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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Jun 12. 2021

무작정 상경. 무모했던 1

움트는 마음

시부모 댁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리고 그녀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은, 남편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남편의 여동생은 5남매 중 막내로, 그것도 유일하게 여자로 태어나는 바람에, 시부모의 애정과 보살핌이 남달랐다. 그 때문인지 여자가 고등학교 진학하는 것이 드문 시절, 시누이는 장항읍내에 있는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목사의 안내를 받아 서울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여성이어서 동네에서 단연 돋보였다. 말과 행동에 자신이 넘쳤고, 사는 모습이 당당했다. 동네 어른들에게 당당하여 괜히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고, 웃음소리가 호방했다. 


시누이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골마을을 떠날 때까지, 자기 오빠에게 시집을 와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시누이의 시각에는 여성 입장에서의 계몽주의적 시선과 기독교적 시선이 겹쳐 있었다. 머릿속에 사회, 여성, 도시 교육, 계몽, 선진 등과 같은 새로운 지식과 개념들이 어렴풋이 자리 잡을 즈음이었고, 감성적으로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절이었다. 그러한 시누이에게 자신의 집에서 살게 된 '외부의 여/성'은 여러모로 흥미롭고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수줍게 젊은 부부의 모습, 시부모와 살아가는(특히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 농사꾼 집으로 시집을 와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하고 일하는 여성의 삶의 모습이 대표적으로 오버랩되었다.  


그녀에게도 시누이는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정이 가고 마음이 가는 존재였다. 그녀가 시집왔을 때 시누이는 앳된 중학생이었다. 깨끗하게 다려진 검정 교복을 입고 장항에 있는 여자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맑은 눈을 가진 아이였고, 시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예의범절이 망가지지 않은 아이였다. 중학교를 나오지 않은 그녀와 다른 길을 가는 아이여서 내심 부럽기도 하고 여동생 같아서 애착이 많이 갔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두 사람은 여자로서 얼기설기 맺어졌다. 시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위치한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소식을 자주 들을 수는 없었으나, 활기찬 성격으로 학교와 교회를 마음껏 휘젓고 다닌다는 말이 간혹 들렸다. 


대학교 4학년 때, 시누이는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 때 친구 4명과 전국 여행길에 올랐다. 그 여정 중 자신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시골집에서 5일 동안 머무르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5명의 대학생이 5일 동안 시골마을에 머물렀고, 그 5일 동안의 경험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과 여운을 남겼다. 


그들은 똑 부러지게 말하였다. 어르신들에게도 거침이 없었다. 식사 시작 전에 그녀들은 돌아가면서 큰소리로 대표 감사기도를 드렸다. 어린 학생들이었음에도 그 기도소리에는 어떤 주눅도 들어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신 있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가정의 평화와 신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가족 각 개인의 건강을 기도했다. 첫째 날엔 어색해하던 시부모도 둘째 날부터는 기도에 동참하듯 가볍게 목을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딸과 딸의 친구들의 기도소리를 들었다. 기도가 끝나면 다 같이 동시에 식사를 하였고, 식사시간 내내 학생들의 듣기 좋은 웃음과 대화가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면 학생들은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고 깨끗이 설거지를 하였고, 간단히 후식을 차려내었다. 말하자면 그녀들이 머문 5일 동안 집안은 학생들의 방식으로, 학생 중심으로 꾸려졌다. 시누이의 강력한 주장으로 오빠(그녀의 남편_)는 평생 처음으로 새벽에 마당을 쓸었다. (통상 그것은 남자의 일은 아니었다).


시작 전에 모두를 위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거침없이 웃고 말하는 것, 자기들끼리 하루하루 계획을 세워놓고 시간에 맞춰 실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소한 것들인데 어째서 그녀에게는 충격과 같은 경험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잠자리를 나서면서 다시 잠자리로 들어설 때까지 한 순간도 자신의 시간이 아닌,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하루해가 저무는 자신의 생활과는 달리, 자기들의 시간을 자기들이 계획한 대로 보내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섯 여성이 머물고 간 후 시골 동네에 남겨진 파장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들과 다른 ‘서울 사람’을 본 것이 너무 신기했고, 잊지 말아야 할 경험이 되었다. 그녀와 시누이는 그 닷새 동안 몇 번인가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시누이가 그녀를 따라다니는 방식으로 대화는 이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아침밥을 지을 때, 시누이는 부시시한 채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 아침밥을 마치고 우물에서 설거지를 할 때 시누이는 슬그머니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도왔다. 새참을 내갈 때, 숭늉 주전자를 들고 그녀 옆을 따라 걸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시누이와 그녀는 끊임없이 웃고 대화하였다. 그리하여 그 닷새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인생의 한 순간이 되었다.  


시누이의 눈에 비친 그녀의 삶은 이채로웠다. 바야흐로 여성도 한 주체가 되어가는 개방화 시대에 눈에 비친 언니의 모습은 정반대로 가는 모습이었다. 집안과 들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 늘 혼자였다. 사람들과 그리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패배한 사람의 모습이라기 보단,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웃는 모습이 없었다. 일 하나를 끝내면 바로 다음일에 착수했다. 하루를 채우는 데 빈 구석 빈 시간이 없는 여자였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높은 문턱 두 개와 마루와 마당이 있는 집 구조에서 하루 두 번 부엌에서 안방으로 두 개의 밥상을 채려 내는 솜씨와 속도에 감탄했고, 그 노동량은 안쓰러웠다. 


‘언니, 아이들 어떻게 키울 거야?’

마지막 날, 저녁밥을 짓는 가마솥 아궁이에 앉아 밑불을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은 여유로워 보였는지 시누이가 곁에 앉아,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라나 애교와 자신이 넘치는 말투였다. 그리고 뭔가 의지를 담은 질문이었다.


‘언니가 원하면 내가 애들 데리고 있을 수 있어. 내가 교회 나가면서 조금씩 수입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조만간 널찍한 방 구할 생각이야.’ 마치 언니가 혹은 언니와 오빠가 어떤 꿈으로 얽혀있는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상대방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게 뭔지를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했다. 다만 그것은 현실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여자 신분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 재직하게 되면 보통 전도사 신분으로 고용되게 되는데 그 자리가 그리 여유가 있을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도회지 생활을 먼저 해 본 사람이 저런 제안을 해준다는 것은 마음속에 작은 떡잎만 한 크기의 꿈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용기와 희망이 되는 제안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가이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캄캄한 길을 무작정 떠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요즘에 애들을 여기다 둬선 안된다고 생각해. 여자 애건 남자아이건.. 그리고 오빠 언니 아이들이 내가 보기에 굉장히 똑똑해서 서울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성장하면 좋은 대학교 나와서 어엿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거야’


‘도시생활이 쉬운 게 아닌데.. 내가 따라나갈 수도 없게 되었어.’

독백하듯, 그녀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이미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에게 더 이상 숨기고 뭐고 할 게 없었다. 


‘다시 준비해서 보내려면 어느 세월 일지 몰라. 아이들은 커가니까, 시기를 놓치면 여느 아이들처럼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에 갇히게 될 거야. 언니가 잘 생각해야 해. 오빠는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그녀는 말없이 부뚜막 밑불만 바라보았다. 시누이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녀의 마음 한 켠 한 켠을 꽉 채워왔다. 자칫하면 주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 같아, 부뚜막 속으로 사라지는 장작불을 응시하면서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아이와 외출




시누이와 친구들이 다녀갔던 그 해, 그녀의 아들이 6살 되던 해, 늦은 가을 날.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서천으로 장항으로 군산으로 나아갔다. 아침에 시작한 그들의 단기여행은 서천에서 밤 8시 30분에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오르면서 마무리되는 일정이었다. 그날, 아침상을 정리하자마자 그녀는 간단히 외출할 채비를 했고, 아이에게도 평소와 약간 다른 옷을 입혔고 같이 외출할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이 날을 오래전부터 준비했다. 가을걷이는 모두 끝나 있어서 일꾼이나 품앗이가 없는 날임이 명확한 날이었고, 시부모가 그녀를 찾을 일이 크게 없는 날이었다. 점심은 작은 가마솥에 밥 두 공기를 잘 담아 따듯하도록 보관해두었고, 조기구이와 밑반찬 정도는 시어미니가 쉽게 챙기실 수 있게 밥상에 올려 밥상포로 덮어 두었다. 


그녀와 아이는 제일 이른 서천행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와, 동네 어귀를 빠져 나갔다. 장날도 아닌데 제 어미가 아이와 단둘이 일찌감치 동네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동네 사람들에게 낯설었는지, 금새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일 년 내내 일만 하더니 웬일로 외출을 다하는 거야? 다른 애들은 다 집에 두고 어째서 아들만 데리고 어딜 그리 아침부터 나서는 거야?’ 동네에서 그나마 그녀가 언니라고 부르면서 가깝게 지내는 아랫마을 조실언니가 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큰소리를 질렀다. 


‘응, 우리 아들하고 데이터 하러 나가.’ 그녀는 약간 과장되게 즐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데이트라는 말의 의미를 대략 알고 있었다. 지난 여름 시누이가 남기고 간 흔적이 배어 있었다. 


조실언니는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즐겁게 말을 던져온 기억을 찾기 쉽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얼라. 인철네가 신났구만. 오랜만에 아주 신이 났어. 그려. 아들네미랑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구경 많이 하고 그러고 와’ 조실언니도 덩달아 신이나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대화는 바로 담을 넘어 막 아침상을 물리고 있던 상규네, 동근네 귀까지 다다랐다. 상규네 동근네 명근네.. 마을 어귀를 내다볼 수 있는 집에서 다들 뭔 볼거리가 난 듯 담장 너머로 두 모자를 내다보았다. ‘인철네 어디 간다고? 뭔 일이래? 잘 댕겨와’ 목청 큰 동근네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자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려그려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장날이 아니어서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이는 태어나서 제일 먼 곳까지 나가본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지난 밤에 그녀로부터 군산까지 갔다 올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군산은 행정구역이 전라북도로 바뀌기도 했지만 당시로서는 배를 타고 넘어가야 하는 아주 먼 곳이었으므로 그리 크게 느낌이 오지 않았다. 아이는 오히려 장항읍을 간다는 말에 더 설레었다. 장항은 제련소가 있고, 항구가 있는, 근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비록 서천이 군소재지였지만, 장항은 더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독립 읍이었다. 아이를 포함해 동네 아이들에게 장항은 하늘 높이 치솟은 제련소 굴뚝으로 상징되는 도시였다. 맑은 날 마을 뒷산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25 키로 밖에 있는 장항 제련소 굴뚝이 아이들 눈에 뚜렷했다. 그 굴뚝은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고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아이들에겐 군소재지인 서천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부모님들에게 서천장 갈 때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면 갈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장항은 어떤 목적이나 원인으로도 닿기 어려운, 조금은 미지의 지역 같은 곳이었다. 서천까지는 그래도 ‘우리’가 사는 곳이었으나 장항은 그밖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일이면 내가 그 제련소 굴뚝을 보고 왔다고 동네 또래 아이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아이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버스가 도착한 서천 정류소는 그간 소년이 봐온 어떤 장소보다 분주하고 시끄럽고 많은 사람이 동시에 오가는 그런 곳이었다. 버스 정류소에 버스가 도착할 때부터 아이의 눈은 창밖의 풍경에 고정되어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에게 창밖 풍경은 어떤 것일까? 


그녀는 무엇보다 아이에게 서울로 가는 기차를 보여주고 싶었다. 서천 정류소에서 나와 북쪽으로 조금 걸어올라 가자, 소담한 장항선 서천역에 닿았다. 당시에는 역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쉽게 철도 가까이로 접근할 수 있었다. 잠시 후에 남쪽에서 길고 높은 기차소리가 들렸다. 특별히 위험을 알리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이곳으로 오고 있음을 의연 자랑스럽게 뽐내는 듯한 소리였다. 아이는 기차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봤다. 아주 먼 자락에서 휘어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대한 검은 물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늦가을에도 기찻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먼 곳의 기차는 마치 살아있는 뱀이 움직이듯 꿈틀거렸다. 눈앞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아이와 그녀의 앞으로 10개의 객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거대한 기운을 몰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가 흡사 딸려 들어갈 듯 흔들리자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 엉거주춤으로 앉아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아이의 눈에는 쇠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쇠바퀴가 규칙적으로 돌아가면서 철로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는 것이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열차는 서천역에 머무르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역을 지나쳤다. (아마 통일호였던 것 같다.). 그녀와 아이는 기차가 서천역을 뒤로 남겨두고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아이는 그때 어머니 손을 꼭 잡은 채 들어오고 나가는 기차를 본 모습을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기차를 보며, 아이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기차가 들어올 때 밀려오던 공기의 힘과 그것으로 몸이 밀리던 느낌을 잊지 못한다. 기차가 자기들 앞을 지나갈 때 잠시 몸이 앞으로 빨려 들어 가려했던 그 느낌과 공포를 잊지 못한다. 앉은 상태로 뚜렷이 응시했던 쇠바퀴의 단단함과 속도를 잊지 못한다. 기차가 역사를 지나 북쪽으로 사라질 때 갑자기 남겨진 고요함 혹은 공허함과 겹친 기차의 뒷모습을 잊지 못한다.) 


‘엄마,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거야’ 아이는 응당 물어야 할 것을 물어보는 신통한 면이 있었다.

 ‘응 아마 6시간 후면 서울에 도착하지’ 그녀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답을 해주었다. 

‘우린 언제 기차를 타볼 수 있어?’

‘멀지 않아 타보게 될 거야’ 그녀는 스스로 다짐하듯 아이의 질문에 답하였다. 


장항에서 거대한 그룹으로 움직이는 제련소 일꾼들을 보았다. 모두들 회색 빛깔의 작업복과 노란색 작업모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 뒷산에 올라 50리 밖에서 바라보던 웅장한 제련소 굴뚝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았다.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굴뚝에서는 엄청난 양의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서 보았을 때 그 연기는 가느다란 실처럼 보였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 연기는 여름날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먹구름과 비슷했다. 굴뚝을 벗어난 연기는 높게 멀리 솓아오르다 퍼져나갔다. 


장항에서 군산으로 가는 배는 20분 만에 모자를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실어 날랐다. 배표를 끊고 선착장으로 들어서자 건너편 군산항에서 출발한 배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선원들은 익숙한 솜씨로 밧줄을 던져 배를 고정시키고 배와 부두를 이어주는 간단한 다리를 이어 붙였다. 군산에서 온 손님들이 내리자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이 올라탔다. 배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몇몇 사람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큰소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제일 많이 보이는 사람은 커다란 붉은색 대야를 머리에 이거나 양손으로 움켜쥔 아주머니들이었다. 시골마을의 아주머니들과는 분명 뭔가가 달랐다. 이 아주머니들은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높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단호하고 거칠었다. 


‘서천서 장사하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녀는 바로 옆에서 주저없이 배 바닥에 앉아 자리를 차지한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예, 서천시장터 언니가게에 꽃게 한대야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이여’ 군산에 거주하는 가족들이고, 큰 가게는 군산에 두고, 솔찮이 장사가 되는 서천장은 언니가 맡아 장사를 하는 전형적인 배 부잣집 아주머니였다. 

‘아줌씨는 아들 데리고 마실 나오셨구먼?’ 그 아줌마도 이쪽의 신상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평일날 깨끗이 차려입은 모자가 군산-장항 배에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예. 농사일도 마치고 해서 겸사겸사 나왔네요’ 그녀의 목소리도 오랜만에 흥겨웠다. 마치 자신이 오늘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게 아주 잘한 일이었다는 듯. 

‘어디서 농사 지으셔’ 

‘마산면 신봉리에요’ 

‘아, 신봉.. 멀리 나오셨네. 자식새끼 세상 물정 구경시켜줄라고 나왔구먼. 엄마랑 맛있게 많이 먹고 좋은 구경 많이 해’ 붉은대야 아줌마는 그녀와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경쾌하게 말을 이어갔다. 장사하는 사람 특유의 빠른 판단, 거침없는 입담, 친근감이 느껴졌다. 시골마을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나도 그냥 농사나 지으면서 살걸. 힘들어서 못해먹겠네. 농사는 그래도 가을걷이 끝나면 조금 쉴 수도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해도 되고, 여러 사람 만나면서 안 좋은 꼴 안 봐도 되고, 시간에 안 쫓겨도 되고.. 그렇잖소. 이 놈의 장사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여. 매일매일 배질 하는 거 도와줘야지. 시간 맞춰 날라야지, 안 팔리면 손해 나고, 잘 팔리면 물건 또 날라다 줘야지.. 일 년 내내 쉴틈이 없어. 힘들어 죽겠소’ 반은 진담으로 반은 흥에 겨워 (조금은 자랑 삼은) 말이 계속 이어졌다. 


배가 군산항에 도착하자 아까 장항에 도착한 그 과정 그대로 배가 부두에 묶이고 간이형 다리가 설치되자 사람들은 저마다 빠른 걸음으로 군산항에 내려 더 많은 사람들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야, 여그, 내가 보니까 엄마가 작심하고 너를 데리고 마실 나왔네. 좋은 구경 많이 하고, 공부 열심히 해야 헌다.’ 붉은 대야 아줌마는 아이 손에 선뜻 백 원짜리 지폐를 쥐어 주면서 당부했다. 그녀가 말리려 했지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막을 겨를 없이 붉은 대야 아줌마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의 손에는 생선 비린내 살짝 풍기는 백 원짜리 지폐가 꼭 쥐어져 있었다. 그녀보다 열 살 정도 인생을 먼저 살아보았으니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마실 나온 사유는 너무 단순하고 명확하게 붉은대야 아줌마 가슴에 박혔던 것이리라. 


아이에게 모든 것은 처음이었고 낯설었고 강렬했다. 기차 바퀴가 무서워서 처음엔 그녀의 뒤에 숨어있다가, 기차가 움직이자 그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엄마 손을 꼭 잡고 기차 쪽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보았다. 파도를 따라 출렁이는 배의 움직임은 처음엔 어색했지만, 집 뒷산에 높이 자란 감나무의 튼튼한 가지 위에서 발을 구르면 오르락내리락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장항과 군산 사이로 밀려온 서해바다의 냄새는 갯벌의 그것과 섞여 사뭇 비릿하고 쿰쿰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시골마을의 아저씨 아줌마들과 달랐다. 좀 더 활기차 보였고, 바빠 보였다. 지금까지 시골마을과 학교를 세상의 전부로 알고 있었던 아이는 이 짧은 여행으로도 그보다 더 크고 많고 넓은 다른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아이를 압도한 것은 그 느낌, 그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들으시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서울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일까?’ 아이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것은 의문이기보단 동경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군산에서 장항으로 가는 마지막 배편은 생각보다 일찍 끊긴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좁은 바다일지라도 파고가 높아지고 조금이라도 어두워지면 사고 날 위험이 높아졌기 때문에, 모든 배편은 해 지는 시간에 맞춰 운행되었다. 마지막 배편을 타고 장항항에 도착하니 멀찌기 바라본 군산항은 저녁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바다와 산의 모습은 재빨리 어둠에 가리어졌기 때문에 불빛은 어둠 속에서 장관이었다. (당시만 해도 번성하였던) 군산항과 주변의 해산물 가게들이 밝혀놓은 전등불에, 막바지 마무리 작업을 위해 바삐 오가는 고깃배들이 벌겋게 켜놓은 불빛이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서둘러 장항 정류소에 도착했으나 마산면행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대신 문산면으로 가는 버스가 남아 있어서 가까스로 올라탔다. 마산면은 서천군에서 최북단에 위치해 있어서, 버스도 일찌감치 마지막 주행을 떠난 것이다. 문산면에서 집까지는 10리 정도를 걸어야 했다. 문산에서 출발하여 신봉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교회에 다다를 때까지 아이도 엄마의 손을 잡고 열심히 걸었으나, 이후부터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비틀거렸다. 그녀는 눈이 반쯤 감긴 아이를 업고 걷기 시작했다. 별빛만으로도 걷기에 부족함이 없는 맑은 밤이었다. 그녀의 따스한 등 뒤에서 아이는 이내 잠이 들었다. 두 사람에겐 익숙한 자세이다. 아마 이 두 사람은 이 자세로 백리를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를 지나고 짧은 신작로를 지나 마을길로 다다르자 그녀의 발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아이와 둘이 있는 시간을 더 갖고 싶었던 까닭이다.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여러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밤에 사람 발걸음 소리는 동네 강아지들에겐 낯선 소리였다. 동네 어귀에서 제일 가까운 양규네 집 개가 먼저 짖기 시작했고, 동네 어귀를 지나 마을 길에 다다를 즈음 동근이네 집 강아지가 앳된 소리로 짖었다. 그녀의 시댁은 마을에서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회관을 지나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그녀의 시댁에 다다른다. 대문 밖 텃밭에 이르자 대문 안쪽에서 진돗개와 일반 누렁이가 교합된 복슬이가 뛰어나와 그녀를 반겼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사라졌던 며느리에 대한 타박이 이어졌다. 갓난아이가 뭘 안다고 그런 곳을 돌아다니느냐, 이 바쁜 중에 하루 종일 없어지면 어찌하느냐, 시집왔으면 죽을 때까지 붙어있을 생각을 해야지 오는 첫날부터 떠날 생각을 하니 우리 속이 안 상하겠느냐, … 


과묵한 편이던 시아버지가 마지막 타박을 하였다. 

너희가 떠날 거면 말리지 않겠다. 아이는 두고 떠나거라. 



아이에게 닥친 사고


아이가 7살 되던 해,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일로 인해 그녀는 아이를 서울로 보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늦가을 시골마을에서, 겨우내 이용할 이불을 새로 트는 것은 연례행사와 같았다. 넓지 않은 장롱 속에 켜켜이 쌓이고 눌려있던 솜이불을 모두 드러내, 솜은 새로 틀고, 겉이불은 새 것으로 단장하는 작업이다. 솜 트는 일은 남정네들이 장보는 날 솜틀집에 맡겼다 가져오는 일이었고, 여기에 겉이불을 새로 단장하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 이 일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한 해가 다 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불 단장하는 날은 덩달아 아이들도 신이 났다. 풀을 먹여서 빳빳해진 겉이불 위에 새로 튼 솜을 올리고 바느질을 시작하면, 아이들은 펼쳐놓은 이불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보드러운 감촉의 이불에서 가을 햇빛에 말려진 풀냄새가 풍겼다. 이불 이쪽 구석으로 들어가 저쪽 구석으로 나오는 게 그리 신나는 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바느질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어른들도 아이들을 그대로 두었다. 


어떤 과정으로 바늘 반쪽이 아이의 왼쪽 복사뼈 밑에 박히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잠시 쉴 틈에 그녀는 늘 하듯이 바늘을 작업하는 부근 어디엔가 꽂아 두었을 것이다. 미리 실을 꿰어 놓는 게 편했으므로, 바늘은 꼭 한 개는 아니었다. 이불 사이와 이불 밑과 위를 뒹그르다가 순간적으로 아이는 발목 근처에서 따끔함을 느꼈다. 일어서다 아픔에 눌려 다시 이불 위로 뒹굴고 말았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아픈 곳을 눌러보았다. 찔금 거리듯 통증이 느껴졌으나,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이불 작업을 다시 시작한 한 동안, 소년은 옆에서 별일 없었다는 듯이 앉아있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소년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얼른 이 일을 끝내고 저녁 밥상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잠시 후에 소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혹시 바늘이 몸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돼?'

'글쎄 빨리 빼내야지' 뜬금없는 질문이어서, 싱겁게 답변했다

'빨리 안 빼내면?' 

'혹시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돌아다니다가 심장에 박힐 있지..' 사실 그러한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 아이에게 이상한 소리 그만하라는 의미가 더 컸다.

….

'엄마 나 바늘에 찔린 거 같아'


아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는 꿰매던 이불을 높이 들어 먼지를 털 듯 털어 내렸다. 그리고 이불을 한쪽 구석으로 접어놓고 빗자루로 방구석구석을 조심스럽게 쓸어, 걸리는 것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 그 속에서 짧은 순간 반짝이는 날카로운 금속 바늘 윗부분을 발견했다. 나머지 절반이 어디로 갔는지는 명확했다. 그녀는 발목 부위에 얇은 손수건을 대고 그 위를 굵은 노끈으로 칭칭 동여매었다. 시각을 보니 4시를 넘기고 있었다. 하루 3번 다니는 버스는 이제 끊어졌다. 그녀는 아이를 등에 엎고, 현금을 챙긴 후 30리 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걸었다기보단 달리는 쪽이었다. 누구에게 설명 같은 걸 할 시간이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머릿속엔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아이를 수술 가능한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30리 밖 서천 읍내였다. 


그녀는 작은 금속이 행여나 아이를 더 심하게 다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어리석지만 단 하나의 가정, 혹시 그 작은 금속이 아이를 조금이라도 해칠 수 있겠다는 두려움에 기인했다. 30리 길을 내달리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큰길보다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짧은 길로 내달았다. 아이는 엄마의 등 뒤에서 평안했다. 언제나 그곳에 있던 따듯한 등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좀 길게 등에 있을 수 있었다. 아이는 그게 좋을 뿐이었다. 아이는 잠시 졸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아이는 가벼운 아이였고 그녀는 힘이 넘치는 한참 때 여성이었다. 7시가 채 못되어 그녀는 서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환자가 없어 무료해 보이는 응급실 직원들은 이상한 형태의 환자 조합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맞아 주었다. 응급실 담당의사는그녀의 설명을 듣고 약간의 실소를 머금었다. 


'어머니 내일 편히 오셨어도 돼요.'

'혹시나 움직이지 않을까 하고'

'뼈나 근육에 박혀 있을 거예요'

'다행이네. 지금 빼낼 수 있나요?'

'네. 간단히 마취하고 빼드릴게요.'


응급의는 간단한 시술로 아이 몸에 박혀있던 금속 물질을 핀셋으로 끄집어 내 스테인리스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1cm 정도 부러진 바늘 끝부분이 스테인리스 그릇 위에서 투박하게 반짝였다. 시술 부위를 꿰매고 붕대로 감아주는 것으로  간단한 시술은 끝이 났다. 


'집이 어디세요?'

'마산면이에요'

'이 시간에 어떻게 가세요. 차도 다 끊겼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기분이면 서울까지도 갑니다.'


아이를 엎은 그녀의 발걸음은 사뿐했다. 다행히 문산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편이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 중간쯤에 아이는 슬며시 미안해졌다.


'엄마 힘들지 않아?'

'한 개도 힘 안 드네.'

'낼 와도 되었다며?'

'아녀, 빨리 빼내는 게 좋은 거야'

'그래도 힘들잖아?'

'지금 같어선 서울까지도 갈 수 있겠네.'

문산시내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 즈음, 모자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한동안 상처부위에 묶인 붕대를 외려 자랑삼아 풀지 않고 다녔다. 병원 응급실을 다녀온 건 아마 근방 꼬마들 중에서 아이가 처음일 게다. 


그녀는 한동안 발목에 붕대를 감싼 채 뒤뚱거리듯 걷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는 내년이면 학교공부를 시작해야하는 나이인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자신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조건 자기 곁에 두는 게 아이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어떤 사유로건, 어디서건 일은 닥치는 것이다. 여기 있다 보니 아이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다. 계절별로 끝도 없이 닥치는 일을 하느라, 시부모 모시는 일에, 눈치 보는 일에... 말하자면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인 것이다. 바늘은 그 순간에 아이에게 파고든 것이다. 여기 있다고 특별히 편하거나 나아질 건 없다. 도회지에서 살아도 여기서 하는 만큼 일하면 뭘 하든 먹고는 살게 돼 있어. 외지로 나가면 오히려 나와 아이에게 더 집중할 수 있어.'


막연하지만 그렇게 그녀의 마음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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