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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Aug 09. 2020

우리 벤츠 살까?

정든 우리 차를 떠나보내며

우리 차 계기판

우리 차의 나이는 98년생 22살,
누적 30만 킬로의 위엄을 뽐낸다.


직관적인 버튼들

카세트테이프도 들어간다.


장난감 같은 열쇠

차 키도 군더더기가 없다. 오로지 문을 열고 잠그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말 그대로 열어주는 쇳덩이,  열 to the 쇠다.

신혼 때 이 차를 만났다.

신혼 2개월 차에 임신이 되어서 차를 사려고 벼르던 중 남편 외삼촌께서 마침 새 차를 뽑으셨고 외삼촌의 헌 차가 우리에게 왔다. 헌 차든 새 차든 없던 차가 생기니 편하고 좋았다. 그 덕에 차 살 돈으로 대출도 일부 갚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쉬운 대로 좀 타다가 3년 안에 새 차를 살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린 그 차에 첫째 아이를 태워 다녔고 둘째도 태우고, 둘째가 주니어 카시트로 갈아타는 지금까지 7년째 타고 있다.

"조금이라도 고장 나면 미련 없이 새 차로 바꾸자"

우리가 늘 하던 얘기였다. 수리비조차 아깝다는 뜻이다. 낡은 것 빼고는 너무나 잘 굴러가던 차여서 그냥 버리기엔 아깝고 혹시나 어디 이상이 생기면 그 핑계로 바꿔 버릴 생각이었다. 사실 고장이 나길 간절히 바랬었다. 그렇게 이 질기고 질긴 인연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차는 너무 튼튼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튼튼했다.

"아이고.. 너희들 차는 언제 바꿀 거니?"

가족들은 그 차를 계속 몰고 다니는 우리를 보고 징그럽다했다. 우리 차는 '웨에엥'거리는 20세기 차 특유의 엔진 소리를 내며 어딜 가든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멀리서도 들리는 우리 차 엔진 소리를 듣고 우리가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번씩 시동이 안 걸릴 때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걸리고 운이 나쁘면 끝까지 안 걸려서 사람을 불러야 했다. 시동이 안 걸릴 때마다 우리는 다 같이 기도를 했다.

"하나님, 우리 차 시동 걸리게 해 주세요. 제발"

신기하게도 기도를 하고 나면 시동이 걸렸다.

"휴.... " 식은땀이 났다.

그렇게 힘들게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우리 왜 이렇게 힘들게 살지? 걍 차를 살까' 는 충동이 솟구쳤다. 그렇지만 차를 바꿀 만큼의 사유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어쨌든 시동은 늘 걸렸으니까.

남편과 나는 둘 다 남의 시선보다는 실속을 따지는 스타일이어서 겉만 고물일 뿐 속은 멀쩡한 차를 차마 버리지 못했다. 우리 차가 뿜어내는 예스러운 기운은 늘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난 이 차를 타는 게 정말 괜찮고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오히려 우리 차를 디스 곤 했다.

"나는 차가 달리다가 갑자기 분리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니까? 하. 하. 하 "

나의 쿨함 앞에서 흩날리던 웃음들은 뭔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금세 사라졌다. 그때 난 창피했던 걸까?

차 사고가 났던 적도 있었다. 둘째가 뱃속에 있을 때 25톤 트럭이 급하게 차선을 변경하면서 우리 차 측면을 치는 사고였다. 인명피해는 없었고 차 한쪽 문만 움푹 파였다. 큰 트럭이 와서 부딪혔는데도 큰 피해가 없자 우리 차에 대한 경이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 차 뭐야?"

우리 차는 카센터에서 찌그러진 문짝을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문으로 교체하고 한층 더 튼튼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 앞으로 한참 더 타겠구나'

새 차에 대한 희망이 거의 사라진 우리는 지금 타고 있는 차의 좋은 점을 찾기 시작했다. 차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 차로 말할 것 같으면 지구를 8바퀴나 돌았고 25톤 트럭이 달려들어도 끄덕 없는 차라고. 앞으로 큰 애 대학 갈 때까지는 족히 타지 않겠냐고 게거품을 물었다.



그런데 최근 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났다. 게다가 에어컨을 틀어놓으면 차가 힘이 달려서 오르막길을 만났을 때는 엑셀을 연달아 세게 밞아 주어야 아주 힘겹게 통과할 정도였다. 엔진은 '웨에엥' 소리를 넘어 '이이이잉' 우는 소리를 냈다. (드디어) 차의 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직감했다.

차를 카센터에 맡겼다. 점검 결과, 타이어 마모가 심하고 바퀴랑 본체의 연결부분도 찢어지고 온갖 밸브도 찢어져 엔진오일이 줄줄 다 새고 있었다. 이 차가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속이 썩어 있었다.

누유 자국과 망가진 등속 조인트

수리비 견적은 80만 원 정도 나왔다. 막상 차 상태가 그 지경이란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불과 방금 전까지도 우리를 실어 날랐던 차에게 너무 미안했다.

"수리하실 거예요?"

카센터 사장님이 묻는다.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아니요."

마음은 아프지만 이 차에 한 푼도 들이지 않겠다는 원칙은 여전히 확고했다. 우리는 이미 무슨 차를 구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일단 새 차 후보부터 정해야 했다. 갑자기 새 차를 탄다는 생각에 흥분이 됐다.

"우리 벤츠 살까?"

 말을 들은 남편이 빵 터졌다. 그 점잖은 사람이 집이 떠나가도록 '하하하하하하하하' 복식호흡으로 웃어댔다. 나도 웃었다. 한참을 같이 웃었다. 그러다 나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니 벤츠를 못 탈건 또 뭐야? 그동안 고생하고 아껴서 돈 많이 모았잖아. 우리도 좀 누리고 살자!"

사실 난 벤츠가 어째서 좋은 차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냥 이태원 클래스에서 박새로이가 타고 나온 차라서 좋았다. 벤츠가 성공의 상징처럼 등장하던 그 드라마 같이 비록 나는 현실에서 똥차를 타고 있지만 젠가는 벤츠도 한번 끌어 보고픈 야망이 있었나 보다.


남편은 벤츠를 사게 됐을 때 내야 할 세금, 자동차 보험료, 수리비용 같은 것에 대해 조곤조곤 눈꼴사납게 얘기했다. (포기하라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늘여서 한다.) 나는 얘기한다.

"아이고... 내가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사자고 했겠어?

하지만 오가는 언쟁 속에서 남편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벤츠를 사지 않을 거라는 걸.
가성비의 노예인 우리의 사고로는 절대 벤츠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차의 우선 조건은 안전이었다. 예상하는 금액 범위 내에서 주변의 조언들을 종합해 후보를 3개로 압축했다. 현대 펠리세이드, 볼보 xc60, 폭스바겐 티구안 2세대. 시승센터를 찾아가 다 시승해보고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했다. 혹시 새 차 같은 중고가 있을까 중고 앱도 샅샅이 뒤졌다.

결국 우리는 후보 중에 안전하고 가성비 갑이라는 suv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다운 선택이다.



지금 차는 폐차하기로 했다. 폐차처리비용을 내가 부담하는 줄 알았는데 되려 고철값 30만 원을 받는다.

'마지막까지 너란 차...'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났다.

오늘은 폐차 직전의 우리 차 내부를 싹 비웠다.
기분이 이상했다. 별의별 물건이 다 나왔다. 원래 차주였던 남편 외삼촌의 소싯적 사진 한 장, 첫째 3살 때 찍은 즉석 사진 배지도 발견되었다. 차 안에 외삼촌과 우리의 추억이 뒤섞여 있었다.


자꾸 센티한 기분이 들어 '이 차를 그냥 운전 연습용으로 놔둘까'도 1초 생각했다.



"얘들아 우리 차는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하늘나라로 보내주기로 했어."

우리 차와 곧 이별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얘기했을 때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특히 첫째가 많이 슬퍼했다. 지금보다 훠얼씬 좋은 차를 타게 되는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저 지금 차가 더 좋단다.

하긴 애들에겐 벤츠, 아니 벤츠 할배를 갖다 준대도 평생을 동거 동락해 온 우리 똥차가 '우리 차'다. 새 차의 쾌적함과 안락함을 맛보는 순간 바로 잊혀질 '그때 그 차'가 될 거지만.

버튼 하나로 시동이 걸리고 엔진 소음도 없고 열쇠를 직접 안 돌려도 문이 열리는 새 차를 타게 되면 우리를 가끔 애먹였던 그 차가 생각날 것이다.

그리고 도로에서 우리 차와 동기인 98년생 차를 만나면 반가워서 한참 동안 볼 것이다. 주인이 누굴까 궁금해하면서.



마지막  운전, 차 보내주러 가는 길

차를 보내주러 가는 마지막 여정이다.

너는 곧 닥칠 너의 운명을 모르고 또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겠지.


"지겹고 고마웠다. 안녕.."(1998.8~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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