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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Aug 02. 2020

그때 공부 해두길 참 잘했다

이젠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진 나에게


새벽 3시,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아기 새벽 수유시간이다.


전자파 때문에 폰도 없이 부동자세로 아이가 분유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은 하루 중 잡생각이 가장 많아지는 시간이다.

내가 지금 이 새벽에 뭘 하고 있는 건지, 내 인생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건지, 급기야 가족들, 친구들의 말이나 행동까지 다시 곱씹어보다가 젖병에 분유가 동이 날 때쯤 왠지 모를 화가 많이 나있다. 그냥 억울하고 답답하고 서운하다.  

여태 내 인생을 스스로 운영하며 살았는데 이제 이 조그마한 미니 인간을 귀빈으로 모시고 퇴근, 퇴직 없이 일하는 비서(솔직히 시다바리)로 살아야 한다니.. 그것도 몇 년을.

이런 식으로 푸념을 하는 내게 친정부모님은 지금 나한테 아이를 잘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딨냐며 위로인 듯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셨고 그 말 날 더 우울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버티듯 살다 보니 7년이 지났고 두 미니 인간들은 이제 화장실도 혼자 가고 샤워도 혼자 하고 가끔 내 눈치를 살피기도 하는 고등한 존재로 진화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육아 스킬보다는 영어실력이 일취월장였다.

엄마라는 무조건적인 희생이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내가 하고 싶은  기필코 해내겠다는 오기 이뤄낸 산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영어공부다.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영어가 당겼다. 영어공부는 의지만 따라준다면 돈 안 들고 시간, 공간적 제약도 일절 없는 유비쿼터스적인 취미활동이었다. 마침 진건 강한 의지밖에 없었던  자잘한 나의 자유시간을 긁어모아 영어에 올인다.

육아 중의 영어공부시간은 내가 가장 나일수 있는 시간, 절대 신성불가침의 영역, 그 이상이었다. 나는 어느 누구라도(주로 남편) 그 시간을 방해한다면 물어뜯을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가 낮잠을 자면 바로 영어 노트를 꺼냈고 밤에도 아이를 재우고 홀로 거실에 앉아 새벽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각종 이슈가 생길 때마다 영문기사를 뽑아 핵심 용어들을 정리하고 비슷한 내용을 다룬 다양한 기사들을 비교하며 읽는 식었다.

그러다 박근혜 탄핵정국 때 국정농단이란 표현을 노트에 정리할 때쯤 현타가 왔다. '내가 이걸 어디에 써먹을 거라고 야밤에 이렇게 열심히 외우고 있나' 손목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이렇게 분기마다 한 번씩 회의감이 엄습해올 때면 영어와 잠시 분리되어 영어공부가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 봐야 고작 이틀 남짓이었지만.

남편은 잠까지 아껴가며 공부하는 내게 고시 준비하냐며 그냥 그 시간에 푹 쉬면서 컨디션 조절하고 제발 자기한테 짜증 좀 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면 나는, 이마저 안 했으면 지금보다 열 배는 짜증 냈을 거라며 우울증 자가치료 중인 내게 고마워하라고 맞받아쳤다.  

영어공부를 해서 뭘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도 없었다. 아무리 해도 티 안 나는 집안일, 내 맘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육아와는 달리 영어실력은 아주 느린 속도지만 투자한 시간에 정비례해서 느는 맛이 있었다. 쌓여가는 노트만큼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잠깐이나마 나를 막연한 불안감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때의 열정은 나의 자유시간과 반비례해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지난 6년간의 뜨거웠던 영어 집중기는 추억으로 느껴질 만큼 희미해졌다. 그래도 목표 없는 것치곤 오래 했다. 난 이제 그때만큼 순수하게 영어공부를 못한다. 영어 하나에 올인하기에는 세상에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어를 중단하지도 못한다. 영어는 내가 마치 호흡을 하듯 의식 안 해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삶의 일부 때문이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집착하듯이 려보고 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만약 또 영어를 저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그땐 아마 내가 교도소에 수감이 되거나 격리가 되거나 셋째가 생겼기(상상하는 것도 싫다)때문일 것이다.

그때 공부 해두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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