다.
훗날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이 '왜 우리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시골에서 크지 않고 일찍부터 도회지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아빠 엄마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묻는 질문에 그녀는 그날 밤에 있었던 남편과의 대화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그날 저녁에 너희들 아빠랑 결혼하고 처음으로 두 사람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한 거야. 서로 살아온 배경이 많이 다르고 성격도 차이가 많이 났지만, 의외로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동일했어. 그리고 언니가 제안한 계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단박 해 판단해버린 거지. 엄마는 간단하게 언니를 장터에서 만난 일과 언니가 계를 제안한 내용과 그것을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했어. 그러자 너희들 아빠는 잠시, 한동안 천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러지 뭐’라고 짧게 대답했어. 엄마가 생각해도 많이 의외였어. 평소 아빠 모습으로 유추해보면, 힘들겠다고 할 줄 알았거든. 왜냐면, 농사를 짓고 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아빠가 아주 열심히 하고 성실하게 땅만 보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거든. 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는 태도가 강했지. 큰 이모가 제안한 계의 규모는 ‘할 수 있는 정도만’ 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어.
할아버지가 나눠준 8마지기 논에서 나오는 수확 이외에 반드시 다른 수확이 있었어야 했어. 엄마는 부모님들께 이 너머에 있는 밭을 달라고 할 참이었고, 논두렁 콩 농사, 애무재 큰 밭 곁에 달린 작은 밭에 깨 농사, 봄/가을 품앗이, 겨울날 모시 등 몇 가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아빠의 중요한 일은 논농사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잘 지어서 추곡수매에서 항상 좋은 등급을 받는 것이었고, 소나 다른 가축 키우는 것을 추가해야 했어.
아빠는 ‘그러지 뭐’..라고 간단히 대답하고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동안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시집살이는 어떠냐, 평소 일은 좀 쉬엄쉬엄해도 된다, 동네 다른 여자들하고도 같이 좋게 지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 음.. 엄마는 듣고만 있었지.’
‘그리고 그 저녁에 또 어떤 얘기를 나누셨어요?’
‘그다음엔 엄마가 일방적으로 앞으로 아이들은 무조건 도회지에서 키울 거라고 평소에 맘속에 품고 있던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 아빠가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물을 겨를도 주지 않고, 그래야 하는 이유와 구체적인 계획을 계속해서 털어놓았어. 아빠는 등을 돌려 누운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는데, 딱히 부정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어. 아마 막연하게 아빠도 이곳을 벗어나야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고, 그건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평소 무뚝뚝하던 아내가 그런 얘기를 술술 털어놓는 것을 듣고는, 올게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심정이었을 거야.’
‘도회지 생활이 아이들이나 두 분에게 녹녹하지 않은 생활이 될 거라는 건 같이 얘기해보지 않으셨어요?’
‘음, 그 얘기를 할 때. 그 판단을 할 때 기본적으로 엄마 아빠도 많이 어린 나이였어. 시골에서 농사짓는 생활이 힘들고, 앞으로 계속 이 생활을 할 생각은 둘 다 없어 보였지. 그리고 이곳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사는 게 조금이라도 편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 면에서 보면 다른 비슷한 연배들과 비교해서 둘 다 조금은 철이 덜 들었고, 무모했어. 둘이 많이 달랐지만, 이런 면에서 비슷했던 거야’
‘아이들을 왜 도회지로 보내시고 싶었어요?’
‘우선 엄마 아빠는 공통적으로 시골 농사일을 다른 누구보다 싫어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그 농사로 인한 노동의 고통이 다른 누구보다 심했지. 겉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속으로는 그 심한 고통을 참아가는 중이었고,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날 거라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던 거지. 자식들에게 이 농사일을 이어주고 싶지 않았어. 특히 아빠는 또래의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이나 도회지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많이 겪어봐서, 그 농사일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힘든 것인지, 이 정도 육체노동을 감수할 수 있다면 도회지에서는 더 많은 더 좋은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당연하게 믿고 있었지.
10년 후에 받을 수 있는 목돈이 정해지자,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이 탈출계획이 성큼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목표로 다가온 거지. 내 얘기가 끝나고 나서도 아빠는 쉽게 잠들지 못했어. 옆으로 누었다가 잠시 일어나서 숭늉 한 사발을 들이켰다가 어두운 천정을 응시하는 등을 반복했어. 막연했던 불만, 막연했던 탈출계획이 구체화되자, ‘아 이거였구나. 내가 다른 시골사람들과 다른 점이.. 내가 앞으로 살고 싶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
(그날 저녁 두 젊은 부부는 새벽 녁에서야 잠이 들었다.)
매 해 추수가 끝나고, 벼 말리기가 끝나면, 정부에서 벼를 사들이는 추곡수매가 진행된다. 당시 농촌의 젊은이들은 일 년 내내 이 날을 위해 일하는 것과 같았다. 자기가 이뤄낸 성과가 바로바로 눈앞에서 확인되고 즉시 현금으로 입금되었다. 그 시절은 어느 정도 풍요로웠다고 볼 수 있다. 추곡수매가 끝나는 날부터 일종의 휴식기이자 즐기는 시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좀 더 여유 있어 보였고, 설날까지는 그런대로 풍성했다. 여름내 검게 그을린 아이들은 새로 누빈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만, 그녀의 집은 좀 썰렁했다. 아이들에겐 그저 평상시와 다름없는 시즌이었다. 추곡수매가 끝나고 현금이 손에 들어오는 날, 그녀는 돈뭉치로 허리띠를 만들 듯, 고운 천으로 둘둘 말아 허리춤에 둘러메고, 40리 떨어진 언니 집으로 향했다.
추곡수매로 받은 돈 외에, 젊은 부부가 다른 이들보다 더 짬을 내어 땀을 흘린 대가들이 두루 마리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재 너머 버려진 뒷산 밭을 기어이 일구어 참깨와 고추를 수확한 것, 자기들 논두렁도 모자라 비어있는 남의 논 논두렁까지 서리태를 심어 수확한 것, 봄 모내기와 가을걷이 때 두어 번 품앗이를 더해서 얻어진 현금 품삯.. 말하자면 두 젊은이가 의기투합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하고 아껴서 모은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부부는 가을걷이가 시작될 때부터 계돈을 만들어내야 할 일정을 염두에 두고 가을날을 살았다. 길산장 한산장 홍산장 문산장… 장마다 내가야 할 품목들을 빠짐없이 준비했고 작은 수확 큰 수확을 합쳐서 장롱 깊숙이 보관해 두었다. 계돈을 전달하기 전 날, 젊은 부부는 의식을 치르듯 정해진 금액을 각자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계돈을 전달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하루 저녁 그녀가 언니 집으로 떠난 사이, 남편은 오랜만에 주막에서 사람들과 어울렸다. 사람들은 남편이 주막에 나타나는 날이 어떤 날인지를 알고 있었다. 두 젊은이의 과도한 부지런함은 근방의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 있었다.
남편은 오랜만에 주막에서 사람들과 흥겨웠고, 그녀는 언니가 차린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하였다.
이 일은 23살부터 31살까지 9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10년 차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겠지만 10년 차에 모여야 할 계돈은 모이지 않았다. 10년 차는 그녀의 차례였다. 이자를 더 받기 위해 후순위를 택한 것을 후회해본 들 소용이 없었다.
언니는 교사인 남편을 따라 안양으로 이사했다. 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남편은 집요하게 전근 신청을 했고 그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언니는 동생과 가까이서 살을 비비며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동생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동생이 자신과 자신이 모은 사람들을 얼마만큼 순전하게 믿고 의지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서울 금융판을 섭렵한 시동생은 파산과 더불어 한국을 떴다.
그녀는 언니를 원망할 수도, 어디다 하소연할 길도, 되찾을 길도, 호소할 길도 막연했다. 젊은 날 10년이 날아갔다. 꽤 큰 금액이었다. 아름아름 봐 두었던 서울 근교 집터와 농장터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10년에 걸친 그녀와 남편의 삶 자체가 녹아 있었기 때문에 이 실패는 더욱 가혹했다.
지난 10년 동안, 누가 눈치를 주어도 참아냈고, 누가 부족하다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할 이유도 없어서 주위에 사람이 없어도 개의치 않았다. 조만간 이곳을 벗어날 것이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그녀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부모도 그녀의 속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서로 정을 붙일 수 없었다. 협의나 상의가 가능한 주제가 아니었다.
떠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 공간에 남아야 했다. 그동안 그녀가 거들떠보지 않은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 남아야 했다. 그건 일종의 절망이자 치욕이었다. 사람들은 은근히 이 실패를 설익은 짓을 하는 그녀의 탓으로 돌렸다. 이뻐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관계가 그녀와 나머지 가족 간에 만들어지고, 단단해졌다.
그녀가 노동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은, 그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최소한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땅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과 함께 10년을 거치면서 그녀는 조금 성숙해져 있었다. 땅을 다루는 기술도 늘었고, 땅에 대한 의존도 늘었다. 목표를 달성해가는 수단으로 땅은 거짓 없는 터전이었다. 10년을 거치면서 유일하게 그녀 마음속에, 그녀도 모르는 새 남은 게 있다면, 이것이었을 것이다.
땅을 믿게 된 것.
그녀 스스로 땅과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
그녀에 비해 남편은 더 많이 낙심하였고 회복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편을 좀 더 힘들게 한 건 혹시 저들이 애초부터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큰 언니와 결부된 일이었지만, 남편의 입장에서는 거리감이 있는 그저 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들과 모임들이었다.
남편은 한동안 처형의 시동생을 찾아 나서겠다고 취기를 빌어 울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