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썸머 신 Sep 15. 2021

나도 모르게 호구가 되는 의식의 흐름

동네 카페에서 7000원짜리 라떼 마시며


오전 9시 20분. 미니 인간들 등교가 완료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기관으로 흩어져 학습 및 사회생활을 하고 약 4시간 후 귀가할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4시간

신성한 나의 자유시간. 가슴이 벅차오른다.

특히 오늘 하루는 스타트가 좋은 편이었다.


9시 반 전에 모두 등교 완료, 굿

살랑살랑 초가을 날씨, 굿

오늘 미니 인간 5교시까지 하는 날, 굿

올 쓰리 굿


이 쓰리 굿이 맞아떨어지는 날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그런 날을 멍 때리면서 흥청망청 흘려보낸 후 하루를 마감할 때의 죄책감이란, 마치 친정 부모님이 텃밭에서 갓 수확해 보낸 싱싱한 야채를 요리해 먹지 않고 냉장고에 그대로 방치하다 썩혀 내다 버릴 때의 착잡한 기분과 비슷하다.


이 쓰리 굿이라는 재료를 맛깔나게 버무리는 양념은 역시 좋은 카페다. 나와 케미가 맞는 카페에서 억수로 맛있는 커피로 화룡점정을 찍어야 비로소 '잘 보낸 하루'라는 맛깔나는 요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의욕과 에너지가 풀로 차 있기 때문에 맨날 가던 카페 말고 새로운 목적지에도 도전해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한번 가보리라 점찍어 두었던 카페로 갔다. 세기말 부띠끄 느낌의 카페였다. 그 카페가 특이했던 건 약간 올드해 보이는 외관에 비해서 매번 지나갈 때마다 대학생 손님들이 차있었다는 점이다. 노상 대학생들이 창가 자리에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길래 저 카페는 엄청 공부가 잘되거나, 식사 대용으로 커피와 곁들여 먹을 사이드 메뉴가 맛있거나, 좌우지간 뭔가 그 카페만의 차별성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오늘 막상 카페에 가보니 긴 소파 좌석이 곳곳에서 90년대스러움을 자아내는 것 빼고는 여느 카페와 다름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주문을 하려고 카운터에 섰는데 사장님이 호프집에서 보던 스타일의 메뉴 책자를 펼쳐 보여 주셨다.



카페에서 메뉴 책자라니 이색적이긴 했다. 생맥주 2000cc, 아이스 황도, 노가리 같은 메뉴가 쓰여있을 법한 책자에는 영어와 한글로 커피이름이 쫙 나열되어 있었다. 그렇게 메뉴를 스캔하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6500원,

아이스 라떼 7000원

아이스 바닐라 라떼 7600원

그 외 등등


관광지 카페에서나 볼법한 사악한 가격 체계가 펼쳐져 있었다. 몇 초도 안 되는 찰나에 여길 빠져나가야 하나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그래도 비싼 이유가 있겠지 싶고, 무엇보다 가격 확인 직후 빤스런 하는 건 너무 추잡한 짓인 것 같아 걍 주문을 강행했다.


"아이스 라떼 한잔 주세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관리를 하면서 카드를 내밀었다. 사장님은 나갈 때 계산하는 거라며 카드를 받지 않으셨다. 카페 후불제라니, hoxy 추가 주문 필수인가 아니면 좌석 이용 시간만큼 할증료를 부과할 건가, 머릿 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황송하게도 사장님이 커피를 직접 서빙해주셨고 테이블가에 계산서를 살포시 놓고 가셨다.


7000원짜리 라떼라니 왠지 때깔부터 남달라 보이는 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아직 하나 되지 못한 우유와 에스프레소를 빨대로 열심히 섞은 뒤 경건한 마음으로 한 모금을 빨았다.


오. 폴바셋 커피만큼이나 진하고 쌉싸름한 원두의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 괜히 이 가격으로 동네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은 게 아니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닐까. 한 번쯤 먹어볼 만하네.'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를 한 거고, 동네 카페에서 이유 없이 라떼를 값 절이나 주고 사 먹는 호구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열심히 설득했다. 커피를 맛있게 먹으려고 이렇게 노오력을 하다니. 돈 몇천 원 때문에 내 하루에 오점을 남길 순 없으니까 닥치고 이 커피는 무조건 맛있는 거다. 넘나 우월한 커피쓰.


나중에 카페에 앉아 관찰하며 파악한 사실이지만 여기는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면 사장님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다시 오셔서 주문도 받고 음료도 갖다 주는 옛날식 커피숍 서빙 체제였다. 커피 가격에 이 모든 서비스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갈 때도 마신 음료는 테이블에 그대로 두고 나가 된다.


이 체제를 다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뼛속까지 셀프서비스에 길들여진 노예이기에 내 손으로 빈 커피잔을 치우고 테이블에 서린 물기도 냅킨으로 닦아내고 사장님께 감사인사까지 드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생각했다. 커피도 편안하게 잘 마셨고 최소한 호기심 해결은 했으니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를 하기는 개뿔 나는 호구라고.


작가의 이전글 종이접기 유튜버 네모 아저씨를 미워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