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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Aug 05. 2020

똥 좀 싸고 올게.

언제나 설레는 화장실 가는 길

나는 화장실 가는 걸 좋아한다.
우리 남편도 화장실 가는 걸 좋아한다.
집안에서 화장실은 우리의 최애 장소이다.

우리 집 미니 인간들이 화장실 간다는 사람에게는 아주 관대한 편이라서다. 같이 늑대 놀이를 하는 와중에 놀이의 핵심인 늑대 역할 맡은 내가 화장실을 간다고  모든 걸 중단하고 순순히 보내줄 정도로 후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상대하는 게 힘 부칠 때면 똥을 핑계로 화장실로 피신해 사나워진 정신을 재정비하고 눈치 보며 간간히 숨어서 하던 폰질도 맘껏 한다.

"얘들아 아빠 똥 좀 싸고 올게!"

미니 인간들의 이러한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남편이 선수를 친다.  신호를 받은 남편은 상기된 얼굴로 자기가 곧 화장실에 갈 거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선포한 뒤 화장실 나들이의 필수품인 폰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못 찾길 간절히 바랬는데 기어이 폰을 찾아 서둘러가는 뒷모습이 왠지 얄밉다.

남편의 화장실 입장과 동시에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야구중계 소리가 내게 의구심을 일으킨다.


'진짜 똥 신호가 온 게 맞을까?' 

'야구중계 시간에 맞춰 똥을 짜내는 건 아닐까?'

같은 처지에 똥 신호 진정성 진위 여부를 따지는 나 자신이 옹졸하게 느껴진다. 그의 대창자 속 상황이 어찌 됐건 화장실행이 설레는 그의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15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나올 똥은 충분히 다 나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어쩌면 우리는 똥에 자비로운 미니 인간들로 인해 유례없이 많 똥을 배출 아니 짜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은 비가 그친 대신 습도가 어마하게 높은 날이었다. 처음으로 안방 에어컨을 풀로 가동했고 미니 인간들은 시원한 바람에 마구 들뜨기 시작했다. 남편도 그 분위기에 가세하여 액션 게임, 쇠똥구리 똥 굴리기 놀이(지긋지긋한 똥) 급기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각설이 타령까지 해댔다. 미니 인간들은 그런 편을 절대 놓아주지 않았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려온 익숙한 한마디.

"얘들아 아빠 똥.. 똥 좀 싸고 올게!"

그제야 미니 인간들은 그를 놔주었고 모든 상황은 종결되었다. 남편은 폰을 품에 안고 화장실 문어 들어갔다. 

난 속으로 남편에게 외쳤다.

'여보! 애들이랑 놀아준다고 고생 많았지? 똥 오래오래 원 없이 싸고 와! (아니 앉아 있다와) 15분이건 15시간이건 상관없이! 수고했어"


그렇게 그는 한참 그곳에 머물러있었다.


(더러운 내용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쾌변 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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