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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Oct 06. 2020

얼굴이 두꺼워서 이룬 꿈

젤리 슈즈 신고 줌바해봤어?


나는 1년 4개월 차 줌바 강사다.

(그중 절반은 코로나로 쉰 기간이긴 하지만)


살면서 언젠가는 운동도 하고 돈도 버는 직업을 갖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삼십 대 중반이 되기 전에 취미로 하던 줌바로 그 꿈을 이루었다. 나는 운동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먹으면 족족 살로 반영이 되는 정직한 체질이라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100세 시대에 운동을 취미로 갖는 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자산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운동을 단순 취미로 즐기기엔 나는 상당히 목표 지향적인 성향이라 운동을 할 때도 체중 감량 이상의 목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세운 목표가 운동 강사였다. 그러려면 평생 업으로 할만한 운동부터 찾아야 하는데 웨이트도 해보고 요가도 해보고 살사댄스도 해보고 스피닝도 해보고 줄넘기도 해보고 수영도 해봤지만 내 운동이라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첫째 출산 후, 확 불어난 살에 위기감을 느껴 무슨 운동을 할까 궁리를 하던 중, 혹시나 '이런 것도 있을까' 심심풀이로 내 관심사를 마음대로 조합해서 구글 검색을 해본 적이 있다.

#라틴댄스 운동
#라틴음악 다이어트
#해외에서 운동
#라틴 피트니스
#라틴 다이어트

번의 클릭 후 정말로 라틴댄스를 운동과 접목시킨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운동이 바로 줌바(Zumba)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운동을 개발해줘서 참으로 고마웠다. 그때가 2015년이었다. 집 주변에 줌바 수업이 있는지 검색해보니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미국에서 생긴 운동이라 아직 한국에서는 활성화되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못해도 언젠가는 줌바를 꼭 해보기로 맘먹었다.

3년 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나는 드디어 벼르던 줌바를 하려고 수업을 찾아보았다.  
그동안 줌바는 한 시간에 1000칼로리 소모라는 다이어트 댄스의 대명사로 승승장구하여 웬만한 피트니스에는 다 개설이 돼있을 정도로 입지가 높아져 있었다. (칼로리 소모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마케팅의 성공이라고 본다.) 집 근처, 어린이집 근처 스포츠센터 줌바 수업은 늘 마감이었다. 신규로 수강 신청을 하려면 매일 센터에 수강 취소 인원은 없는지 확인 전화를 해야 했다.

몇 달의 기다림 끝에 센터에서 딱  자리가 비어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 정말요? 지금 갈게요! 제발 그 자리 킵해주세요. 지금 가고 있어요!" 무슨 대학 추가합격 소식을 듣고 등록하러 가는 사람처럼 긴급하게 아이 둘을 데리고 택시까지 타고 갔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오두방정인지 헛웃음이 나왔지만 진심 기뻤다.




고대하던 줌바 수업 첫날, 나는 줌바 수업 등록한 걸 곧바로 후회했다. 수업 10분 전에 도착해서 몸을 풀면서 보니 다들 허리에는 똑같은 체크 남방을 두르고 줌바라고 프린트된 티셔츠를 각자의 개성대로 리폼해서 입고 있었다. 옷차림만으로도 줌바 수업에 대한 그들의 충성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연령대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 왁자지껄한 회원들 간의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오랫동안 함께 이 수업을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토록 빈자리가 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던 대목이었다.


내가 집에 너무 오래 갇혀 살았싶은 자괴감이 밀려올 정도로 나는 이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공기는 그들의 것과 사뭇 달랐다. 나는 집에서 종종 잠옷으로 입던 헐렁한 티셔츠에 늘어난 츄리닝 바지를 입고 어디에 자리를 잡고 서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수업 당일 아침 실내용 운동화를 부랴부랴 찾다가 보이지 않아서 급한 대로 내가 가진 신발 중 유일하게 실내에서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챙겨 나왔는데 그게 뭐냐 하면 젤리 슈즈였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한데 운동화가 없다고 수업을 포기할 순 없고 나름 짜낸 자구책이 젤리 슈즈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맨 뒷자리 구석에 서려고 했는데  그 자리도 나 같은 초보들 사이에서는 나름 경쟁이 치열했다.

맨 뒤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자니 저 멀리 사람들 사이로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는 한 사람이 보였다. 보라색 숏컷 머리, 풀 장착한 줌바 웨어, 길게 올라간 아이라인. 바로 줌바 선생님이셨다. 나는 선생님의 쎄 보이는 비주얼 앞에서 더 쭈구리가 되었다.

'절대로 선생님 눈에 띄어선 안된다'

선생님 눈에 내 젤리 슈즈가 눈에 띄는 순간, 수업이 중단되든, 얼차려를 받든, 퇴장을 당하든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냥 집에 갈까' 포기하려던 찰나에 경쾌한 음악과 함께 수업이 시작되고 말았다. 막상 수업이 시작되고 나니 모든 잡생각이 사라지고 줌바가 뭔지 한번 따라 해 보자는 의욕 살아났. 


맨날 '아기 상어~뚜루루 뚜루~'이런 것만 듣다가 내 20대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라틴음악을 들으니 오랜 속박에서 벗어난듯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눈에 안 띄게 마치 기존 회원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동작을 따라 하려다 보니 땀이 바가지로  흘렀다. 그런데 그게 너무 좋았다. 줌바 수업이 좋다기보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는 그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수업 중간쯤 되니 나도 몸이 풀렸는지 어느 정도 줌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만의 행복감에 한참 젖어 있는 와중 저 멀리 있던 줌바 선생님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게 보였다. 종착지가 내 자리는 아니길 빌면서 내 앞에 선 회원 뒤에 숨어서 선생님이 얼른 지나가 주시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 에서 멈추셨고, 내 발을 정확하게 가리키며 한마디 하셨다. "운동화 신으세요!!"  


나는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살려 달라는 듯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하마터면 두 손도 모을 뻔했다.)

맨발에 젤리슈즈는 그냥 묻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운동화 신으세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또렷하게 귀에 박히던 그 일곱 글자가 남은 수업 시간 내내 나를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강사가 되어 반대의 위치가 되고 보니 그 젤리슈즈가 가려질 거라고 생각한 게 얼마나 헛된 바람이었는지 알겠다. 앞에 서면 회원들의 동작 하나, 작은 표정의 변화까지 훤히 감지할 수 있거늘.


항마력(손발이 오그라드는 광경을 보고 참아낼 수 있는 능력) 딸리는 나의 첫 줌바 수업 이후로 1년 반 동안 선생님과 줌바를 했고 이제는 선생님이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때 그 젤리슈즈 사건을 기억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뜻밖에 선생님은 '그런 일이 있었어?'라며 기억을 못 하셨다. 다행이라기보다는 하도 민망한 사건이라 기억 못 하는 척을 해주시는 건가 의구심이 들긴 했다. 그때 젤리슈즈 때문에 수업을 포기했었다면 지금 내가 줌바를 할 수 있었을까? 두꺼운 낯짝이 인생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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